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소나타 3~4
wuj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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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18:04
현식이 이혼하고 여기 원룸 아파트로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매일 매일 사는 게 그렇게 홀가분하고 편할 수가 없다. 가끔 혼자라는 사실에 문득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 외로움마저도 즐기고 싶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혜진이가 들린다.
혼자 사는 아빠가 안되어 보이는지, 예전에 집에서 함께 살 때는 별로 그러지 않더니 현식이 아파트에 들리면 애교를 많이 부리고, 스킨쉽도 많아진다.
한번씩 현식이 뒤에서 껴안거나 하면 등에 와 닿는 혜진이 가슴의 감촉 때문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아빠를 즐겁게 해주려는 혜진이의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오늘도 현식이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전축에서 흘러 나오는 옛날 팝송을 듣고 있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난다.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술을 즐기는 편이고,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현식이지만, 그 동안 이혼하느라.. 아파트로 이사 오느라.. 술 마실 겨를이 없었다.
외투를 걸치고 아파트 밖으로 나선다. 택시를 타고 전에 살던 집 부근으로 간다. 이혼하기 전에 퇴근하면서 한번씩 들리던 카페가 있었는데, 주인 마담이 현식이 보다 두 살
많은 마흔 아홉이었고, 분위기가 이런 술집하고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그런 여자다.
젊었을 때 한 미모했을 것 같은 계란형의 전형적인 동양미인이라고 할까?
술집을 시작한 지 채 육개월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손님을 대하는 것이 옆에서 보기에도 서투르고 아직은 숙맥 같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만, 자신이 그런 일에 맞추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 까지 했다.
전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혼자 그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곤 했는데, 서로 안면을 익히고 친숙하게 지내게 되다 보니, 한번씩 내 좌석으로 와서 서로의 신상 이야기를 주고 받고 했는데, 남편의 나이가 마담보다 일곱 살 많은 오십 여섯으로 사업을 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남편은 나이도 들고 해서 하는 일 없이 그냥 집에서 소일을 하다 보니, 생활은 해야 되고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돈을 끌어 모아 술집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어느 듯 택시가 그 술집 앞에 도착하고, 현식이가 택시에서 내려 이층에 있는 카페로 올라간다.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마담이 반색을 한다.
“아이고, 김 사장님!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지요?”
“저야 뭐.. 맨날 이렇게 지내죠.”
창가에 있는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는다.
전에 여기 오면 항상 이 자리에 앉았다.
마담이 우스개 소리로 이 자리에 내 명찰을 붙여 놓는다고 했었다.
마담이 맥주 세 병과 마른 안주를 쟁반에 담아서 가지고 온다. 여기 오면 항상 그렇게 마시니까 마담이 알아서 가지고 오는 것이다.
홀 안을 둘러보니, 손님이 한 팀만 있고, 그 자리에는 나이가 서른 중반쯤 되는 여기 여 종업원이 앉아서 술 시중을 하고 있다.
마담이 내 앞 자리에 앉아 맥주를 따고 유리잔에 맥주를 따라서 나에게 준다. 이번엔 내가 맥주를 한잔 따라서 마담에게 준다. 마담은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내가 오면 두세 잔은 받아 마신다.
내가 맥주 한잔을 들이키고, 마담도 맥주를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 놓고 다시 나의 잔에 맥주를 따라 준다.
“아니.. 김 사장님! 한참 동안 오시지 않아서 어디로 이사간 줄 알았어요. 어찌 된 일이에요?”
“약 한달 동안 나에게 여러가지 일이 많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독립했어요!”
“독립을 하다니요? 아… 결국 그렇게 되신 거예요?”
전에 내가 한번 여기에 왔을 때, 술이 좀 된 상태에서 대충 마누라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가 잔을 들고 맥주를 한잔 마시고, 마담이 다시 술을 따라준다.
“그럼.. 지금 이 동네에서 안 살아요?”
“내가 몸만 빠져 나왔지요.”
“지금 어디서 사시는 데요?”
“OO동에 원룸 아파트를 얻어서 혼자 살고 있어요.”
“이제 완전히 독신이 된 거네요? 위로를 해야 되나.. 축하를 해야 하나..”
“축하를 해 줘야지요.”
마담이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내가 마담의 잔에 맥주를 따른다.
“저기.. 김 사장님! 전에 발렸던 돈은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천천히 갚으세요.”
두 달 전인가? 그 날도 여기에 혼자 와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담이 나에게 은행에 들어갈 돈 걱정을 하길래 내가 마담에게
“많이 어려우신 모양이죠? 괜찮으면 내가 빌려 드릴까요?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당장 내일 모레까지 백만원이 필요한데,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어요?”
