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 15
자부 15
서울 역 대합실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다정스런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남녀가 보인다.
후우, 아직도 얼굴이 뜨거워 다 자기 때문이야.
하하, 그렇게 좋았어? 몰라, 아무리 오늘 헤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못살게 구는 사람이 어 딨 어? 미워 죽겠어. 정말.. 하하, 좋지는 않았고?
호호호.. 그냥 쓸 만했어.. 담부턴 운동 열심히 해서 잘 해봐.. 알았지?
짓궂은 표정이 된 은영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설마, 마누라한테.. 들키는 건 아니겠지? 뭘? 자기 제주도로 세미나 간다고 한 거 말이야.. 하하, 걱정 마 우리 마누란 날. 철썩 같이 믿고 있을 테니까..
하긴, 자기가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데...
그래, 이번엔 네가 부산으로 내려오는 거야. 알았지? 호호, 알았어..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안내방송...
이런, 벌써 시간이? 나, 가야겠다. 아 앙, 싫어.. 나도 따라가고 싶어...
하하, 나도 그래, 너하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 정말?
그럼, 정말이 잖 고, 조금만 기다려 마누라하고 헤어지는 대로 너하고 살 거니까 알았지? 피 이, 말로는 뭘 못해 빨리 가기나 해..
짐짓 밝은 표정으로 지민을 향해 눈을 흘긴 은영이 지민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못내 아쉬운 듯 자꾸만 은영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지민이 길게 늘어선 인파에 휩쓸려 자취를 감췄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뒤돌아서 걸어 나오는 은영은 금방 헤어졌음에도 이내 보고 싶은 마음에 답답해졌다.
불도저같이 밀어붙이기만 하는 회장님과는 너무 달랐다.
아버지 회사에 찾아와 우연히 만난 은영에게 관심을 표명했던 지민이 성민이 퇴근하고 없을 때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 나섰었다.
대학 교수, 아직은 전임강사라지만 어릴 적부터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은영이었다.
지민의 차분한 모습을 대할 때마다 아련한 연모의 감정을 느꼈었다.
그날 밤...
유부남인 지민에게 몸을 활짝 열어준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몰랐다.
그 후로 지민이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그들은 남몰래 만났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했고, 참지 못한 은영이 부산을 오간 것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세미나를 핑계로 한 3박4일간의 꿈같은 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될 터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너무도 소중해서 잃기 싫은 사랑이었다.
은영은 서울 역을 빠져 나와 광장에 섰다.
지민 씨가 가고 없는 서울역의 첨탑을 쳐다보며 슬픔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어때? 좋았어?
허여멀건 한 엉덩이를 드러낸 채 바닥에 엎드려있는 제수씨의 엉덩이를 철썩 때려주었다.
아얏, 그러지 마 아 퍼.. 후후, 빨리 일어나야지..
후우, 그래야 되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기운이 하나도 없어..
허허, 그렇게 좋았어? 으응, 오빠는 황제야. 섹스 황제 후후, 정말 대단해...
허허, 엉덩이 보니까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그제야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인식한 정은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눈을 하얗게 흘겼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성재하고는.. 헤어지고 싶어.. 아니, 헤어질 거야..
그럼, 혼자 살겠단 말이야?
후후, 할 수 없지 뭐.. 오빠 같이 멋있는 남자 있다면 모를까...
허허, 그럼.. 내가 살림 차려줄까? 아파트 하나 얻어서...
어머, 정말? 그럼, 형님은 헤어져야지 시동생하고 바람피운 여잘 데리고 살순 없지 아님 성재하고 살라고 하던가. 어때 네 생각은..
오빠가 알아서 해.. 하루를 살아도 오빠 같은 남자하고 살고 싶어..
어머, 벌써 가시게요? 으음, 얼만가...
두툼한 지갑 속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준 성민이 정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어머, 회장님 질투 나게 왜 그래요. 과부를 그렇게 놀리시면 벌 받아요.
허허, 어때? 우리 애인.. 너무 예뻐요.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만큼 호호호 회장님! 너무 좋으시겠다.
회춘하셔서 떼 끼.. 허허허...
기분 좋은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정은의 얼굴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 성민이 그리도 듬직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달콤한 미소를 베어 무는 정은이었다.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편안하게 누워있던 운전기사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정은은 자신을 바라보는 운전기사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싱긋 웃으며 성민이 열어준 뒷자리로 파고들었다
2년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민이 화려하게 장식된 묵직한 현관문 옆의 초인종을 누르고 안에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성민이었다.
잠시 후, 어머! 당신 이예요? 일찍 오셨네..
환호성이라도 지르는 듯 반가운 음색이었다. 철컥! 묵직한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열려진 문 사이로 하늘 색 탱크 탑과 핫팬츠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둘째 며느리 지영이 예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이윽고 들어서는 성민의 팔에 다정스럽게 팔짱을 끼워왔다.
어머! 오빠.. 일찍 왔네..
샤워를 한 듯 마 악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제수씨 정은이 예쁜 동체를 커다란 수건 한 장으로 감싼 채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음, 그래.. 애 엄마는? 어머! 이이.. 좀 봐 둘째 형님부터 찾는 거...
지영이 눈을 하얗게 흘기며 성민을 흘겨봤다.
