넣어 키운 걸그룹 12
멍멍이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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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23:04
23. 연습생 이소란(1)-이상한 소문
란이의 제명은 다른 연습생들에게 보여주기식도 있었지만 내 진심 어린 바람이기도 했다.
진짜 손절하고 싶다.
그동안은 우쭈쭈 달래면서 끌고 왔는데 이번만큼은 내가 매달리거나 설득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망란이 새끼가 제 발로 먼저 찾아와 열심히 한다고 싹싹 빌 때까지 존버 탈 생각이다.
물론 이게 잘못된 선택이거나 란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상태창의 경고 메시지가 뜨겠지. 그 전까지는 내가 생각한 대로 밀어붙여도 될 것 같다.
“12월 월말 평가는 공연장 빌려서 한다는 얘기 들었지?”
란이의 결석으로 흥분된 감정을 차분하게 식힌 뒤 연습생들에게 공지했다.
아이들은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소리 높여 대답했다.
“예!”
“평가를 떠나서 너희들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가족이랑 친구들한테 보여주는 자리니까 준비 열심히 해. 그리고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니까 지치지 말고. 알았지?”
“혹시 데뷔조 만들어요?”
연습생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우라를 가진 서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데뷔조라는 말이 나오자 다른 아이들의 표정도 설렘과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암튼 열심히들 해.”
“데뷔조 맞죠?”
“몰라.”
“앜, 대표님 표정 보니까 맞는 거 같다!”
“꺄아악! 데뷔조 뽑는다!”
귀여운 놈들.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뛴다.
훈련소 퇴소하면 군 생활 끝인 줄 아는 훈련병들 같다.
“그럼 데뷔조는 내년에 데뷔하는 거예요?”
“팀 이름은 뭐예요?”
“몇 인조예요?”
“미오, 넌 잠깐 나랑 내려가자.”
“예.”
나는 질문을 퍼붓는 연습생들을 뒤로 하고 미오와 함께 사무실로 내려왔다.
미오와는 미리 만나서 얘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녀석이 며칠 동안 어머니 병간호를 해야 한다고 해서 오늘에서야 만난 것이다.
“뭐 마실 거 줄까?”
“예, 아이스 아메리카노···.”
“응, 얼음 없어. 얘기 끝나고 밑에 커피숍 가서 먹어.”
“크힛, 예.”
참나.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가리면서 코웃음 치는 모습이 천상 여자다.
“너 너무 메소드 연기 아니냐? 웃는 것도 완전 여자처럼 웃는데?”
“아, 제가 그랬어요? 버릇돼서 그런가 봐요.”
“앉자.”
“예.”
소파에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 안부부터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편찮으셔서 입원하신 거야?”
“유방암이에요.”
“어이고···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아뇨.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 잘 끝났고요, 이번에 방사선 치료 받으셨어요.”
“잘 된 거지?”
“예.”
“다행이다. 많이 놀랐겠다.”
“초기라서 별로 걱정은 안 했어요. 엄마도 아무렇지 않던데요.”
“내색을 안 하셔서 그렇지 속으로는 많이 놀라셨을 거야.”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가슴 만져줄 사람이 없어서 걸린 거라면서 남자 친구 만들 거래요.”
“아아···.”
“그래서 제가 등산 동호회 같은데 알아보라고 했어요. 산에서 좋은 공기 마시면서 운동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좋잖아요.”
이거 뭔가 혼란한데. 나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미오는 분명 남자이고 아들인데, 얘기를 듣다보니 이상하게 쿨한 모녀 사이가 상상되는 것이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나는 녀석의 반짝이는 빨간 입술을 보며 물었다.
“너 가족들 만날 때도 화장하고 가는 건 아니지?”
옷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오버사이즈 스트릿 패션으로 유니섹스하게 입었지만 반 묶음 꽁지머리와 연분홍 톤의 색조 화장 때문에 영락없는 여자로 보였다.
아니, 솔직히 화장을 안 해도 이목구비와 얼굴의 전체적인 선 자체가 여자 같긴 하지만.
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출근할 때 아니면 화장은 안 해요. 오늘은 여기 오느라 한 거고요.”
“머리는 진짜 니 머리야?”
“예.”
“일은 완전 그만 둔 거지?”
“대표님 만난 날 사장님이 알아서 나오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성귀남 사장님?”
“예.”
“그럼 너 생계는 어떡하냐. 돈 벌려고 그 일 했던 거라면서.”
“그건 지선경 사장님이 월급으로 대체해 주신다고 했어요.”
“무슨 월급?”
“대표님 경호원 겸 비서요.”
“경호는 무슨···. 내가 널 경호해야 할 판인데.”
미오의 체격은 키 167cm에 몸무게는 고작 50kg이다.