“그럼.. 계좌번호 하나 적어 주세요. 내일까지 입금시켜 드릴께요”
그렇게 해서 돈을 백만원 빌려준 적이 있다.
그 이후에 내가 여기에 올 때마다 내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담이 은근히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마담의 인상이나 성격상으로 볼 때 바로 갚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많이 어려운지 두 달이 되도록 갚지 못하고 있다.
“한꺼번에 갚기 어려우시면 돈이 있을 때 만원이든 십만원이든 그렇게 갚으셔도 돼요.”
마담이 맥주 한잔을 들고 다 마시고 난 뒤 현식이에게 이야기를 한다.
“저기.. 김 사장님!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백만원만 더 빌려 주시면 제가 다음달부터 다달이 이십만원씩 갚아 나가면 안될까요? 그러면, 김 사장님과 제가 더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을 텐데..”
어허! 이 여자가?
아무리 어렵다기로 서니 그런 말을 할 수가…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다니? 그 동안 먹고 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한다고 참 안됐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하기야, 전에 한번씩 여기에 술이 취한 상태로 왔다가 마담에게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그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나?
“아주머니! 제가 아주머니가 탐이 나서 그날 돈을 빌려 드린 게 아닙니다. 아주머니 사정이 딱하고, 또 좋으신 분 같아서 순수한 마음으로 돈을 빌려 드린 겁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마담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들고 현식이를 바라보며 말을 한다.
“죄송해요.. 김 사장님! 제가.. 너무 어렵다 보니 한순간 김 사장님한테 실수를 했나 봅니다.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아무리 힘들게 사시더라도 아무에게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현식이가 맥주잔을 비운다.
마담이 현식이의 잔에 맥주를 따르더니, 비어 있는 자신의 잔을 현식이에게 내밀며 말한다.
“저도 한잔 주세요.”
“지금 세 잔째인데 괜찮겠어요?”
“오늘은 조금 취하고 싶어요.”
현식이가 마담의 잔에 맥주를 따른다.
“아주머니.. 힘 내세요! 살다 보면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은 날도 있고 그러잖아요?”
“글쎄요.. 저도 김 사장님처럼 나가서 혼자 살고 싶어요. 여기서 장사하면 어렵더라도 먹고 살기는 하겠는데.. 아이 때문에..”
마담의 표정이 서글프게 보인다. 오죽하면 다른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오늘은 전보다 조금 많은 술을 마신다.
현식이가 맥주 여섯 병을 마시고 마담이 두 병을 마신다. 현식이 보다 마담이 더 무리를 하는 것 같다. 평소에는 많아야 맥주 세 잔을 마시더니..
어느 듯 시간이 열시가 넘어서고 현식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 이만 가 볼께요. 오늘 아주머니가 좀 무리하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많이 취하네요.. 저도 오늘은 일찍 가게 문을 닫고 들어가야 겠어요.”
“그게 나을 것 같네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온다.
현식이가 돌아가고 난 뒤, 미주는 한동안 카운터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던가?
아무리 내가 어렵기로 서니 그런 말을 다 하다니..
사실은 지금 대학 삼학년인 딸애의 등록금 마감일이 코 앞이다.
남편이 하던 사업 망하고,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돈을 여기 카페 얻고 시설하느라 다 써버리고, 지금 집에 남아 있는 돈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여기서 버는 돈이라 해야 그냥 먹고 살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남편의 용돈을 대다 보면 빠듯하다.
아는 친구나 친척들에게는 그 동안 빌려 쓴 돈도 못 갚고 있는데, 염치가 없어서 더 이상 이야기할 수도 없다.
물론 딸애가 편의점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자기의 용돈에다가 책값정도만 보태지 더 이상의 도움은 못 된다.
사실은 현식이만 빼고는 낮 모르는 사람에게 아직 한번도 돈을 빌려본 적도 없고 그럴 융통성도 없다. 왜 유독 현식이에게만 뻔뻔해질까?
그 동안 현식이가 자신의 가게로 술을 마시러 오고 난 이후로 현식이 만큼 편한 손님이 없었다.
그냥 혼자 와서 맥주 세 병정도 시켜놓고, 조용히 마시고는 가곤 했다.
한번씩 술 마시러 와서 짓궂게 굴고 술값 때문에 애 먹이는 손님들하고는 질적으로 틀렸다. 이런 손님만 있다면 술장사도 할만 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몇 번을 그렇게 와서 술을 마시고 갈 무렵, 아무래도 단골손님이고 하니까 인사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하루는 술 마시러 온 현식이의 앞에 앉아서 인사를 하게 됐다.