그러니까. 애를 낳아야 돼.. 동생 우리도 애 하나씩 낳을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정말, 눈꼴 시려서 못 보겠어...
정은의 말에 지영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이 사람들 참, 성민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지영과 정은의 몸을 차례로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한 표정으로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성민의 품속에 얼굴을 묻는 두 여자였다.
타월에 가리 워 진 풍염한 정은의 엉덩이를 토닥거려준 성민이 안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돌이나 되었음직한 아이를 품에 안고 우유를 먹이고 있던 혜정이 퍼뜩 고개를 들어 성민을 바라봤다.
아빠! 일찍.. 들어왔네.. 아이를 낳느라 약간 몸이 불은 듯 혜정의 얼굴에 반가움이 잔뜩 묻어나왔다.
으응, 어디 보자 우리 진영이.. 성민이 아이를 안으려는 듯 혜정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팔을 뻗자 혜정이 다급하게 도리질 친다.
하지 마요. 지금, 금방 잠들었단 말이야...
허허, 그래? 알았어. 우리 둘째 마누라 닮아서 참, 예쁘게 생겼단 말이야.
성민은 살포시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아주는 대신 혜정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껴안아주었다.
그래, 애들은 내일 몇 시에 온대? 글쎄요. 지민 씨는 점심 전에 온다고 하던데 대전 지훈 씨는 잘, 모르겠어요.
지영이하고 통화하는 거 같던데.. 늦지는 않겠죠. 뭐, 허허허.. 이사람 아직도 지민 씨야? 호호, 그래도 한때 남편이었잖아요.
잘, 고쳐지지가 않아. 참, 이번에 지민 씨 조교수 됐대요.
아빠가 격려 좀 해 줘요. 허허, 그래? 거 잘됐다.
내일은 혜정과 성민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 진영의 돌이었다.
성민의 비서였던 서 은영과 남편 지민의 불륜 사실을 눈치 챈 혜정이 지민에게 이혼할 것을 요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혼에 응해 줬었다.
그 후 한 달 쯤 후에 서울에 올라온 혜정은 한동안 성민이 얻어준 아파트에서 기거하다가 성민의 아내 영란이 성민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시동생 성재와 살림을 차리면서 안주인으로 당당하게 입성했던 것이다.
남편 성재와 헤어진 정은도 성민의 배려에 못 이긴 척 성민의 집으로 들어와 방 하나를 차지했다.
그 후 서너 달 후, 일찌감치 지민과 헤어진 지영도 시아버지였던 성민의 품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처음 한 동안은 어색함에 서로에 대해서 앵돌아져 있던 세 여자는 그 중 나이가 많은 정은의 중재로 어떤 자매보다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 사실을 나중에야 안 두 아들은 펄펄 뛰며 성민에게 대들었지만 각각의 아내가 된 은영과 지숙의 설득으로 급격하게 화를 누그려 트렸다.
어쩌면 자신들도 불륜으로 시작된 사랑의 완성에 더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삭힐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 일 이후 두 아들에게 늘 상 냉랭하고 근엄하기만 했던 성민은 두 아들의 성공과 안락한 삶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토록 아껴오던 부동산의 상당부분을 증여하기도 했다.
그런 성민의 유화 제 스쳐 에 두 아들도 기꺼운 마음으로 응해 왔던 터라 지금은 어느 부자보다도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던 터였다.
다음날 아침... 띠 리 리 리~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렸던 터라 마음 놓고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성민의 핸드폰이 요즘 유행하는 최신 가요의 멜로디를 토해냈다.
둘째 며느리였다가 막내 아내가 된 지영이 입력해준 멜로디였다.
무심코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귀에 가져다 댄 성민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운전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님, 저예요. 지숙이...
대전에 사는 둘째 아들 지 훈의 아내가 된 지숙이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성민의 아내 지영의 사촌언니였다.
으응, 그래.. 아무래도 운전기사의 눈치를 살피느라 머뭇거리며 전화를 받는 성민이었다.
호호호... 옆에 누구 있어요? 으응, 호호호.. 그래요?
나, 아버님 빨리 보고 싶다 아.. 아버님도 지숙이 보고 싶어요? 으응..
치 잇, 무슨 대답이 그래? 혹시, 나 하나도 안보고 싶은 거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옆자리에 누가 있음에도 오히려 짓궂어진 둘째 며느리 지숙이 놀려대듯 성민의 귀에 재잘거렸다.
호호.. 나, 아버님한테 듣고 싶은.. 말 있어. 해.. 줄 거야?
으응, 말해봐라. 지숙아! 사랑해 해봐.. 그, 그건...
저절로 붉어지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성민의 귀에 깔깔거리는 둘째 며느리의 웃음소리가 흐드러지게 울려 퍼졌다.
호호호... 바람둥이 우리 아버님도 이럴 때가 다 있네.. 아이, 재밌어...
그래, 오늘 몇 시쯤에 올 거냐? 왜? 나 보고 싶어서? 으응...
일찍 갈게요. 나도 아버님! 너무 보고 싶거든.. 꼼짝 말고 기다려야 돼요.
알았죠? 그래, 기다리마...
통화를 마친 성민이 핸드폰의 폴더를 닫으며 어색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토해내고는 이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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