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미경 시리즈 - 단편
김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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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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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 늦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현관 신발이 한 켤레 없고, 주방도 그대로였다. 미경은 나가 있었다.
이불 속에서 휴대폰을 켜고 소라넷부터 열었다. 아내 게시글. 며칠 전에 올려 둔 사진 아래로 댓글이 더 달려 있었다. 짧은 치마가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간 컷, 스타킹 솔기, 앉아서 찍은 다리. 그 밑으로 글이 줄줄이었다.
이 각선 실화냐. 남편분 복 받으셨네, 아니 복이 아니라 공유하셔야지. 쪽지 드렸습니다, 조건 괜찮으시면 한번.
쪽지함도 열었다. 읽지 않은 게 서넛. 사진 더 달라는 것, 지역 묻는 것, 주말에 시간 되냐는 것. 답은 안 쓰고 스크롤만 내렸다.
다른 사람들이 남긴 초대남 후기 쪽으로 넘어갔다. 모텔 거울, 차 안, 시트에 찍힌 스타킹 발끝. 제목은 다 비슷했다. 아내, 여친,초대
`이번에 한 번은 진짜 불러보고 싶은데. 어떻게 꼬시지.`
휴대폰을 엎어 두고 일어났다. 점심은 혼자 차렸다. 밥 데우고, 남은 반찬 두 가지 꺼내 놓고, 국은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먹으면서도 현관 쪽을 한 번씩 봤다. 안 열렸다.
설거지를 대충 하고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은 낮 재방송. 소리는 작게 해 두고, 눈은 화면보다 시계에 가 있었다.
두 시가 지나서 현관문이 열렸다.
미경이 들어왔다. 외출복이 평소가 아니었다. 짧은 치마, 스타킹, 화장이 진했다. 입술 색이 집에서는 안 쓰던 쪽이었다. 구두 굽 소리가 현관에서 끊겼다.
`어디 갔다 왔나.`
리모컨을 무릎에 올린 채 물었다.
“친구 만났어?”
미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고, 가방을 침대 끝에 내려놓았다. 거울 앞을 한 번 지나가는 기척이 났다. 잠시 뒤 거실로 나왔다. 치마는 그대로고, 스타킹 발만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응. 친구는 아니고.”
미경이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고개는 싱크대 쪽이고, 짧은 치마 밑으로 스타킹 다리가 그대로 보였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 입구에 섰다.
“회사 사람?”
미경이 컵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아니. 초대남.”
`뭔가 잘못 들었나.`
“뭐라고?”
미경은 남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초대남 만나고 왔어.”
“초대남을 만나고 왔다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 이불 속에서 보던 댓글이랑 쪽지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미경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행주로 컵 밑만 닦아 놓고,
주방 불을 끄지도 않은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화장 의자에 앉았다. 거울 앞에서 티슈를 뽑아 입술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진하게 발랐던 색이 휴지에 묻어 나왔다. 나는 문턱에 서 있다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가방은 침대 끝에 그대로였고, 벗어 둔 겉옷이 그 옆에 걸쳐 있었다.
`진짜냐. 지금 그 말 진짜냐.`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다시 물었다.
“초대남을 만났다는 거야? 오늘?”
미경은 나를 보지 않았다. 거울만 보고, 티슈로 눈가 화장을 문지르며 말했다.
“니가 만나보라며. 그래서 만나봤지.”
가슴이 더 내려앉았다. 말이 목구멍까지 왔다가 멈췄다. 미경이 그때 고개를 살짝 돌렸다. 충격받은 내 얼굴을 한번 보고, 다시 거울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했어.”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눈이 커져 있고, 입이 벌어져 있고, 그 위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미경은 그 얼굴을 이미 본 뒤였다. 티슈를 접어 화장대에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왜. 니가 한번만 해보자고 하도 뭐라 그래서 해봤어.”
