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대기
조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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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전
나는 지금,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내 삶은 지옥이었다.
아버지는 12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의 교육열은 거의 신(神)에 가까웠다. 우리 집은 3남 3녀, 여섯 형제 중 내가 다섯째였다. 지금은 큰형님과 큰누나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큰형이 돌아가신 충격으로 아버지는 치매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어머니는 몸이 더욱 쇠약해지셨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우리 학교 전교생은 약 500명 정도였다. 나는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1학년 때 이미 신발 사이즈가 245mm였다. 덩치가 워낙 커서 아이들은 나를 보면 주눅이 들었다.
1학년 중간고사에서 나는 7과목 모두 100점, 전 과목 만점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나를 천재, 수재라고 불렀고, 부모님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때부터 나의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원주에서도 꽤 잘 사는 집이라 방이 다섯 개나 되었다. 부모님 방, 큰형 방, 작은형 방, 큰누나 방, 그리고 나와 작은누나가 함께 쓰는 방. 나는 국민학교 4~5학년 때까지 작은누나와 한 방을 썼다.
작은누나는 정말 예뻤다. 나와 열 살 넘게 차이가 났지만, 남동생을 무척 예뻐했다. 밤마다 나를 꼭 끌어안고 재워주었고, 가슴을 만지게 해주기도 했다. 강원대학교에 다니던 누나는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속옷을 갈아입었다. 나를 아직 어린애로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누나가 잠든 사이에 나는 실수로 누나의 보지를 스쳤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추가 없었다. 무서웠다.
다음 날 친구 정훈이에게 물었다. “우리 작은누나 고추가 없어.” 정훈이는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 그럼 오줌은 어떻게 싸?” 며칠 후 정훈이가 말했다. “우리 엄마도 고추 없어.”
그제야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1~2학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작은누나의 그곳을 자주 만졌다. 누나가 잠에서 깨어나면 꼬집히고 꿀밤을 맞았다. 누나는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00야… 누나 거기 만지면 아파. 그냥 젖이나 만져. 여덟 살 때 집에서 키우던 똥개가 물어서… 없어졌어. 알았지?”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어느 날은 빨간약을 발라주겠다고 해서 누나의 보지에 약을 바르려 했다. 누나는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가 씻었고, 나는 울면서 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날 밤, 나는 열나게 맞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이상한 과외 선생을 데려왔다. 처음엔 키 작고 땅딸막한 50대 아저씨였는데, 한 달 만에 바뀌었다. 이번엔 정말 예쁜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때부터 내 학습 태도는 극적으로 좋아졌다.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어느 토요일, 선생님이 짙은 빨간 치마와 하얀 셔츠를 입고 왔다. 나는 책상으로 쓰는 밥상 밑에 누워 있었다. 선생님의 치마 속이 훤히 보였다.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들켰다. 다음 주부터 과외는 끝났다.
중학교 때는 거의 만점을 받으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체육대회에서는 축구와 씨름 대표로 나갔고, 이어달리기에서는 1등으로 달리다 3학년 선배가 앞지르자 포기하고 천천히 걸었다. 그 일로 선배들에게 맞았고, 동네에서 제일 기분 나쁘게 욕하고 다니던 선배와 무덤가에서 일대일로 싸워 이겼다.
3학년 때는 학교 회장과 급장을 겸임했다. 조회 시간마다 운동장 중앙 선반대 위에 올라가 지휘를 했다. 나는 음악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박00 선생님. 가슴이 정말 컸다. 어느 날 음악실에서 혼자 음악제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욕정이 솟아 자위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지퍼를 올리다 자지가 끼었다. 선생님은 얼굴을 붉히며 “빼줄게” 하시고 내 자지를 만지며 지퍼를 조심스럽게 올려주셨다. 그날 이후 한동안 선생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부드럽게 웃으셨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합고사를 치러 원주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여전히 잘했고, 장학퀴즈에서는 4등 안에 들었다. 내 꿈은 국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기술을 배워라”며 공과대학 지원을 강요하셨다. 1992년 학력고사에서 나는 340점 만점에 327점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합격했다. 온 동네에 플래카드가 붙었다.
“원주 우산동 김00, 정00의 삼남 김00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입학”
한 달 동안 동네는 축제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소망을 이뤘다”며 잔치를 벌이셨다. 큰형에 이어 나까지 서울대에 갔으니, 그 자부심은 대단했다.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키 183cm, 몸무게 79kg. 흰 페인트가 묻은 찢어진 청바지에 폴라티 차림으로 다녔다. 수업보다 동아리 방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다. 동아리 선배 중에는 나중에 유명가수가 된 신00도 있었다.
첫 공연이 끝난 뒤부터, 나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시작되었다. 내가 손만 내밀면 여자들이 옷을 벗었다. 서울대뿐 아니라 중앙대, 단국대, 인하대, 숙명여대, 이화여대까지… 서울의 대학 캠퍼스 곳곳에 나의 ‘먹이감’들이 넘쳐났다.
그러던 어느 날, 원주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결핵에 걸리셨다는 소식이었다. 치악산 중턱에서 “나는 자연인이다” 하시며 3년째 산생활을 하고 계셨다. 가끔 찾아가면 산삼, 도라지, 더덕, 버섯 등을 주셨다. 그걸 먹은 탓인지, 나는 지금도 버섯을 보면 참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어릴 적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 공부 안 하냐? 일어나라.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냐?”였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1995년 1월,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병대에 지원해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선발되어 남한산성에서 EBS 교육을 받고, 제주방어사령부로 배치되었다. 2년 반 만에 제대하고 복학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반겨주셨다.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놀았다. 그때 김현식의 매니저를 했던 정희남 씨를 알게 되어,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반인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일들을 겪었다. 재벌집 사모님, 연예인, 정치인 사모님들과의 성적 친분, 그리고 그들의 자녀 과외 선생 역할까지.
1년쯤 그렇게 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복학해 공부에 매달렸다. 졸업과 동시에 자격증을 땄다. 때는 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이후, 건축법이 엄청나게 강화된 시기였다.
큰형이 전무이사로 있던 한국000000000에 들어갔다.
일을 하면서 건축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이어 건축구조기술사도 1년 만에 따냈다. 목표를 세우고 이루면, 다음 목표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어느날 큰 형이 그만두자 나는 재건축 판정위원회로 자리를 옮겼다. 재건축 판정은 주민들의 주머니를 부풀리는 막강한 권력이었다. ‘염창동00아파트 재건축 판정단’ 단장으로 나갔을 때, 내 사인이 들어간 후 내 차는 아반테에서 BMW로 바뀌었고, 통장에는 현금이 넘쳐났다. 그 무렵이 IMF 시기였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앞에는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동창회나 학교 행사 때마다 나를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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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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