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사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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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전
=== 1502호의 밤은 길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의 한 신축 오피스텔 15층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 딱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대학 입학 후 학업과 성실한 일상밖에 모르던 내게, 서울에서의 홀로서기는 설렘 가득한 시작이었다. 그날도 과제를 마치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막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깨고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아, 읏... 잠깐만요, 하아..."
벽이 얇은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늦은 시간인 데다 소리 자체가 워낙 노골적이고 컸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규칙적인 마찰음,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적나라한 파찰음, 그리고 숨이 넘어갈 듯한 여자의 가파른 신음소리. 평생 야한 동영상 한번 제대로 찾아본 적 없이 건전하게 살아온 내게 그 소리는 가히 문화충격에 가까웠다
'첫날이랑 둘째 날은 조용하더니... 옆집에 새로 이사를 왔나?'
귀가 화끈거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소리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문제는 그날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옆집의 소음은 거의 매일 밤마다 반복되었다. 어떤 날은 이른 저녁부터, 어떤 날은 동이 터 오는 새벽까지.
가끔은 남자들의 웅성거리는 굵은 목소리나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듯한 쿵쾅거리는 소리까지 섞여 들려왔다. 매일 밤 강제로 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공유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나는 낮 동안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기묘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3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15층 엘리베이터의 기적
어느 주말 오후, 전공 서적을 가방에 넣고 강의실로 향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나는 무심코 안으로 발을 디디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흰 티셔츠, 그리고 편안한 청바지 차림. 하지만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온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첫사랑, 한채아였다.
졸업과 동시에 가문 사정이나 개인적인 이유로 갑자기 연락이 끊겨 매일 밤 그리워했던 그녀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채아야...?"
내 목소리에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커졌다.
"어? 지훈이? 너 지훈이 맞지?!"
채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1년 만에 마주한 그녀는 고등학교 때의 수수하고 청초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까지, 우리는 서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연신 감탄사만 내뱉었다.
"너도 여기 살아? 몇 호야?"
"나 1501호. 너는?"
"말도 안 돼... 나 바로 옆집, 1502호야!"
채아가 들고 있던 가방을 고쳐 메며 내 옆집 문을 가리켰다. 순간 머릿속이 번개라도 맞은 듯 멍해졌다.
지난 3달 동안 매일 밤 내 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그 적나라한 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내가 그토록 아끼고 신성시했던 첫사랑 채아의 방이었다니.
하지만 눈앞의 채아는 너무나 맑고 수수해 보였기에,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라도 하나 보지', 혹은 '방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나 보지' 하며 억지로 불길한 상상을 지워냈다.
"우리 번호부터 교환하자. 조만간 제대로 얘기해."
우리는 반갑게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 문밖의 남자들, 깨어진 환상
그날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낮에 채아를 만나고 온 터라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있었는데, 밤 11시가 넘어가자 어김없이 벽 너머로 그 익숙한 신음소리가 시작되었다.
"아! 흣... 대선배님, 잠시만요... 아앙!"
채아의 얼굴이 떠오르자 도저히 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설마 채아가 저 소리의 주인공일 리 없다는 부정과,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격정적인 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이내 잦아들고, 사방이 고요해진 지 몇 분쯤 지났을까.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 겸 자취방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15층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그때, 옆집인 1502호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문틈으로 걸어 나온 이들은 뜻밖에도 험상궂게 생기거나 커다란 백팩을 멘 거구의 남자들이었다.
한 명은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었고, 다른 이들의 손에는 조명 장비와 반사판, 그리고 음향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얼핏 봐도 5~6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촬영 크루였다.
"오늘 유아 씨 감정 연기 좋았어. 확실히 신인 중에 몸매나 대사 치는 게 제일 깔끔해."
"그러게요. 감독님, 철수하고 새벽에 편집 바로 넘길까요?"
그들은 담배를 피우러 가는지 웅성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유아', '감독', '촬영 장비', 그리고 방금 전까지 들렸던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신음소리.
AV 비디오를 전혀 모르는 건전한 대학생인 나였지만, 그 단어들과 상황이 조합되자 결론은 단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채아는 성인 비디오, 즉 AV를 촬영하는 배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오피스텔 방을 스튜디오 삼아서.
내 순결했던 첫사랑의 환상이 처참하게 조각나 바닥으로 뒹구는 순간이었다.
4장. 오후의 산책, 그리고 맞잡은 손
다음 날 오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충격 때문에 넋이 나간 채로 집을 나서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채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어제처럼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청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제 밤새 남자들 틈에서 카메라를 보며 신음을 내지르던 그 '유아'라는 배우와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어? 지훈아! 어디 가?"
채아가 먼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그냥, 바람 좀 쐬려고. 너는?"
"나도 마침 시간 비어서 잠깐 나가려던 참인데. 잘됐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자, 채아가 내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주변 공원이라도 좀 걸을까? 날씨 되게 좋다."
그녀의 맑은 미소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오피스텔 근처의 한적한 공원으로 향했다. 푸르스름한 가로수 길을 걸으며,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의 소소한 추억들을 꺼내놓았다.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일,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교문 뒤에서 몰래 나눴던 영양가 없는 대화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채아의 눈빛은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반짝였다. 어젯밤의 잔인한 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한참을 걷던 채아가 발걸음을 조금 늦추더니,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지훈아. 너... 지금 여자친구 있어?"
"아니, 없어."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벌써 1년 넘게 지났는데, 재수하고 대학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거든. 사실... 나 아직 연애다운 연애도 못 해봤고, 여자랑 그런 거... 해본 적도 없어. 아직 첫 경험도 없는걸."
바보 같을 정도로 솔직한 내 고백에 채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슬픔, 미안함, 그리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애틋함. 매일 밤 카메라 앞에서 수많은 남녀의 행위를 비즈니스로 마주하는 그녀에게, 여전히 1년 전 그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채아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떨리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살폿이 맞잡았다.
1년 전 고등학교 시절, 미처 다 하지 못하고 멈춰버렸던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 너머로 오피스텔 1502호의 얇은 벽, 그리고 어젯밤 복도를 가득 채웠던 장비 소리가 환청처럼 겹쳐오며, 나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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