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그늘

기억그늘3
지금은 이름마져 생소한 국민학교 6학년 때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이름인가? 유신이라는 말을 많이 듣던해이니깐 박대통령이 제일 믿었던 지 부하에게 총 맞기 전 일겁니다.
그때 담임선생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한반에 학생수가 60명이 넘을 때니깐 완전히 콩나물 시루 교실이라는게 실감나던 때입니다.
그 시절 60명이 넘는 학생들을 다루는데는 확실한 교육관과 존경심을 바탕으로한 선생님의 리더쉽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폭력과 채벌만 있으면 됐습니다.
그 전형의 선생이 하필 6학년 3반 우리반 담임이였습니다.
조그마한 키에 1년 내내 같은 밤색 바지에 흰색 남방 그 조그맣고 왜소한 체격과는 달리 그 선생(김동곤)은 잔인한 이간질과 폭력으로 반을 장악했습니다.
이간질이라는 것은 반장 부반장 줄반장으로 서열을 정하고 떠드는 아이의 이름을 칠판 한쪽에 적는 권한을 줬다는 겁니다.(후에 일제 식민지 때 일본통치자들이 우리 조선인들에게 했던 방법과 같아서 치를 떨었음)
담임은 수업하기전 진실의 여부를 떠나 칠판에 있는 애들을 불러 나오게 해서는 채벌을 했습니다.
“엎드려”
하고는 생탱자나무로 애들 엉덩이를 때립니다.
남자애들이야 맞을 수 있지만 치마를 입은 여자애들은 다를 수있습니다.
그 담임은 다양한 채벌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쉽고 흔한 채벌은 "엎드려“하고 책상을 두손으로 잡으라고 하고는 엉덩이를 때리를 겁니다.
“이 안에 뭐가 들었냐? 똥이 들었어 돌이 들었어?” 라고 물으면서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손바닥을 때리는 것도 대나무 자로 손등을 때리는 것도 책상위에 올라가 무릅을 꿇으라고 하고는 허벅지를 때리는 것도 교단에 무릅꿇고 칠판 분필받이를 두손으로 잡게 하고는 발바닥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꿀밤 멕이는건 정말 이뻐서 하는 행위이고 귀빰을 때리는건 애들이 고막이 터진 학생이 없는게 다행이였습니다.
“맥주 먹고 싶냐?” 하면서 코를 쥐어 비트는 것은 애교입니다.
양손으로 귀를 잡아 올린다든지 “여기를 잡아 올리면 죽은 사람도 일어나게 돼있어” 라고는 머리가 긴 여학생은 주로 귀 옆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올립니다.
여름철이면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비틉니다.
몸을 비튼다든지 인상을쓰면 "아쭈! 이것이 반항허네“ 하면서 더 집요하고 어금니를 물고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집어 깝니다.
그때는 교실바닥이 마루였고 주로 겨울에는 초를 칠해 윤이 반들반들 났습니다.
겨울이면 아이들은 양말을 신고 있었고 그래서 미끄러웠고 선생은 학생의 발목 아래를 걷어 찹니다. 그러면 학생은 보기 좋게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꽈당하고 떨어집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어디 부러지지 않은게 기적입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떠든 아이들 때리고 수업시작하면 숙제 안해온 애들 또 때리고 산수시간이나 국어시간은 뻑하면 쪽지시험을 보고 그리고 틀린 애들은 또 때리고 아침부터 채벌로 시작해 저녁까지 채벌로 끝나는 학교 수업시간이였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보내주지 않고 칠판 가득 산수 문제를 냅니다.
그리고는 다 푼 학생들은 채점을 해서 집에 보내주지만 못 푸는 아이들은 남아서 또 맞아야 합니다.
교탁 밑에 있었던 그 많은 다양한 크기와 굵기의 몽둥이들......
하지만 더 힘들게 했던건 그 곤동선생의 성적인 폭력성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젖꼭지를 엄지손가락으로 찝어 비트는 건 거의 애교수준이였습니다.
하지만 남학생은 성기를 움켜준다는 겁니다.
“다리벌려” 하고는 남학생의 성기 특히 불알 두쪽을 움켜 쥔다는 겁니다.
