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와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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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장 비서였고 나는 기획팀에 있었다.
같은 회사에 다닌 지는 몇 년 됐지만 처음에는 서로 이름을 부를 일도 없었다. 그녀는 사장실이 있는 칠 층에서 근무했고 나는 한 층 아래에 있었다. 한 층 차이였지만 업무가 겹치지 않을 때는 같은 건물에 있는 사람도 오래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직원들처럼 그녀를 비서님이라고 불렀다.
그녀에게 남편과 딸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연말 행사에서 직원들의 가족사진이 화면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딸 사이에 서 있었다. 남편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딸은 웃을 때 눈이 그녀를 닮았다.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해 내가 사장 보고자료를 맡으면서 그녀를 자주 만나게 됐다.
사장 보고는 예정된 시간에 시작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후 두 시에 오라고 해서 올라가면 앞 회의가 조금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 두 시 반이 되면 정말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회사에서 ‘조금’이라는 말은 시간과 별로 관계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더 묻지 않게 만드는 말이었다.
나는 사장실 앞의 갈색 소파에 앉아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읽을 내용이 남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미 확인한 숫자를 계산기로 다시 눌러보고, 표의 선을 맞추고, 외운 문장을 처음 보는 것처럼 넘겼다.
그녀가 커피를 가져왔다.
“안 주셔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이미 탔어요.”
그녀는 종이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설탕은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 보고 때도 그랬고 그다음에도 그랬다.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설탕이 든 커피를 늘 남겼다고 했다.
별일은 아니었다.
비서는 원래 그런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사장이 어떤 차를 마시는지, 누구의 전화를 바로 연결해야 하는지, 어떤 손님을 회의실 안쪽에 앉혀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나는 그녀가 기억해야 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좋았다.
보고가 끝나고 나오면 그녀는 결과를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요?”
“다시 하랍니다.”
“전부요?”
“전체적인 방향만요.”
그녀가 웃었다.
“그게 전부 아닌가요?”
그녀는 사장의 말을 잘 번역했다.
조금 더 고민해보자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나쁘지 않다는 말은 좋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다음에 다시 보자는 말은 적어도 오늘은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사장이 한 말을 문서로 바꾸었고, 그녀는 사장이 하지 않은 말까지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그 일이 조금 우습다는 데서 친해졌다.
처음에는 사장 이야기만 했다. 그러다 회사 이야기로 넘어갔고, 어느 순간 퇴근한 뒤에도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오늘도 수정하세요?
네. 전체적인 방향을 찾는 중입니다.
찾으면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혼자 웃는 날이 생겼다.
직장에서는 그 정도의 일로도 하루가 달라졌다. 아침에 누가 먼저 인사했는지, 회의에서 내 말을 누가 다시 받아줬는지, 퇴근 직전에 받은 짧은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같은 일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어느 날 밤 사장실 층에 올라갔을 때 사장실 불은 꺼져 있었고 비서실만 켜져 있었다.
그녀는 혼자 다음 날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안 가세요?”
“가려고요.”
가방도 챙기지 않은 사람이 말했다.
책상 한쪽에는 뜯지 않은 샌드위치가 있었다.
“저녁은요?”
“먹었어요.”
내가 샌드위치를 보자 그녀가 웃었다.
“먹으려고 샀으면 먹은 거나 비슷하죠.”
“그럼 퇴근하려고 생각했으니까 퇴근한 거네요.”
그날 우리는 탕비실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다. 복도의 센서등은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 꺼졌다. 불이 꺼질 때마다 그녀가 팔을 한 번 흔들었다.
“여기는 가만히 있으면 사람 없는 줄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회사에서는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았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여겼고, 일을 거절하지 않으면 그 일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해서 맡은 일은 어느 순간부터 원래 그 사람의 일이 됐다.
그녀는 비서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왜 계속해요?”
내가 물었다.
“잘하니까요.”
“힘들다면서요.”
“힘든 거랑 잘하는 건 다르잖아요.”
그 말은 내가 내 일을 설명할 때 쓰는 말과도 비슷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기 전에, 서로가 왜 아직 회사에 있는지를 알았다.
그 뒤로 야근을 하면 비서실 불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불이 켜져 있으면 괜히 올라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장 일정을 다시 물었고, 보낸 자료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녀도 내가 별다른 용건 없이 온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오늘은 보고 없는데요?”
“다른 것 좀 확인하려고요.”
“뭘요?”
그럴 때면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책상 서랍에서 초콜릿이나 과자를 꺼내주었다. 사장에게 들어온 선물 중 남은 것이라고 했다.
나도 커피를 살 때 그녀의 것을 하나 더 샀다.
우리는 남은 것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준비한 선물에는 이유가 필요했지만, 남은 초콜릿과 커피 한 잔에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둘이 처음 점심을 먹은 것도 우연이었다.
원래 네 명이 먹기로 했는데 두 사람이 갑자기 빠졌다. 나는 다음에 먹자고 했고 그녀는 그냥 둘이 먹자고 했다.