여자라고 생각해도 키만 클 뿐이지 여리여리한 몸매인데, 남자가 이 피지컬이면 그냥 키 작은 멸치에 불과했다.
아무리 격투기를 배웠고 아마추어 대회에서 입상도 했다고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체격조건만으로는 내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못미덥게 쳐다보자 포인트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제가 오늘은 너무 편하게 입고 왔는데요, 내일부터는 진짜 비서처럼 오피스룩으로 제대로 입고 올 게요.”
“아니, 사양할게.”
“스타킹은 무슨 색깔 좋아하세요? 저희 클럽에 오시는 회원님들은 보통 검스 좋아하시던데. 혹시 풋잡 받아보셨어요?”
“주먹으로 쳐버리는 수가 있다. 경호나 비서 같은 얘기 신경 쓰지 말고 넌 이제부터 연습만 하면 되는 거야.”
“근데 저 진짜 이쪽으로는 아무 것도 몰라요.”
“기초부터 배워야지 뭐. 그때도 말했지만 나도 조금 당황스러워. 업키걸 애들은 그래도 재능이 있고 기본적으로 연예계에 관심이 있던 애들이었거든.”
“언제까지 데뷔해야 돼요?”
“그건 아직 몰라. 이번에도 5인조를 만들라고 하는데 지금 너를 포함해서 총 세 명만 나왔어. 방금 위에서 인사했던 라희랑 다른 한 명은 아이컨택 란이. 란이 누군지 알지?”
“마약했던 아이돌 아니에요?”
“어, 맞아.”
“근데 그거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집행유예 2년 2개월.”
“집행유예가 뭐예요?”
집행유예의 뜻을 설명해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근데 아무리 모르고 했다고 해도 이미지가 벌써 나빠졌잖아요. 사람들은 그 분 생각하면 마약부터 떠올릴 걸요. 저도 그랬고요.”
“그렇지.”
“그런데도 다시 아이돌로 복귀가 돼요?”
“뭐 복귀야 되겠지. 욕을 엄청 먹어서 문제지만. 청소년한테 악영향 끼친다고 반대 서명운동 같은 것도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럼 어떡해요?”
“나도 걱정이다. 차라리 걔 혼자 솔로로 하라면 모를까, 팀으로 데뷔하면 다른 멤버들한테도 피해가 가는 건데···.”
“그러니까요. 대표님이 고민 많으시겠네요.”
“그래도 정보창이 불가능한 미션을 주지는 않았겠지.”
“저는 그 정보창 능력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보통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힘내세요. 제가 옆에서 항상 응원해드릴게요.”
가만 듣고 있자니 이 새끼가 유체이탈 화법을 쓰고 있네?
란이도 란이지만 니 새끼도 만만치 않잖아.
“야, 뭘 응원을 해, 걔보다 니가 더 큰일인데.”
“저요?”
“그래도 마약한 아이돌은 전에도 있었지만 여장 남자 걸그룹은 니가 처음이잖아. 만약 니가 어찌저찌 걸그룹으로 데뷔를 했는데 남자라는 게 터지면 어떻게 될 거 같냐?”
“CD 좋아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은데···.”
“CD가 뭔데?”
“크로스 드레서요. 여장이나 남장을 즐기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러요.”
“트렌스젠더?”
“아뇨, 그 중에 트젠도 있기는 한데 그냥 이성의 옷을 입는 걸 즐기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CD라고 해요. 저도 뭐 즐기는 건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CD라고 볼 수 있고요.”
또 주제에서 벗어났다.
“···아니, 성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니 팬들은 당연히 니가 여자라는 전제하에 좋아하는 건데 갑자기 남자라고 하면 뭔 생각이 들겠냐고.”
“타고난 성별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위에 있는 연습생들 중에서도 저보다 예쁜 분들은 별로 없는 거 같던데요.”
그건 인정.
아직 업키걸 외에는 증명된 게 없는 중소회사이고, 차기 그룹에 대한 플랜도 이제 겨우 잡힌 상태이기 때문에 비주얼이 좋은 연습생은 두 명 정도밖에 없다.
누가 봐도 예쁜 애들은 애초에 대형기획사 오디션부터 시작하지.
여자보다 예쁜 고추가 자랑스럽게 말을 잇는다.
“그리고 저 핸드잡이랑 풋잡 같은 유사성행위도 여자들보다 더 잘할 자신 있어요. 남자 몸은 남자가 잘 아는 거니까요.”
역시는 역시구나.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보라색이라고 할 수 있지.
단순히 여장만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또라이였던 것이다.
녀석은 대표실 내부를 슥 둘러보면서 덧붙였다.
“비서 컨셉으로 한 번 빼드릴까요? 대표님이 원하시면 펠라까지는 해드릴 수 있어요.”