“말 안들어? 떠들래? 터트려줄까?”“공부 안할래? 두 개씩 뭐하러 달고 댕기냐?”
웃으면서 움켜쥐면 학생은 온몸에 힘이 빠지고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여학생들이 보는데서 움켜쥠을 당하는건 치욕 그 이상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나마 여학생은 젖꼭지를 꼬집고 비트는 거 빼곤 없는게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거의 6학년 내내 앞줄에 앉아 있어 몰랐으니까요
6학년 여학생 중에는 발육 상태가 좋아 가슴이 봉끗 올라오기 시작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공부를 좀 못하고 가정 형편이 안 좋은 그런데 편부나 편모슬하거나 할머니집에서 다니거나 하는 여학생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여학생은 특히나 많이 주로 당하는 편입니다.
주로 엉덩이를 때리는데 어떤때는 풍성한 치마를 입고 오면
“걷어 올려”
하고는 허벅지 위를 때립니다. 종아리는 매 자욱이 보여서 허벅지 위쪽과 엉덩이쪽을 때립니다.
더군다나 그런 여학생은 반에서 제일 뒷자리에 앉히고 정규수업시간이 끝나고 문제푸는 자율학습시간이면 그 여학생 옆에 앉는다는게 문젭니다
개인수업 한다구요?
제일 뒷자리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곤동선생을 힐끗힐끗 보지만 자세히는 볼수 없습니다.
“앞만 보고 문제 풀어라 한문제 틀리면 한 대씩이다”
하고는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뭐라고 합니다. 아마 그 여학생은 죽을 맛일 겁니다.
그후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2학년 겨울 방학때 그 여자아이가 사는 동네로 놀러갔는데 그 여학생에게 들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야 그새끼(곤동선생) 어땠는지 아냐? 그냥 가슴만 만질줄 아냐? 밑에다 손가락 넣고 지 츄리닝 바지 속에 손 넣어 지꺼 만지라 했어”
나는 앞자리에 앉아서 그 때를 몰랐습니다.
“그건 사람도 아녔어 니는 공부 잘했잖아 그래서 그 자식한테 이쁨 받았잖아!”
내가 이쁨 받았다고? 나는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뭐라 할말이 없었습니다.
반장은 고사하고 줄반장 한번 한 적이 없고 간신히 재수가 좋아 맞는 날보다 맞지 않는 날이 많았다는 것 이외엔 변명이랄 변명거리도 없었습니다.
“공부 잘하는게 뭔디? 다 서울대가고 다 의사하고 다 판.검사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사람도 아녀? 공부만 잘하면 돼? 지는(곤동선생) 왜 서울대 안가고 시골에서 선생질헌댜?”
그 여자아이는 올겨울 설 지나면 서울에 간다 했습니다. 공장에 다녀 돈을 많이 벌거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그후로 50년이 훨씬 지나서까지도 소식을 모릅니다 정말 서울가서 돈을 많이 벌었는지.........?
그 메주 뜨는 냄새가 나는 쇠죽 끓이는 골방에서 다른 아이들은 시끄럽기만 한 기타를 튕기며 소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여자애랑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처음으로 내것을 그 여자애 그곳에 넣었습니다. 미끄러지듯 쑥 들어가서 깜짝 놀랬던 기억입니다. 처음으로 여자의 그곳에 사정을 하고는 긴가민가 당황했는데 그 여자애는 내것을 손에 쥐고는 위 아래로 조물딱거리더니 “누워봐 내가 다시 세워 줄팅게” 하면서 위로 올라가더군요.
다른 애들은 지들끼리 힐끗힐끗보고 키득거리고 웃었지만 나랑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노래만 부르더군요 나는 3번이나 사정을 하고서야 그 여자애는 다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니는 공부 잘혀도 티를 안내서 3번이나 대준 거셔”
가랑이를 벌리고 털이 무성한 그곳을 수건으로 열심히 닦던 그 여자애 사실은 2살이나 나보다 위고 그 방에 있던 동네 녀석들도 다 누나라고 부르던......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드라 정임이였는데 성이 뭐였드라? 기억이..............잘 잘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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