“둘이 먹으면 좀 그렇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뭐가 그런데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으로 갔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사장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점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회사 근처에서 먹었다. 나중에는 각자 차를 타고 조금 먼 곳으로 갔다. 한 사람이 먼저 식당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뒤늦게 들어간 적도 있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퇴근 후에도 만났다.
처음에는 저녁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녀는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곧장 주차장으로 가지 않았다.
근처를 걷거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가 문을 닫으면 차 안에서 이야기를 더 했다. 집에 가야 한다는 말은 한 저녁에도 여러 번 나왔지만, 실제로 집에 가는 일은 늘 마지막에 한 번뿐이었다.
주말에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딸을 학원에 데려다준 날이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두 시간이 남는다고 했다.
우리는 학원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시간을 자주 확인했고 나는 그때마다 이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말하지 않았다.
헤어진 뒤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다음에는 시간 안 보는 날 만나고 싶어요.
그 뒤로는 우연이 아니라 약속을 정해 만났다.
그녀는 친구를 만난다고 했고, 나는 주말에 회사 일이 있다고 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서점에 가거나 강변을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외곽까지 운전한 날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서로의 직책만 알았지만, 회사 밖에서는 다른 것을 알게 됐다.
그녀가 음식을 조금씩 남긴다는 것, 운전할 때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는 것, 결혼 전에는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녔다는 것.
“지금도 혼자 가면 되잖아요.”
내가 말했다.
“이제는 혼자 가면 왜 혼자 가는지 설명해야 해요.”
그녀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어른이 된 뒤에는 혼자 하는 일에도 이유가 필요했다.
사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늘수록 회사에서는 더 조심했다.
둘만 있을 때는 이름을 부르다가도 회사에 들어오면 다시 비서님이라고 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했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서로의 말을 일부러 받지 않았다.
회사 밖에서 가까워질수록 회사 안에서는 더 먼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 거리가 둘 사이에만 보이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전화도 차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전화가 오면 그녀는 바로 받았다.
“응, 이제 가.”
“회사 근처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실제로 회사 근처에 있었다. 누구와 있는지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는 전화가 와도 바로 받지 않았다.
화면을 잠깐 바라보다가 뒤집어놓았다.
나는 그 변화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달라지는 데에는 큰 사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화를 한 번 늦게 받고, 귀가 시간을 조금 미루고, 하지 않던 거짓말을 한 번 하는 식으로 달라졌다.
나는 그 변화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좋아했다.
당시에는 그것을 내가 중요해진 증거라고 생각했다.
회식이 있던 날 그녀는 늦게 왔다.
빈자리가 여러 개 있었지만 내 옆에는 앉지 않았다. 맞은편 끝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평소보다 많이 웃었고 나를 거의 보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왔다.
왜 화났어요?
나는 답하지 않았다.
조금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
내 옆에 앉고 싶었어요?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웃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은 모르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식이 끝난 뒤 그녀는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화면에는 취소된 호출이 보였다.
나는 못 본 척했다.
“맥주 한 잔만 더 할래요?”
그녀가 물었다.
우리는 근처 맥주집에 갔다.
그녀는 한동안 잔만 만지다가 말했다.
“나를 왜 그렇게 신경 써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밥을 먹었는지 묻고, 아프면 약을 사오고, 답장이 늦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 뭐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뭐였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또 나한테 미루네.”
가게를 나온 뒤 우리는 길가에 오래 서 있었다.
택시가 여러 대 지나갔다. 그녀는 손을 들지 않았다.
처음 입을 맞춘 순간보다 그전에 서 있던 시간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둘 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면서, 마지막까지 모르는 사람처럼 서 있던 시간.
그날 이후의 일은 빨랐다.
한 번 선을 넘으면 다음 선은 전보다 가까워 보였다.
처음에는 키스한 일을 두고 밤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방을 빌렸다.
처음 함께 밤을 보낸 날 그녀는 몇 번이나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가라고 했다.
그녀는 현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진짜 보내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붙잡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딸에게 친구 집에서 잤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나는 옆에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정확히 매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매일처럼 느껴졌다. 만나지 않는 날에도 계속 연락했고, 퇴근 뒤 잠깐이라도 볼 수 있으면 만났다.
처음에는 오래 이야기했다.
회사 이야기, 결혼 이야기, 어릴 때 살던 집,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말했다.
나중에는 대화가 줄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묻게 되면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서로에게 가까이 갔다. 해결할 수 없는 이야기를 잠시 미루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주 그만하자고 했다.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남편과 평소처럼 밥을 먹는 일이 괴롭고, 딸의 얼굴을 보면 미안하며, 회사에서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는 화를 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겠다고 해?”
붙잡으면 왜 붙잡느냐고 했고, 놓으면 왜 쉽게 놓느냐고 했다.
그만하자는 이야기를 한 다음 날이면 그녀가 먼저 연락했다.
어디예요?