씨발.
이 개새끼의 어느 부분을 발로 차야 잘 찼다고 소문이 날까,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펠라’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녀석의 반짝이는 입술을 주시한 나를 증오한다.
순간적으로 설렜음을 회개하는 바이다.
하여튼 개새끼가 쓸데없이 고퀄이고 지랄이야.
“너 나한테 한 번만 더 그런 말 했다가는 진짜 때린다. 진심이야.”
“죄송합니다. 근데 지선경 사장님이 그런 것도 제 업무에 포함된다고 했거든요. 대표님이 너무 바쁘셔서 여자 만날 시간이 없을 때는 저보고 풀어달라고···.”
지선경 그 여자야 원래 미쳤고.
“아니야. 안 해도 돼. 너 이제 그냥 연습생이라고.”
“예.”
“근데 너 군대는 어떻게 됐냐.”
“학교 때문에 자동으로 연기 됐어요.”
알고 보니 인서울의 나름 이름 있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님께서 종합격투기 도장을 대신 운영하셨는데 잘 될 리가 없었다. 1년 정도 하시다가 결국 부관장에게 권리금을 받고 넘기셨고, 그 돈으로 치킨집을 차렸다가 그것도 얼마 안 가 건강악화와 적자만 떠안고 그만 두셨다고 한다.
“집에서 돈을 벌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원래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제 생활비 밖에 안 되더라고요.”
함께 알바를 하던 여자애들이 녀석의 여성스러운 외모를 보고 화장을 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하고보니 너무 예뻐서 여자 옷까지 입혀주었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 한 아이의 SNS에 올렸는데 그 애의 남사친들이 소개를 시켜달라며 난리가 난 것이다.
실물로 봐도 여자 같은데 사진으로는 말할 것도 없었겠지.
“알바 사이트 같은데 찾아보니까 여자들은 예쁘기만 하면 돈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터치가 전혀 없는 토킹 바 같은 곳을 알아보려고 했었는데 결국 ‘월 천만 원 이상’이라는 문구에 끌려 면접을 본 곳이 성귀남이 운영하는 페티쉬 클럽이었다.
“너 진짜 성 정체성에 문제 있는 거 아니지? 만약 거짓말 한 거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 진짜 게이나 트렌스젠더 아니야?”
“남자로 태어나서 남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여장하면서 성적인 쾌감을 느끼지도 않아요. 그냥 인형탈 알바나 연극 분장 같은 걸로 생각하고 하는 거예요.”
“머리 아프다, 머리 아파···.”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어깨 뭉쳐서 그럴 수도 있어요. 저 안마 잘해요.”
“응. 내 몸에 손대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아무리 외모가 여자라고 해도, 내 몸에 녀석의 손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닭살이 확 돋았다.
그런 거부 반응이 몹시도 반갑게 느껴진다.
다행히 나락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증거 아닌가.
방금 전 녀석의 입술을 보며 펠라치오를 떠올릴 때만 해도 내가 썩을 대로 썩은 건가 싶었는데 다행이다.
미오와는 1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다른 퍽커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완전히 개방됐다는 것 외에는 그냥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또라이였다.
경호원이나 비서로 활용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녀석에게만큼은 내 능력이나 거기에 따르는 고충 따위를 편히 말할 수가 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연습은 내일부터 하자. 오늘은 올라가서 애들 연습하는 거 보고 어떤 분위기인지 한번 느껴봐. 그리고 이번 주까지 가요 발라드 한 곡 외우고. 노래는 못 해도 상관없는데 가사는 외워야 돼.”
“예.”
얘기를 마치고 올려보내려는데 누군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접니다.”
염 대표였다.
연습생 관리와 신인개발 파트는 전적으로 내가 맡고 있어서 일개 연습생 소개는 굳이 안 해도 되지만, 미오는 라희와 함께 데뷔조에 들어갈 아이이기 때문에 인사를 시켰다.
미오가 인사를 마치고 나가자 염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은데요? 어디서 데려오셨어요?”
“지선경 대표가 소개해줬어. 느낌 있지?”
“예. 노래랑 춤이야 가르치면 되는 거고 일단 얼굴이 예쁘니까 된 거죠 뭐. 키도 크고 괜찮네요.”
“이뻐?”
“예. 남자들이 좋아할 얼굴인데요?”
“쟤가 사귀자고하면 사귈 거야?”
“흐흐흐, 제가 언제 학생들 건드리는 거 보셨습니까.”
“만약 연습생이 아니라 그냥 밖에서 만난 애면? 클럽에서 만났는데 오늘부터 1일 하자면서 모텔 가쟤.”
“저야 땡큐죠. 형은 안 하실 거예요?”
“응. 안 해.”
