'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삿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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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1 04:17
https://www.mediawatch.kr/mobile/article.html?no=250562
이화여대 여성학과 김정란 씨는 자신의 정대협 체험을 토대로 2004년에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주된 내용은 정대협이 여성 문제를 민족 문제로 치환 왜곡해 위안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학자이자 정대협에도 투신했던 김 박사의 정대협 비판이 특별한 이유는 같은 진보좌파 진영에서 나온 ‘내부비판’이자 ‘자기비판’이라는 점에서다. 정치적 목적이 배제된 순수한 지적, 도덕적 동기에서 발로한 여성학자의 진심어린 충언인 셈이다. 김 박사의 논문은 정대협 스스로 펴낸 증언록을 토대로 정대협의 모순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성을 높이고 있기도 하다.
김정란 박사에 따르면 정대협은 전시 여성의 성 문제인 위안부 문제는 민족말살의 상징으로만 치환하려고 애를 썼다. 김 박사는 이런 차원에서 정대협이 조선인 위안부 모집과 운영방식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도 상당부분 왜곡하고 은폐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대협은 특히 ‘단결된 행동’을 위시해 위안부 할머니들 개개인의 의견을 철저히 억압하는 교조주의적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정대협은 90년대에는 일본측이 제공한 아시아여성기금(‘국민기금’이라고도 불림)을 수령한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신자로 낙인찍기도 했었다. ‘기금 수령=불명예’라는 등식은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김 박사는 여성의 성 문제를 ‘명예’와 연결 짓고 ‘민족’을 위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식 정대협의 강요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열녀 강요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수절을 강요했지만 지금 정대협은 ‘민족’을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의 민간위로금 거부’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정대협이 상정한 ‘민족적 대립구도’와 달리, 실제 조선인 위안부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일본을 증오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피해자의 성적 혹은 민족적 피해의 내용은 매우 중층적이며, 그들의 민족경험이라는 것도 하나의 잣대로 표현되기 어렵다.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가진 많은 피해자들이 있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기도한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일본인과 결혼을 꿈꾸거나 일본인의 아이를 낳아 살면서 이들의 민족 감정은 ‘적국=일본’ 이라는 단선적인 것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해방=기쁨’, ‘일본인=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돈도 못벌고, 몸을 버린 채” 맞게 된 조국의 해방은 크나 큰 절망과 좌절로 경험되었다. 지식인의 ‘민족’ 인식과 ‘위안부’ 피해자의 ‘민족’ 경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박복순, 배봉기할머니의 증언중 ';일본이 패전한게 너무 분했다';는 부분과 연결됨)
김 박사의 논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정대협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주의 노선이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을 억압하는 모순이다. 정대협의 위안부 할머니들 개인에 대한 억압은 ‘화냥년’이라는 주홍글씨로 극대화된다. 1997년 1월 7명의 할머니들은 일본이 조성한 국민기금을 수령한다. 김 박사는 “정대협은 국민기금을 ‘민간위로금’ 혹은 ‘동정금’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가난한 아시아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위한 술수’이자, ‘범죄은폐와 법적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수’로 규정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제는 관련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이 다양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금 정대협에서는 (일본에) 1억 5천을 요구한다, 천년 세월이란 말이여 이게. 나이 많은 할머니들은 1억 5천이 어디가 있느냐.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 아무 데고 마저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수가 이거야. 그냥 딴 뜻은 없는 것 같아. 할머니들 요구가 무리도 아니고. 거기서 인제 또 정대협에서 (국민기금을) 주지 말라고 일본에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고. 그래서 기금을 주지 말라는 얘기지··· (그러니) 보상을 주나? 안 주지. 아무 거고 몇 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먹게 내버려두지. 죽는 놈 죽고 사는 놈 살고 오래 살면 이제 보상 타는 놈 타고 이렇게 해결져야지. 하는 일이 답답해요.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석복순, 증언집 5권).”