오늘 잠깐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만나서 힘들어졌고, 힘들어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나를 만나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이해했다.
남편이나 딸에게서 전화가 와도 관계는 계속됐다.
처음에는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받았다.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른 뒤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갔다.
“응, 엄마 회사야.”
“조금 늦을 것 같아.”
“아빠랑 먼저 먹고 있어.”
어느 날 딸은 학교 준비물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서랍 몇 번째 칸에 있는지 차분히 설명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울었다.
“나 진짜 이상한 엄마지?”
나는 아니라고 했다.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관계가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면서도, 그녀가 완전히 괜찮아져 나를 찾지 않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관계가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무모해졌다.
차 안이나 사람이 드문 외곽에서 만나기도 했다. 위험한 장소에서는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다. 누가 오는지,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만 생각하면 됐다.
그녀가 사장의 출장 일정을 알려주는 문장에도 다른 뜻이 생겼다.
오후에 자리 비어요.
남들이 보면 업무정보였다.
우리에게는 아니었다.
사람이 없는 복도나 비어 있는 공간에서 잠깐 만나고, 발소리가 들리면 떨어졌다.
자리로 돌아오면 그녀는 다시 사장 비서가 됐고 나는 기획팀 직원이 됐다.
“자료 전달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말했다.
“네.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지도 알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는 달라졌다.
처음에는 남는 시간을 서로에게 주었다. 나중에는 누가 더 많은 시간을 내는지를 따졌다. 약속이 취소되면 화를 냈고 답장이 늦으면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잃을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나는 그래서 나를 더 쉽게 버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말을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했다.
그녀가 가족과 여행을 가면 연락을 기다렸다. 남편과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을 들으면 잘됐다고 하면서 불안해했다.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웃으면서도 서운했다.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지만, 나 없이 행복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남편의 전화를 늦게 받고, 집에 들어갈 시간을 미루고, 나를 만나기 위해 이유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많이 잃을수록 내가 많이 얻은 것처럼 느꼈다.
그녀는 나와 있을 때 사장 비서도,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나는 그 모습만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참고 일하던 사람도 그녀였고, 딸의 준비물을 챙기던 사람도 그녀였으며, 남편과 한 집에서 살아가던 사람도 그녀였다.
나와 있을 때의 모습만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 편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여러 번 끝내기로 했다.
어느 날은 회사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제 정말 안 된다고 했다.
이번에는 나도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 회사 일은 회사 일로만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업무 메신저가 왔다.
사장님께서 오후 세 시에 보고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나는 답했다.
확인했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저녁이 되어도 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시동을 걸고도 한동안 출발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였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전화했어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그냥 오늘 하루가 안 끝나.”
우리는 그날도 만났다.
그 뒤로도 몇 번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관계는 이미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길어졌고, 다정한 말보다 확인하는 질문이 많아졌다.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처음에는 안 이랬잖아.”
나는 처음이 어땠는지 생각했다.
사장실 앞 소파에서 커피를 마셨고, 야근하다 탕비실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센서등이 꺼지면 그녀가 팔을 흔들었다.
그때 우리는 지금보다 서로를 잘 몰랐지만, 지금보다 편했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달라질까?”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커피를 받지 않았어야 했는지, 둘이 점심을 먹지 않았어야 했는지, 회식이 끝난 뒤 택시를 잡아줬어야 했는지.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다.
작은 일들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어느 날 사장이 외부 일정에서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왔어요.
나는 모니터에 열어둔 보고서를 다시 띄웠다. 그녀는 사장실 문을 열고 사장을 맞았다.
잠시 뒤 사장이 나를 불렀다.
보고자료의 두 번째 장을 고치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고를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다른 직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도 그대로 지나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그녀에게 업무 메신저가 왔다.
다음 주 보고 일정 확인 부탁드립니다.
나는 답했다.
화요일 오후 가능합니다.
그 뒤에는 아무 말도 붙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칠 층의 불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비서실이 있는 방향을 보지 않았다.
그녀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고,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며칠 뒤 조직개편 공지가 났다.
사장 비서 교체와 몇 개 부서의 인사이동이 포함돼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공지를 두 번 읽었다.
왜 두 번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오후 사장 보고가 잡혔다.
칠 층에 올라가자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책상 위에는 일정표와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사장실 문은 닫혀 있었고, 갈색 소파는 비어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자료를 펼쳤다.
잠시 뒤 센서등이 꺼졌다.
복도가 어두워졌다.
나는 팔을 들었다가 내렸다.
불은 곧 저절로 다시 켜졌다.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화면에는 그녀의 이름이 떠 있었다.
메시지는 짧았다.
오늘도 늦어요?
나는 문장을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사장실 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 회의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보고서의 두 번째 장을 펼쳤다. 고쳐야 할 부분은 이미 고쳐져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나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가 모두 지웠다.
그때 사장실 문이 열렸다.
그녀가 안에서 나왔다.
우리는 잠깐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봤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고, 누구의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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