“쯧쯧. 내일모레면 한 살 더 드시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셨네요. 그럼 뭐 고독사 하셔야죠.”
보추미오와는 별개로, 내가 평소에 여자를 워낙 안 만나는데다가 여자를 고르는 기준까지 까다롭다 보니 회사 내에서의 이미지가 거의 고자에 가깝다.
그런 내가 육욕에 눈이 멀어 딸처럼 업어 키운 업키걸 아이들과 물고 빨았다고 하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그런 걸 생각하면 금욕주의로 사는 게 편한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린 건지 모르겠다.
“근데 우리 염, 무슨 일로 왔음?”
“아, 업키걸 애들 연말시상식 스케줄 때문에요. 케이온 차트에서 대상 하나 줄 것 같은데 홍백가합전이랑 날짜가 겹쳐요.”
“31일이야?”
“예. 시간도 거의 겹치고요.”
“출연 안 하면 대상 안 주겠지?”
“그럴 확률이 높죠. 본상이나 하나 주겠죠.”
“그럼 받지 말자. 홍백가합전을 버릴 순 없잖아.”
“그렇죠.”
“뭐야, 답정너네?”
염은 인정한다는 듯 큰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몇 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느낌상 이번 얘기가 내 사무실을 찾아온 진짜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 란이 말인데요··· 걔 요즘 이상한 소문 돌던데 혹시 들으셨어요?”
연습생 이소란(2)-성욕하고 연관이 있을까요?
염 대표를 포함한 회사 직원과 트레이너들은 내 캐스팅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생전 연예계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업키걸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걔네들이 어디 보통 놈들이었던가. 팀 이름을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문제가 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당시 후보들이 워낙 쟁쟁해서 수상은 못 했지만― 데뷔 2년 차에 대상 후보로 거론됐고 3년 차인 올해에는 유력한 수상 후보 중 한 팀으로 손꼽히며 외국인 멤버 하나 없이 아시아 전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음악 부문만이 아니다. 나와 함께 출연한 ‘그림자의 빛’으로 MBC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 신인상 및 최고 케미상 후보에 올라있다.
내가 녀석들의 잠재력을 알아본 건 100% 아우라와 정보창 덕분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회사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를 미다스의 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란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걸그룹으로의 생명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여기던 고도비만 홍이조차 결국 데뷔를 시켜서 힙합여신, 업키걸 끝판왕 소리를 듣게 만든 나의 안목과 컨트롤 능력을 믿고 연습생으로 받아준 것이다.
물론 내가 믿고 있는 건 당연히 아우라와 정보창이다.
정보창이 란이를 찍었으니 데뷔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진행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정보창은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될 만한 팁을 줄 것이고 위기가 생긴다면 경고도 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는데, 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느긋함에 경종을 울렸다.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던 이름이 나왔다.
“걔 요즘 김석원 만난다는 소문 있던데요?”
“김석원?”
“예.”
란이와 요나가 멤버로 있던 아이컨택 소속사의 대표다.
로드매니저로 시작해 아이돌 명가 KU엔터테인먼트의 본부장 자리까지 오른 뒤, 독립을 해서 자기 회사를 세우고 제작한 첫 번째 그룹이 아이컨택이었다.
경력만 놓고 보면 수완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민낯은 이 바닥에서 흔한 인맥 팔이꾼에 불과했다.
KU에서 해고된 이유가 스폰서 브로커를 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고, 회사에서 나올 때는 재능 있는 연습생 몇 명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그 중 한 명이 요나였다.
그의 약속대로 데뷔는 빠르게 이뤄졌다. 중소 회사의 신인이 들어가기 힘든 굵직한 방송도 잡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대가는 다름 아닌 멤버들의 스폰서 계약을 빌미로 한 더러운 로비였다.
물론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기꾼답게 강압적으로 강요는 하지 않았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빠지게끔 유도한 뒤 자연스럽게 그런 자리를 만들었다.
탑 급과 A급의 차이는 힘 있고 돈 많은 스폰서의 유무라면서, 탑 연예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스폰이 불가피하다면서, 지금 그 자리에 올라있는 이들 역시 스폰의 힘이 컸다면서 스폰을 포장하고 정당화시킨 것이다.
사실 상당 부분 맞는 말이긴 하다.
내가 2년 넘게 연예계에 종사해본 결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것처럼 좋은 후원과 나쁜 후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그래서 스폰과 관련된 사건이 터질 경우 법적으로도 증명하기가 힘들다. 힘들 수밖에 없다.
혐의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대가성’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스폰의 시작은 당연히 팬심이고 호감이다.
예뻐서, 멋있어서, 유명해서, 자보고 싶어서, 뭐가 됐든. 상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접근을 하는 것이다.