“과연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의 유린된 인권의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의 파괴된 자존심의 문제인가. ‘위로금 수령=불명예’ 라는 공식 속에서 생존자들은 기금거부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누가 ‘그래도 나는 기금을 수령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로금을 받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는 앞서의 논리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정대협의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할 경우, 할머니들은 흩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즉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대협은 이들의 존재가 ‘위안부’ 운동의 성공적 전개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금의 수령은 그 자체로써 뿐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여러 파급효과에 대한 고려 속에서 격렬한 반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의 경제적 필요는 활동가들에게 우선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국민기금은 활동가들에게 단순한 ';돈 문제';로 이해되었으며, 중대한 역사적 시점임을 감안할 때 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피해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정적 가치가 부여되었고 수령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피해자들은 기금의 수령을 원했고 실제로 이를 수령하였다. 활동가와 일부 피해자들 간의 이러한 대응의 차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놓여있다.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지식인 활동가들은 오랜 세월 빈곤한 삶을 영위해온 생존자들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
2003년에 이미 위 논문을 통해 정의연의 실체가 드러나있었는데 철저히 묻힘. 이분도 그래서 무사한듯..안그랬으면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처럼 중상모략 마타도어공세에 이은 줄소송으로 매장당했을듯..
이화여대 여성학과 김정란 씨는 자신의 정대협 체험을 토대로 2004년에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주된 내용은 정대협이 여성 문제를 민족 문제로 치환 왜곡해 위안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학자이자 정대협에도 투신했던 김 박사의 정대협 비판이 특별한 이유는 같은 진보좌파 진영에서 나온 ‘내부비판’이자 ‘자기비판’이라는 점에서다. 정치적 목적이 배제된 순수한 지적, 도덕적 동기에서 발로한 여성학자의 진심어린 충언인 셈이다. 김 박사의 논문은 정대협 스스로 펴낸 증언록을 토대로 정대협의 모순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성을 높이고 있기도 하다.
김정란 박사에 따르면 정대협은 전시 여성의 성 문제인 위안부 문제는 민족말살의 상징으로만 치환하려고 애를 썼다. 김 박사는 이런 차원에서 정대협이 조선인 위안부 모집과 운영방식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도 상당부분 왜곡하고 은폐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대협은 특히 ‘단결된 행동’을 위시해 위안부 할머니들 개개인의 의견을 철저히 억압하는 교조주의적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정대협은 90년대에는 일본측이 제공한 아시아여성기금(‘국민기금’이라고도 불림)을 수령한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신자로 낙인찍기도 했었다. ‘기금 수령=불명예’라는 등식은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김 박사는 여성의 성 문제를 ‘명예’와 연결 짓고 ‘민족’을 위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식 정대협의 강요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열녀 강요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수절을 강요했지만 지금 정대협은 ‘민족’을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의 민간위로금 거부’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정대협이 상정한 ‘민족적 대립구도’와 달리, 실제 조선인 위안부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일본을 증오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피해자의 성적 혹은 민족적 피해의 내용은 매우 중층적이며, 그들의 민족경험이라는 것도 하나의 잣대로 표현되기 어렵다.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가진 많은 피해자들이 있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기도한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일본인과 결혼을 꿈꾸거나 일본인의 아이를 낳아 살면서 이들의 민족 감정은 ‘적국=일본’ 이라는 단선적인 것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해방=기쁨’, ‘일본인=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돈도 못벌고, 몸을 버린 채” 맞게 된 조국의 해방은 크나 큰 절망과 좌절로 경험되었다. 지식인의 ‘민족’ 인식과 ‘위안부’ 피해자의 ‘민족’ 경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박복순, 배봉기할머니의 증언중 ';일본이 패전한게 너무 분했다';는 부분과 연결됨)
김 박사의 논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정대협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주의 노선이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을 억압하는 모순이다. 정대협의 위안부 할머니들 개인에 대한 억압은 ‘화냥년’이라는 주홍글씨로 극대화된다. 1997년 1월 7명의 할머니들은 일본이 조성한 국민기금을 수령한다. 김 박사는 “정대협은 국민기금을 ‘민간위로금’ 혹은 ‘동정금’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가난한 아시아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위한 술수’이자, ‘범죄은폐와 법적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수’로 규정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제는 관련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이 다양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금 정대협에서는 (일본에) 1억 5천을 요구한다, 천년 세월이란 말이여 이게. 나이 많은 할머니들은 1억 5천이 어디가 있느냐.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 아무 데고 마저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수가 이거야. 그냥 딴 뜻은 없는 것 같아. 할머니들 요구가 무리도 아니고. 거기서 인제 또 정대협에서 (국민기금을) 주지 말라고 일본에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고. 그래서 기금을 주지 말라는 얘기지··· (그러니) 보상을 주나? 안 주지. 아무 거고 몇 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먹게 내버려두지. 죽는 놈 죽고 사는 놈 살고 오래 살면 이제 보상 타는 놈 타고 이렇게 해결져야지. 하는 일이 답답해요.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석복순, 증언집 5권).”