`내가. 내가 하라고 했지. 글 올리고, 사진 올리고, 쪽지 보라고 했지.그런데.. 같이하자고 한거지 니 맘대로....`
미경은 더 말하지 않았다. 화장을 다 지우고, 짧은 치마 지퍼를 내렸다. 스타킹을 발끝에서 말아 올려 벗고, 방 한쪽 의자에 걸쳐 두었다. 속옷까지 벗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랍에서 집에서 입는 슬립을 꺼내 머리 위로 통과시켰다. 얇은 천이 허벅지 중간에서 멈췄다.
나는 그 사이를 보고만 있다가, 분노가 먼저 나왔다.
“아니, 왜 나한테 말도 없이 혼자서 그런 거야? 나는 같이 하자고 한 거잖아. 왜 니 맘대로 그렇게 한 거야.”
미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침대 위로 올라가서 누웠다. 슬립 자락이 허벅지 위로 조금 말려 올라갔고, 한 팔은 베개 옆에 늘어졌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니가 초대남 한번만 해보자 했지. 같이 하자곤 안 했어.”
숨이 막혔다. 미경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눈은 젖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뭐. 나 섹스하는 게 보고 싶은 거야? 변태야?”
할 말이 없었다. 미경 말이 틀린 데가 없었다. 같이 하자고 한 적은 없었다. 글 올리고, 사진 올리고, 한번만 해보자고만 했지, 내가 옆에 있겠다는 말은 안 했다.
미경이 눈을 감았다. 숨이 조금 길어졌다.
“아. 피곤해. 나 좀 쉴래.”
슬립 자락이 허벅지 위에서 가만히 있었다. 화장 지운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고, 입술은 아직 약간 부어 있었다.
`저 입이, 저 다리가, 방금 전까지.`
순간 장면이 겹쳤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 모텔인지 차 안인지 알 수 없는 곳. 미경이 그 아래서 뒹굴고 있었다.
짧은 치마는 허리까지 올라가 있고, 스타킹은 한쪽만 발목까지 내려가 있고, 진한 입술이 벌어져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손이 허벅지를 벌리고 있었다.
나는 침대 끝에 선 채 그 그림을 지우지 못했다. 미경은 이미 눈이 감긴 채, 더 말하지 않았다.
“진짜 했어?”
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은 감긴 채고, 숨만 고르고 있었다. 슬립 가슴팍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내가 한 번 더 불러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침대 맡에 서 있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경은 그 위를 덮듯 눈을 감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몇 번을 더 불러도 미경은 대꾸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당겼다. 슬립 자락이 이불 밑으로 들어가고, 얼굴만 남았다. 더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방 안에 더 서 있지 못하고 나왔다. 문을 닫지 못했다. 열려 있는 틈으로 숨소리만 들렸다. 내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가 밝아지는 동안 손이 키보드 위에 얹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닌데.`
소라넷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 아내 사진 아래 댓글, 읽지 않은 쪽지, 다른 집 후기. 오전에 스크롤하던 그 화면이 지금 와서 다르게 보였다.
짧은 치마, 스타킹, 앉아 있는 다리. 내가 올려 둔 것들이었다.
`내가 아내를 이렇게 만든 건가. 내 잘못이구나.`
의자에 앉은 채로 그 문장만 반복됐다. 방으로 다시 들어가 이불을 걷고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모니터 불빛만 얼굴에 닿아 있었다.
괴로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모니터 불빛이 이마에 닿아 있는데, 눈은 키보드 틈에 가 있었다.
`초대남이니 소라넷이니. 이딴 게 다 뭔 소용인가.`
댓글도, 쪽지도, 오전에 그렇게 보고 있던 후기도 이제는 글자만 남았다. 스크롤할 손이 안 움직였다.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 분쯤 흘렀다. 집 안은 텔레비전 소리조차 없었다. 미경 방 문은 내가 나와 둔 그대로, 조금 열려 있었다.
그때 그쪽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인지, 침대에서 발이 내려오는 소리인지 분간이 안 됐다.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복도 쪽을 봤다.
미경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 소리가 잠깐 났고, 곧 문이 열렸다.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 미경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화장 의자에 다시 앉는 등이 보였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거울 앞에 파우치가 열려 있었다. 지웠던 입술에 다시 색이 올라가고 있었다. 슬립 차림 그대로, 목선만 단정하게 고쳐 앉아 있었다.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화장을 왜 또 해? 또 나가?”