벤처기업 대표 A와 연예인 B가 있다고 치자.
A대표가 B의 팬이라면서 식사 자리에 초대한 뒤 함께 밥을 먹는다. 그리고 A대표가 광고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B를 자사 광고 모델로 추천한다.
B는 감사의 의미로 이번에는 자기가 밥을 사겠다면서 또 한 번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게 스폰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A는 물질을, B는 자신의 시간을 교환한 것뿐이다.
여기서 A의 물질이란 건 광고, PPL 협찬, 투자금, 제작비, 품위유지비 등 다양한 형태로 지급되며, B의 ‘시간’ 역시 일상적인 데이트에서부터 으슬으슬한 성관계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적용이 된다.
그저 여기에 전문적인 브로커의 개입과 구체적인 계약서의 존재, 강요나 강압의 유무, 사적인 호감이 있었느냐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였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리고 보통 스폰서 쪽이 남자라는 인식이 강한데 사실 스폰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남자 연예인들도 높으신 사모님 또는 영애들의 사랑에 힘입어 광고를 찍고 협찬을 받으며 제작비를 투자 받는다.
업키걸이 우승을 한 걸그룹 배틀 ‘리플레이걸’의 심사위원이자 업키걸 일본 진출의 교두보가 돼준 태진의 스폰서가 에이스항공의 차녀 현수민 전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전해지고 있다.
미모의 중년 여배우이자 영화배급사 ‘큰손’의 공동대표 성주민은 호스트바 파트너였던 김주호를 A급 배우로 키워줬고, 그 김주호는 자신이 다니던 업소의 호스티스였던 강경미를 걸그룹 ‘로맨티아’의 멤버로 데뷔시키며 실로 아름다운 낙수효과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같은 연예인끼리 스폰서가 되기도 하고,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은 라이벌과의 경쟁에서 앞서고자 스스로 스폰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강압적인 스폰 강요에 의해 목숨을 끊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연예인들도 있는 반면, 그것을 기회와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는 이들도 많다는 게 연예계 스폰이 가진 양면성이다.
김석원은 그 중에서 스폰의 순기능과 장점, 필수 불가결만을 예로 들어서 아이들을 현혹했다.
물질의 단 맛에 빠진 아이들은 정식 정산이 이뤄지기도 전에 용돈과 명품 선물을 받으니 좋았고, 김석원은 아이들의 젊고 탱탱한 몸을 이용해 로비와 비즈니스를 했으니 어찌 보면 윈윈이었던 셈이다.
다만 김 대표가 악질이었던 점은 사리분별이 취약한 미성년자 연습생에게까지 사탕발린 제안을 했다는 것이고, 요나처럼 거부를 하는 애들에게는 회사의 경제적 어려움과 멤버로서의 책임감, 미성년 멤버들을 들먹이면서 경우의 수와 선택권을 지워버린 것이다.
김석원은 아이들을 기만하고 선동하고 이간질 했으며 가장 큰 피해자는 요나였다.
요나는 미성년자 멤버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희생을 했지만, 알고 보니 그 멤버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나서서 스폰 자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 미성년 멤버 중 하나가 바로 란이었다.
여기서 아이러니하면서도 고소한 점은 김석원 역시 란이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요나 탈퇴 후, 아이컨택은 그동안 원기옥처럼 모았던 스폰 인맥이 터지면서 섹시 그룹으로의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드디어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노를 젓기만 하면 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바로 그 중요한 시기에 우리 망란이와 리더 수미가 남자아이돌과 환각파티를 벌이며 노를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배까지 엎어 버린 것이다.
사건이 터진 이후 아이컨택과 김석원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며 자취를 감췄다.
란이에게는 아이컨택에 투자된 돈을 위약금으로 뱉어내라는 메시지가 가끔 왔었는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고 했다.
아이컨택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땡긴 계약금과 투자금이 위약금으로 터질 기미가 보이자 해외로 빤스런 한 것 같다는 말이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런데 란이가 김석원과 만난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이다.
란이도 김석원을 경멸한다. 스폰은 자신이 원해서 한 게 맞지만, 자신이 요나를 싫어하게 된 이유가 모두 김석원의 거짓말과 이간질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사를 그렇게 돌았음에도 정산이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위약금으로 1억 원이 넘는 돈을 요구했다는 것도 정이 떨어지게 된 원인 중 하나였고.
나는 염에게 물었다.
“에이, 설마. 란이랑 김석원 만나는 거 본 사람 있대?”
“어제 강남구청 화로구이 집 갔는데 거기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염의 단골집이다.
연예인이나 관계자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한데, 프라이빗 룸이 있기는 해도 워낙 많은 얘기가 오가다보니 어쩔 수 없이 소문이 새기도 한다.
