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6
정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과 나이, 그리고 선명한 기억의 파편들은 은하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우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눈앞의 사내는 20년 전 자신이 온 몸을 바쳐 사랑했던 그 소년, 정우가 확실했다.
그 옛날, 덜컥 들어선 뱃속의 아이를 알아차렸을 때 은하는 겁이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철없는 소희를 핑계로 정우에게 매달려 그의 창창한 장래를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중학생의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기에, 은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자존심을 지킨 채 홀로 전학을 택했다.
평생을 외기러기처럼 살면서, 살다가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고 매일 밤 눈물로 기도했던 정우였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딸을 임신시킨 사위가 되겠다고 눈앞에 앉아 있었다.
조물주의 잔인하고 가혹한 운명 앞에 은하는 한동안 넋이 나간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내 딸 소희가…… 당신 핏줄이야.'
그 잔인한 진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은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 가혹한 천륜의 비밀을 밝히는 순간, 평생을 죄책감과 경악 속에서 무너져 내릴 정우가 받을 상처가 먼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나도 정우는 여전히 은하에게 가슴 시린 첫사랑이었기에, 그녀는 비극을 혼자 안고 가기로 결심했다.
"안 되네. 이 결혼…… 난 절대 허락 못 해요."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눈동자에 스치던 정우를 향한 묘한 호감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서슬 퍼런 거절만이 남았다.
당황한 정우가 찻잔을 내려놓고 은하를 향해 간절하게 손을 뻗으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제가 비록 소희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부족한 사람인 거 잘 압니다.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왔습니다.
하지만 저, 소희를 정말 목숨보다 사랑하고 평생 아껴줄 자신 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마음을 열고 믿어주십시오."
정우가 절박하게 매달렸지만, 단호하게 굳어진 은하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평생을 오직 딸 소희 하나만을 바라보고, 소희의 행복만을 경전처럼 여기며 살아온 어머니였기에 이 지옥 같은 파멸의 길로 딸을 걸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 거실에서 눈치를 보던 소희가 방 안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하고 문을 열고 들어와 은하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엄마, 대체 왜 그래? 아저씨가 나이 많아서 그래? 내가 아저씨 좋아한다잖아! 엄마는 늘 나한테 져줬으면서, 이번 한 번만 내 뜻대로 해주면 안 돼?
내가 행복해지는 게 그렇게도 싫어?"
소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은하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내가 행복해지는 게 싫냐는 딸의 절규는 은하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과 같았다.
네가 사랑하고 밤새도록 육체를 탐닉한 그 남자가,
네 배 속에 아이를 만든 그 남자가 바로 네 친아버지라는 추악한 진실을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당장 이 사람 내보내!"
은하는 터져 나오려는 피눈물을 삼키며 소희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떨리는 손으로 정우를 가리키는 은하의 눈빛에는, 깊은 절망과 함께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거부의 벽이 단단하게 세워져 있었다.
지옥의 가장자리에서,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잔인한 운명의 톱니바퀴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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