“늘 이렇게 혼자서 술을 드세요?”
“아.. 예! 이 부근에 집이 있으니까 퇴근하는 길에 한잔 하기에는 적당한 곳이네요. 조용하고, 음악도 좋고.. 혼자서 생각하면서 마시기에는 좋은 것 같아요. 마담 되시는 모양이죠? 저.. 김 현식이라고 합니다.”
“전.. 강 미주라고 해요. 앞으로 자주 와서 팔아 주세요.”
“그런 말 안 해도 자주 올 겁니다. 너무 자주 온다고 내쫓지나 마세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그 이후부터는 현식이가 술 마시러 오게 되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현식이의 앞에 앉게 됐다.
마음이 편하고, 술 마시러 온 손님이 아니라 꼭 친구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이도 자기 또래 정도로 보였고..
그 날도 가게에 앉아서 내일 모레로 닥친 은행에서 빌린 돈의 이자와 분할 상환해야 하는 돈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현식이가 들렀었다.
그날 따라 괜히 기분도 울적해지고 해서 현식이의 앞에 앉아서 푸념 비슷하게 자신의 신세타령을 했는데, 현식이가 선뜻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돈을 빌렸는데 아직까지 갚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왜 그분에게 또 돈 이야기를 했을까? 그것도 몸까지 주겠다는 암시를 줘가면서.. 나를 얼마나 막돼먹은 여자로 봤을까? 아마.. 전에 한번 현식이가 술이 진탕 되어서 자신의 가게에 들렸을 때, 자기가 마음에 든다면서.. 참 미인이라고 애인 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그걸 믿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자신의 현재 모습이 너무 추한 것 같고 살기가 싫어진다.
이젠 두 번 다시 그 분이 여기에 들리지 않겠지.. 어쨌든 그분에게 빌린 돈을 빨리 갚아야 할 텐데…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린다.
시간이 열 한시 반을 넘어서고 있다. 더 이상 들어오는 손님이 없다.
좀 더 기다리다 보면 한 두 손님정도는 더 올 것이다. 늦게 오는 손님은 거의 다 다른 데서 술이 한잔 되서 오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피곤해진다.
보통 때야 새벽 두시경이 되어서 가게 문을 닫는데, 오늘은 빨리 마치고 들어가야 겠다.
딸아이의 등록금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휴학계라도 내라고 해야 되나.. 오늘은 빨리 들어가서 아무 생각없이 그냥 자야겠다.
일하는 아줌마를 부른다.
“아줌마! 오늘은 일찍 마쳐야 되겠으니 대충 정리하고 가요!”
“그래요? 그렇게 할께요.”
가게 문을 닫고 나와 택시를 잡아탄다. 집에 도착하니 열 두시 정각이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남편이 술 냄새를 풍기며 코를 골고 있다. 아마.. 비슷한 처지의 동네 친구들과 선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했을 것이다.
저 양반도 답답하겠지.. 오십 여섯이면 한창 나이인데, 어디에 일하러 갈 데도 없고, 그렇다고 사업이나 가게를 할만한 여력도 없으니…
요즈음은 밤일도 잘 안 되는지 내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사는 게 피곤하니 그걸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제 여자로써 끝난 것인가?
욕실로 들어가서 대충 씻고 남편의 옆에 눕는다.
다음 날, 현식이는 회사에 출근하여 오후 세시가 되어 회사의 업무가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담배를 한대 피워 문다.
아무래도 어제 그 술집에서 마담의 서글픈 듯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자기 몸까지 줄 생각을 할 정도로 다급했던가?
현식이 자신도 이혼하면서 빈몸으로 집을 나오다시피 해서 별로 가진 돈의 여유가 없지만, 백만원 정도의 여유는 있다.
지난 번 돈을 빌려줄 때 받아 놓았던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지갑에서 꺼내서 전화기를 집어 든다.
자신이 거래중인 은행의 폰 뱅킹 ARS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다. 수화기에서 흘러 나오는 안내에 따라 그녀의 계좌번호로 돈을 송금한다.
크다면 클 수도 있는 돈이지만, 지금 자신보다 그녀에게는 더욱 더 절실한 돈일 게다. 만에 하나 돈을 돌려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할 수 없다. 불우이웃돕기를 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수도 있고…
퇴근시간이 다 되어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다. 지난번 돈을 빌려 주면서 그녀의 명함을 받아놓은 게 있다. 신호가 두어 번 가더니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예! 강 미주입니다.”
“저.. 김 현식입니다.”
“아.. 예! 김 사장님.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어쩐 일이예요?”
“어제 부탁하신 돈.. 송금했습니다.”