“거기에 란이랑 김석원이 왔었대?”
“아뇨, 사장님이 직접 본 건 아니고 방송 쪽 관계자들이 김석원 얘기하는 걸 들었데요.”
소문은 이러했다.
김석원이 새로 회사를 차려서 신인 걸그룹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기 자본금이 필요한데, 아이컨택이 아직 계약이 남았으니 중국이랑 일본 쪽으로 돌려서 뽕을 뽑겠다는 것이다.
클럽이나 호텔 등에서 ‘케이팝 걸그룹’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하는 선정적인 공연 같은 거겠지.
대놓고 돈 많은 양반들 잠자리 파트너로 돌릴 수도 있다. 그게 김석원의 주특기니까.
“아무리 그래도 란이가 다시 김석원이랑 일을 하지는 않을 텐데. 어차피 계약은 법적으로 파기 할 수 있잖아. 우 변호사님이 도와준다고도 했고.”
“뭐 때문에 만난 건지는 모르는데 김석원을 만난 건 확실한 거 같아요.”
“안 그래도 오늘 안 나와서 자르려고 했었는데···.”
염이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가능하시겠어요?”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예, 못할 거 같은데요.”
“아냐아냐. 이번에는 진짜 마음 독하게 먹었어. 다른 애들 생각해서라도 그냥 두면 안 되겠더라고.”
“형 업키걸 애들 때부터 마음은 항상 단단히 먹었잖아요.”
“에이, 업키걸 애들이랑은 비교하면 안 되지. 걔네는 재능이 있었잖아.”
“예? 그럼 란이는 왜 데리고 있던 거예요?”
그러게. 그렇게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네.
“뭐··· 지가 열심히 한다고 매달렸잖아. 요나도 부탁했고···.”
염은 특유의 저음으로 흐흐 하고 웃은 뒤 씁쓸하게 혀를 찼다.
“어휴, 어쩐지 요 며칠 맘 잡고 열심히 한다고 했다.”
“누가 열심히 해? 란이?”
“예. 현동이 형 작업하고 있는데 며칠 동안 계속 찾아와서 발성이랑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형한테 또 한 소리 들었나 했죠.”
“저번에 연습 빠졌을 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한 소리 하긴 했지. 근데 그 마지막 기회를 날렸네.”
“그래도 생각보다는 오래 붙어있었는데요. 스폰맛 본 애가 연습생부터 시작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죠. 지금도 스폰 해준다는 사람 많은 것 같던데 그냥 그렇게 살다가 취집이나 가라고 그래요. 그리고 아이돌로 끝난 거지 연기 쪽으로는 할 수 있잖아요.”
“그치··· 감독이나 배급사 쪽에 쌰바쌰바하면 조연으로는 꽂아주겠지.”
망란이에게 전화가 온 건 거의 포기상태로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너 그만 두려고 작정한 거지?”
나는 통화버튼을 터치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바로 쏴 붙였다.
그러자 란이도 수긍하며 대답했다.
―예. 저 그만 둘게요.
“아니야. 너는 그만 둘 자격도 없어. 짤리는 거야.”
―예······.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으니까 나한텐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근데 요나한테는 미안해해라. 자기 뒤통수 친 애 레슨비까지 대주면서 믿어줬는데 이게 뭐냐.”
자기도 면목이 없는지 대꾸가 없다.
몇 초가 지나도 말이 없기에 혹시 통화가 끊어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여보세요?”
―예.
“할 말 다 한 거면 끊는다? 숙소는 너 편할 때 빼.”
―예······.
끝까지 미안하단 말을 안 하지.
차라리 잘 됐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까.
―저···.
란이가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과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맞물렸다.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하겠지 싶어서 내가 먼저 하지는 않았다.
염이 묻는다.
“뭐래요?”
“그만 둔대.”
“김석원이랑 다시 하려나보네요.”
“에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나봐.”
“큭큭큭.”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에 왜 그렇게 맥아리가 없었을까.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한데, 몇 분이 지나도 란이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정보창도 별 다른 알림이 없다.
그래, 보창이도 손절한 거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미오도 좀 떨궈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최소한 추천 분야를 보이그룹으로 바꿔주던가···.
란이에게는 저녁이 될 때까지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깔끔하고 완벽하게 녀석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어딜 가든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축복까지 빌어주었다.
하아···.
왼쪽 구레나룻 부분에서 지름 2cm의 원형 탈모를 발견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데칼코마니처럼 오른쪽에 또 하나 생기고 나서야 식겁해서 피부과를 찾았다.
“음······ 원형 탈모 맞고요, 신경성이나 면역력이 떨어져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커요. 혹시 요즘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나요?”
“아뇨··· 딱히···.”