“과연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의 유린된 인권의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의 파괴된 자존심의 문제인가. ‘위로금 수령=불명예’ 라는 공식 속에서 생존자들은 기금거부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누가 ‘그래도 나는 기금을 수령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로금을 받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는 앞서의 논리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정대협의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할 경우, 할머니들은 흩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즉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대협은 이들의 존재가 ‘위안부’ 운동의 성공적 전개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금의 수령은 그 자체로써 뿐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여러 파급효과에 대한 고려 속에서 격렬한 반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의 경제적 필요는 활동가들에게 우선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국민기금은 활동가들에게 단순한 ';돈 문제';로 이해되었으며, 중대한 역사적 시점임을 감안할 때 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피해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정적 가치가 부여되었고 수령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피해자들은 기금의 수령을 원했고 실제로 이를 수령하였다. 활동가와 일부 피해자들 간의 이러한 대응의 차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놓여있다.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지식인 활동가들은 오랜 세월 빈곤한 삶을 영위해온 생존자들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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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커뮤니티 포털 - 밤킹넷https://www.bamking.net
[출처]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 야설 | 은꼴사 | 성인사이트 | 성인썰 - 핫썰닷컴)
https://hotssul.com/bbs/board.php?bo_table=free&page=115&wr_id=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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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0035
이 연구자에 따르면 할머니들은 자기가 겪은 피해를 알려서 명예를 회복하고 적절한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일본에 의해 강요당한 피해자인데도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손가락질받으며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 심리가 강하다. 이런 생각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저마다 생활 수준과 운동에 관한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 할머니들이 일본이 낸 10억 엔으로 세운 화해·치유재단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겠다는 뜻을 표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생활이 궁핍했던 일부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받으려 하자 정대협 활동가가 “더러운 돈을 받으면 화냥년 된다”며 못 받게 했다는 사례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한 여성학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성적인 치욕과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혐오적 표현을 사용하며 기금 수령을 못 하게 한 것은 심각한 2차 가해다. 그런 막말이 일본의 형식적인 사과보다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학자들은 피해 할머니와 활동가 사이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사안을 판단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취재 과정에서 자문을 구한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실명을 밝히기를 꺼렸다. 익명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마지못해 자기 의견을 밝혔다.
이유는 단순했다. 잘못 말했다간 ‘따돌림’당하기에 십상이란 것이다. 한때 정대협 활동에 참여했던 한 여성학자는 “이 바닥(여성운동계)이 워낙 좁아서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누군지 금방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결국 사법처벌까지 받게 된 박유하씨를 보면서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은 더더욱 입을 조심하게 됐다”고 했다.
학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학문적 견해로 볼 여지도 충분하지만, 위안부 운동의 주류 활동가들은 박 교수를 ‘친일 어용학자’로 낙인찍었다. 한 익명의 여성학자는 “박 교수의 주장은 [반일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는 활동가 그룹은 작은 비판조차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역사는 명분을 필요로 한다. 당사자에게 필요한 건 실리다. 명분과 실리가 조화를 이룰 접점을 찾는 건 지혜로운 연대로 가능하다. 한쪽을 고집할 때 연대의 고리에 생기는 균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정란 박사가 자신의 논문에서 강조한 대목은 16년이 지난 오늘 다시 곱씹어볼 만하다.
“생존자들의 남은 생이 길지 않다는 것은 무시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용되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실제로 생존자들의 수는 점차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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