미경이 나를 한번 슬쩍 봤다. 눈은 바로 거울로 돌아갔고, 브러시는 멈추지 않았다.
“응. 그 초대남이 친구도 소개시켜 준다고. 또 나오래.”
`허.`
말이 안 나왔다. 초대남도 모자란데 이제 친구까지. 예전에 그 말만 꺼내도 얼굴을 돌리던 여자가,
오늘 만나고 왔다는 초대남의 친구까지 만나려고 다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쓰리썸이라도 할 건가.`
모텔이 잠깐 겹쳤다. 머리 위 조명, 구겨진 시트. 미경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치마는 허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앞의 것이 입술 색 위로 밀려 들어갔다. 볼이 불룩해지고, 침이 턱으로 흘렀다.
“으읍.”
뒤에서 들어오는 것에 등이 휘었다. 스타킹은 한쪽만 허벅지에 걸려 있었다.
“아앙, 하아.”
“소리 내. 남편 말고 자지 박히니까 좋지?”
신음이 막힌 입 밖으로 새었다. 다리 하나가 남자 어깨에 올라가 있고, 허벅지 안쪽이 번들거렸다. 거기까지였다.
내가 서 있는 방은 조용했다. 미경은 거울 앞에서 입술만 다시 바르고 있었다. 브러시가 입꼬리를 한 번 고쳤다. 그 입이, 방금 벌어져 침 흘리던 그 입이었다.
그 입이, 방금 상상 속에서 벌어져 침 흘리며 신음하던 그 입이었다.
미경은 슬립을 벗었다. 짧고 타이트한 옷으로 갈아입고, 겉옷을 걸쳤다. 가방을 들었다. 서 있는 내 옆을 지나 현관으로 갔다. 힐을 신기 시작했다.
나는 따라 나갔다.
“야.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당장 안 들어와?”
미경은 듣지 않았다. 한쪽 힐을 끌어 올리고, 다른 발을 넣었다. 굽이 현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앞에서 목소리가 커졌다.
“너 지금 나가면 이혼이야.”
미경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힐을 다 신고, 문을 열기 직전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의 담담한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좁아져 있었다.
“야. 너 그때 찜질방에서 나 잘 때, 남자들 데리고 와서 했던 거 기억 안 나?”
찜질방....
그 단어가 현관에 떨어졌다. 나는 주저앉은 채로 입을 열지 못했다. 미경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화난 얼굴 그대로, 내 눈을 한 번 더 보고 문을 열며 말했다
“내가 이혼하자고 할 거는 걱정 안 했어?”
힐 소리가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문은 닫혔다.
그 말 다음에 나오는 게 없었다. 오전에 댓글 보던 손, 한번만 해보자고 하던 입, 그게 한꺼번에 막혀 왔다.
무릎이 현관 턱에 접혔다. 주저앉은 나를 뒤로하고, 미경이 문을 열었다. 힐 소리가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문은 닫혔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 현관 밖으로 나간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초대남이니 스와핑이니, 그런 걸 모르고 살던 사람한테 내가 먼저 꺼냈다.
말로만 끝난 게 아니었다. 초대남을 구해서, 잠든 아내 옆에 남자들을 들였다. 들켰다.
미경은 그 일에 대해서 추궁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그 밤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나는 안 묻는 걸 넘어간 걸로 여겼다.
눈물이 났다. 주저앉은 채로, 닫힌 문만 보고 있었다. 힐 소리는 이미 없었다.
`가정이 깨지고 혼자 된 것 같다.`
가정이 깨진 것 같았다. 혼자 된 것 같았다. 사랑하던 아내가 내 손에서 나간 기분이었다.