“일단 주사 놔드리고 바르는 약 처방해 드릴 게요. 술 담배 당연히 안 되고요, 식사도 거르지 말고 영양소 골고루 섭취해주세요.”
“혹시 성욕하고도 연관이 있을까요···? 제가 요즘에 성욕이 확 늘었거든요.”
“음··· 호르몬 변화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그건 큰 병원 가셔서 제대로 검사를 받아보셔야 알 수 있죠.”
3일 뒤.
쿠폰 도장을 찍듯 매일 하나씩 늘어난 원형 탈모가 5개가 되었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평소 하루에 두 끼 먹던 밥도 세 끼씩 꼬박꼬박 챙겨먹었는데 말이다.
일주일 뒤에 업키걸 아이들과 방송 연예대상에 참석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원형 탈모 전문 대학병원에 가기 위한 절차를 알아보던 중 란이에게 연락이 왔다.
망란이 [저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 있는데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되세요?]
나 [지금 해]
망란이 [만나서요..]
바빠 죽겠는데 짜증나게 하네.
나 [그럼 말 하지 마. 내가 너 만날 시간이 어디 있냐]
나 [숙소 짐 언제 뺄 거야?]
망란이 [다음 주까지 뺄 게요..]
나 [ㅇㅇ]
대학병원 피부과에 예약을 마쳤다.
다음 날 아침 확인을 해보니 이번에는 정수리 쪽에 원형 탈모 2개가 늘어나 있었다. 그것도 이전보다 커진 50원짜리 만한 크기로···.
“씨발씨발 개씨발. 좆같은 씨발 새끼들아···.”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는 욕을 하면서 베개에 떨어진 수백 가닥 머리카락의 사진을 찍은 뒤 새벽에 온 카톡을 확인했다.
망란이 [저 내일 낮 2시쯤에 숙소 짐 뺄 건데요, 회사 들러서 대표님 보고 가도 돼요? 낮에 회사에 계세요?]
잠깐.
란이의 톡을 확인하는데 병신 같은 직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첫 번째 원형 탈모가 생긴 시기가 딱 란이를 내치던 그날인데 이거 설마······.
나 [그럼 내일 1시까지 회사로 와. 밥이나 먹자]
망란이 [예, 감사합니다!]
다음날 아침,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원형 탈모 개수부터 확인했다.
내 예감이 맞았다.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1개가 줄어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욕을 할 대상이 정해졌다.
“정보창 너 이 씹새끼야··· 아오······.”
연습생 이소란(3)-넣어서 키우라니···.
죽인다.
정보창이 사람이었으면 강하게 목 졸라서 죽였을 것이다.
비겁한 새끼.
아무리 그래도 머리카락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평소에 탈모에 얼마나 민감하냐면, 친구들이나 내 나이 또래 남자들의 휑해지는 머리를 보면서, 나는 탈모가 아니더라도 마흔이 되면 프로페시아를 영양제처럼 먹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다.
정보창 이 개씹새끼는 그런 내 약점을 간파해서 탈모 작전을 쓴 게 분명했다.
업키걸 때는 은빛이의 죽음으로 충격요법을 주더니 이제는 하다하다 탈모 빔이라니···.
―똑똑
“예.”
“대표님, 저 란이요···.”
“어, 들어와.”
―철컥
“안녕하세요···.”
란이는 죄 많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녀석을 기다리는 동안 할 말을 미리 정리해 놓은 나는 가타부타 하지 않고 본론부터 얘기했다.
“너 김석원 만났다면서. 진짜야?”
“예?”하고 당황하던 녀석은 이내 “예···.”하고 순순히 실토했다.
“일단 앉아.”
“예···.”
진짜 면목이 없는 건지 아니면 찔리는 게 있는 건지. 기도 한풀 꺾였고 옷도 얌전하게 입고 왔다.
겨울에도 곧 죽어도 짧은 치마와 숏팬츠만 입고 연습 때 역시 짧은 트레이닝팬츠나 몸매가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는 녀석인데 웬일로 일자 핏 진에 단정한 코트 차림이다.
그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픽 새어나갔다.
자기는 섹스 매니아라면서, 내가 자기를 따 먹지 않은 걸 후회할 거라고 당당하게 어필하던 녀석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짬지보지해피섹스 거릴 정도로 거침없던 녀석이.
이렇게나 기가 죽은 모습이 어이도 없고 불쌍하기도 해서 오히려 화가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다.
“너 무슨 기자회견 하러 왔냐? 옷은 왜 그렇게 얌전하게 입고 왔어. 법원 출두할 때도 망사 스타킹 신고 나갔다가 댓글로 융단폭격 당한 애가.”
“대표님한테 마지막 인사드리는 자리니까요. 그동안 저 실드 쳐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래. 나도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하고 싶다는 말이 그거야? 고맙다고?”