“김 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수화기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것 같다.
“너무 급하신 것 같아 돈을 보냈습니다.”
“제가 약속한데로 꼭 갚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전화 끊습니다.”
“예! 잘 계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미주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일찌감치 집에서 나와 가게에 혼자 앉아 온갖 궁리를 다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이런 일이 다 생기다니.. 오늘 중으로 방법이 안 생기면 딸아이에게 휴학이라도 하라고 이야기할 참이었다.
정말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자기에게 실망을 해서, 두 번 다시는 자기를.. 아니, 자신의 가게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신세만 져서 나중에 어떻게 갚아야 하나?
일단 당장에 발등의 불은 껐다.
그날 저녁 장사를 하면서도 어깨가 가볍고 하는 일이 신이 났다. 오늘따라 손님도 평소보다 많이 오는 것 같아 새벽 세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침 열 시쯤 되어서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남편은 밖으로 마실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딸애도 학교에 가서 집에 없다. 술장사를 하고 늦게 들어오다 보면, 피곤한데다 아무래도 술을 몇 잔 마시다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딸애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차려 아버지랑 같이 먹고 학교에 간다.
모래알 같이 느껴지는 밥을 억지로 한술 뜨고 집을 나선다. 은행으로 가서 현식이가 부친 돈을 찾고, 자신이 조금 모아둔 돈을 합해서 딸애의 통장으로 학비를 부친다. 이제 육개월 동안 학비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식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다. 지난번에 받아 놓은 현식이의 명함이 있다. 그 동안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전화를 하는 것이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현식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김 현식입니다.”
“저.. 강 미주예요.”
“아.. 어쩐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고.. 모레가 일요일인데 가게를 하루 쉬려고 해요. 이번에 도와주셔서 고맙기도 하고.. 혹시.. 별일이 없으시면 저녁이라도 한끼 대접할까 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래요? 저야 뭐.. 관계는 없지만, 일부러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그럼.. 그날 저희 가게 앞에서 저녁 다섯시 경에 만나면 어떨까요?”
“비싼 거 사주시면 안 먹고 그냥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저도 비싼 거는 못 사드려요.”
“알았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나갈게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현식이가 처음 전화를 받을 때 휴대폰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 당황했었다. 아직까지 전에 마누라 말고는 한번도 회사 업무 중에 자기한테 전화를 한 여자가 없었는데..
미주가 고맙다고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하니, 사양하기도 그렇고, 일단은 승낙을 했다. 혹시라도 거절을 하면 괜한 자격지심이 생길 수도 있고..
조금 있다가 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아빠야! 나.. 혜진이.”
“응! 그래..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웬일? 딸이 아빠한테 전화하는데..”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오늘 학교에 안 갔어?”
“으응.. 오늘 오전 강의가 없어서.. 지금 학교에 가려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야.”
“그래? 잘 지내고 있지?”
“잘 못 지내고 있어..”
“왜?”
“아빠가 보고 싶어서 그렇지 뭐..”
“인석아! 아빠 본지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지난번 토요일 날 아파트에 다녀 갔으니, 내일이면 일주일이 된다.
“그래.. 오늘 아빠한테 오려고?”
“아니.. 아빠 모레 일요일 날 뭐 할거야?”
“그건 알아서 뭐하게?”
“저녁에 아빠랑 영화 보러 가려고.. 요즘 ‘살인의 추억’ 이라고 상당히 재미있다고 하던데..”
“안돼! 아빠 저녁에 약속 있어.”
“무슨 약속인데?”
“아빠의 프라이버시를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아빠 데이트 하기로 했다.”
“정말이야? 어떤 아줌만데?”
“내가 그걸 너에게 보고해야 돼?”
“당연히 보고해야지! 내가 아빠의 보호잔데..”
“임마.. 내가 네 보호자지.. 네가 어떻게 아빠의 보호자야?”
“여자문제는 내가 아빠의 보호자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전화 끊어! 아빠 보고 싶으면 월요일 날 와!”
“알았어.. 아빠 데이트 잘해!”
혜진이가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생각에 빠진다. 엄마랑 헤어진 지 한달 남짓 되었는데.. 벌써 아빠한테 여자가 생겼나?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진다.
한편으론 아빠한테 서운한 마음도 생긴다.
자기한테는 일언반구의 이야기도 하지 않은데 대한 섭섭함도 있지만, 요즘 혼자 된 아빠에게 잘한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자신이 메꾸어 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게 그것이다.
물론 아빠가 엄마랑 이혼할 때, 진심으로 아빠가 좋은 아줌마를 만나기를 바랐었고, 또,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이런 서운한 마음은 무엇일까?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 그 생각이다.