내가 들인 남자들로, 내가 연 문으로. 현관 바닥에 벗어 둔 실내화만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집어 넣을 손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현관에 앉아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거실로 들어오던 빛이 조금 어두워질 때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았다. 끊기고, 다시 걸고, 또 끊겼다. 스무 통인지 서른 통인지, 몇 통인지 세지 못했다. 벨소리만 같은 길이로 돌다가 음성으로 넘어갔다. 문자는 쓰지 못했다.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받아야 하는데. 받기만 하면.`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어스레했다. 집 앞 벤치에 앉았다. 휴대폰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같은 번호만 눌렀다.
길이 끝나는 쪽을 보면서, 힐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면서, 손은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도 못 걸고 들고만 있었다. 속이 타 들어갔다. 화면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후회였다. 글 올리던 밤, 한번만 해보자고 하던 말, 잠든 옆에 남자를 들이던 손. 그걸 전부 되돌리고 싶었다. 지금 이 벤치만 아니면, 오늘 오후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길이 더 어두워졌고, 가로등이 하나 켜졌다. 벤치 나무는 차가웠다. 나는 그 위에 앉아, 오지 않는 번호만 손에 쥐고 있었다.
멀리서 힐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반사적으로 그쪽을 봤다. 가로등 아래, 작게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가방, 짧은 옷, 걸음. 미경이었다.
벤치에서 일어났다. 달려갔다. 휴대폰은 손에 쥔 채였다.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보였다. 현관에서 보던 그 눈이 아니었다. 좁아져 있던 눈이 풀려 있었고, 입도 그때처럼 굳어 있지 않았다. 무서운 얼굴에서, 조금 밝아져 있었다.
달려오던 발이 그 앞에서 멈췄다. 미경 얼굴이 현관 때보다 풀어져 있는 걸 보는 순간, 참았던 게 터졌다. 눈물이 먼저 났고, 말이 울음에 섞여 나왔다. “미안해. 정말 다 미안해.” 숨이 끊겼다. 나는 그 앞에 거의 주저앉듯 고개를 숙였다. “제발 그러지 마. 잘할게.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초대남이니 뭐니, 내가 잘못했어. 제발.” 미안하다는 말만 같은 자리에서 반복됐다.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가방끈을 고쳐 잡고 말했다. “안 했어.” 울음이 한 박자 멈췄다.
“초대남 안만났다고”
`뭐.?.` 속이 한꺼번에 비었다. 모텔도, 쓰리썸도, 얼굴 없는 남자도, 벤치에서 그리던 것들이 한번에 없어졌다. 그런데 미경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네가 하도 그 소리만 해서. 한번 혼나 봐야 되나 싶었어.” 미경이 내 옆을 지나 집 쪽으로 걸었다. 두 걸음쯤 가서, 고개도 안 돌리고 덧붙였다.
“잘 때 들이지만 마. 그건 아직 안 끝났어. 초대남은 나중에 내가 말할 때까지 꺼내지도 마.”
나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그 등을 봤다. 안도인데, 다리가 바로 따라가지 못했다. 미경은 기다리지 않았다. 어두워진 길 위로, 집 불이 보이는 쪽을 먼저 걷고 있었다.
미경이 먼저 걷는 등을 보다가, 속이 조금 풀렸다. 안 했다는 말이 그제야 몸에 들어왔다. 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고, 두 걸음 따라가서 뒤에서 안았다.
“미안해. 잘할게.”
목소리가 울음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경 어깨가 팔 안에서 굳지도, 풀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 등에 이마를 잠깐 대었다가, 낮게 물었다.
“진짜 안 만났어?”
팔이 풀리기 전에, 미경이 등을 빼며 말했다.
“안 만났어.”
한 걸음 가다 멈추더니, 고개도 안 돌리고 덧붙였다.
“만나볼까 했어. 근데 니가 불쌍해서 안 간 거야. 이 화상아.”
그 말에 울음이 웃는 쪽으로 새었다. 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미경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물었다.
“불쌍한 거, 효과 있었네..화상은 좀 심하지 않아?”
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꼬리만 잠깐 풀렸다가, 집 불이 보이는 쪽을 보고 걸었다. 잡은 손을뿌리치진 않았다.
어두워진 길이 아까보다 짧아 보였다.
블루메딕 후기작성시 10,000포인트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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