“뭐··· 얼굴 보고 인사드리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갑자기 왜 이래. 너 무슨 회귀 같은 거 한 거 아니지?”
“예? 회귀요?”
“농담이고. 그래서 김석원이 뭐래? 아이컨택 다시 하재?”
“예··· 어떻게 아셨어요.”
“얼마나 대놓고 만났으면 강남구청 화로구이집 사장님이 니 소식을 전해주더라.”
“거기 안 갔는데요.”
“그러니까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 거냐고. 방송국에 벌써 소문 쫙 퍼진 것 같던데?”
뭐 김석원이 미리 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지.
란이는 한 템포 호흡을 고른 뒤 김석원을 만났던 얘기를 시작했다.
SNS 쪽지를 통해서 연락이 왔고 1대1로 한 번, 아이컨택 멤버들과 한 번 만났다고 한다.
내용은 염에게 들었던 대로였다.
마약 사건으로 팀 이미지를 손상 시킨 건 없던 일로 해줄 테니 남은 계약 기간 2년은 마저 활동하고 깔끔하게 끝내자고 했단다.
란이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연기를 하듯이 어딘지 어색했다.
“일단 앨범부터 내고 활동은 해외 위주로 할 거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는 너도 알고 있지?”
“네?”
“디지털 싱글 하나 대충 내 놓고 중국이나 일본 가서 뺑뺑이 돌리겠다는 말이잖아.”
“예···.”
“좋네. 공연 끝나면 룸이나 호텔 방 따라가서 술 따르고 용돈도 받고.”
“네······.”
자기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 딱히 부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정확한 속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녀석이 내게 호소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보라색 교감이 발동한 것이다.
‘그런 거 다시 하기 싫어요. 뮤노 대표님이랑 같이 계속 하고 싶어요. 제발 저 좀 잡아 주세요······.’
“그래도 김석원이랑 하고 싶어?”
“뭐··· 다른 선택이 없잖아요.”
“다른 선택이 왜 없어. 여기서 연습하다가 연예계 다시 복귀 하는 게 니 꿈 아니었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테니까 받아달라며. 노래로 보답한다며.”
“그랬죠···.”
“아이컨택 계약은 해지할 수 있다고 했잖아. 우 변호사님이 도와주신다고도 했고.”
나는 란이가 내게 자신의 입으로 직접 도움을 청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자극했다.
“내가 보기엔 너 그냥 편하게 살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래도 꼴에 데뷔했던 몸이라고 연습생 애들이랑 똑같은 취급 받으면서 연습하기에는 자존심 상하고. 그런데 김석원 따라서 해외 나가면 바로 공연도 할 수 있고, 한국 걸그룹이라고 대접도 받고. 그치? 운 좋으면 맘씨 좋고 돈 많은 스폰 하나 물어서 평생 돈 걱정 안 하면서 살 수도 있고.”
어라. 말하고 보니까 나쁘지 않은데?
실제로도 그런 케이스가 있다. 한국에서는 그저 그런 인기를 누리다가 중국으로 진출한 뒤 스폰 하나 잘 물어서 인생 역전한 사람들.
중국 부호 중에 한국 여자 매니아들이 많아서 첩으로만 들어가도 집과 차는 기본이고 헤어질 경우엔 위자료도 두둑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뱃살 축축 늘어진 늙은이뿐만 아니라 젊고 매너 좋은 스폰서도 많고.
란이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똑같은 크기의 고통과 고민이라고 해도, 차디찬 길바닥에서 깡 소주 마시며 한탄하는 것과 호텔에서 와인 마시고 마사지 받으면서 하는 넋두리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처음에는 억지로 한다고 해도 결국 손에 쥐어지는 돈을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탈모 빔만 아니면 서로 웃으면서 작별할 수 있었을 텐데 진짜 머더퍽커다, 머더퍽커.
생각해보니 결국 아쉬운 사람은 나잖아······.
“저 어차피 여기서 2년 안에 복귀 못 하잖아요.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냥 아이컨택 2년 끝내는 게 저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 계약 파기 하려면 법적으로 다시 싸워야 되는데 저 이제 그건 너무 힘들어요···.”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후회···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세상에 후회하면서 사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아직까지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란이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찡― 하고 울렸다.
그동안 드문드문 전해지던 녀석의 진심이 바로 이거였다.
관심과 사랑, 그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이소란이라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가치 증명.
란이가 밤마다 클럽과 술집을 떠도는 이유이기도 했다.
넷 상에서는 세상 둘도 없는 썅년으로 찍혀서 욕을 먹지만, 정작 오프라인에서는 란이를 차지하고 싶어 안달 난 남자들이 줄을 선다.
블루메딕 후기작성시 10,000포인트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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