일단 그 아줌마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야 될 것 같다. 아빠 집에 가보면 그 아줌마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겠지.. 월요일 날 아빠한테 들려야 겠다.
일요일 오전 현식이는 아침식사를 하고, 공중 목욕탕에 갔다가 이발소에도 들린다.
미주씨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괜히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점심때 중국 집에서 간단한 요리를 시켜 먹은 뒤, 전축을 틀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나도 모르게 미주씨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냥 미인이구나 하고 생각했었고, 어려운 형편 때문에 좀 안되었다는 동정심은 있었지만.. 사랑한다는 감정은 없었다.
전에 그 카페에 술 마시러 갔을 때, 미주씨의 이야기가 자기 남편이 사업이 제대로 될 때는 나이 차이 때문에 그런지 자신을 그렇게 애지중지 했었다고 한다.
밖에도 잘 내보내지 않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조금이라도 힘이 드는 일은 아예 하지 못하게 하고, 시장에라도 갈라치면 남편이 직접 차를 운전해서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오고, 시장 바구니도 남편이 들고 다녔다고 한다.
온실 속의 화초같이 살았던 여자가 남편의 사업이 망해서 먹고 살기 위해 직접 험한 세파에 뛰어 들어 돈을 벌려다 보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더군다나 하고 있는 일이 일 중에서도 가장 하류라 할 수 있는 술장사이다 보니 그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직업의 귀천이야 없다고 하지만 어디 세상살이가 그렇던가?
아마.. 그런 부분들 때문에 현식이가 더욱 더 미주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돈을 빌려주면 더욱 친밀하게 지낼 수도 있다는 말이 자신이 그런 생활 속에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흘러 나왔을 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딸애인 혜진이도 요즘 따라 부쩍 아빠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전에는 그렇지 않더니 더욱 정겹게 구는 것 같고… 물론 혼자 된 아빠가 안되어 보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 애한테 빨리 남자친구라도 하나 생겨야 할 텐데..
친척들을 포함해서 집안에 남자 형제들만 있다 보니, 혜진이는 태어날 때부터 주위의 축복 속에 태어난 귀한 딸이었다.
더군다나, 현식이가 막내이다 보니 어릴 적 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여자의 잔정을 못 느끼고 자랐기에 더욱 더 혜진이는 현식이에게 귀한 딸이었다.
인물도 아버지인 현식이를 빼다 박았고..
혜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매일 현식이가 안고 다니다 보니, 흔히 하는 말로 땅바닥을 밟지 않고 자란 아이다.
결혼 후, 마누라와의 사이가 벌어지고, 집안의 분위기가 안 좋아도 혜진이한테 만큼은 영향을 안 끼치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이제 그 아이가 다 자라서 올해 스물이니 성인이 되었다.
옛날 같았으면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될 나이이다. 현식이 눈에도 이젠 혜진이가 어엿한 숙녀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식이가 안고 다니던 귀여운 꼬마가 아니라.. 요즈음 자신의 아파트에 놀러 와서 자주 장난을 치고 껴안고, 스킨쉽을 하다 보니 한번씩 현식이 몸에 와 닿는 혜진의 성숙한 몸매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야릇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예전에 혜진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하루는 마누라가 혜진이 한테 초경이 왔다고 말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얘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는 대견한 마음과 이젠 혜진이 하고도 거리가 생기겠구나 하는 마음에 좀 섭섭하기도 했다.
그 이후, 혜진이의 가슴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한번쯤은 그런 혜진이의 가슴을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의 앞에서 옷을 갈아 입던 아이가 다른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볼 때, 이젠 품에서 떠난 자식이구나 하는 마음에 섭섭하기도 했다.
그 이후 , 혜진이는 아빠의 품에 잘 안기지 않고, 아빠보다는 엄마한테 자신의 일을 의논하게 되고, 얼마 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지냈었다.
그런 애가 현식이 이혼하고 난 후로는 갑자기 가까워 진 것이다. 현식이와 혜진이와의 거리가 초등학교 육학년 시절에서 몇 년을 건너뛰어 지금 다시 가까워진 것이다. 마누라와의 이혼이 그 계기가 되어서..
앞으로 혜진이한테 남자친구가 생기게 되면 자신이 직접 챙겨주고 싶다.
남자친구가 혜진이한테 잘해줄 아이인지 아닌지.. 괜찮은 애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고, 괜찮은 남자애라면 적극적으로 둘 사이를 도와주고 싶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시계가 오후 네 시가 다 되어간다.
다섯시에 미주씨를 만날 약속을 했으니 슬슬 준비해서 나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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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A
빡빡이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