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상간(母子相姦), 엄마와 아들의 심리(心理) 구조

엄마의 그림자와 연상의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
— 무의식 속 사랑의 구조를 마주하며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왜 나는 연하보다 연상에게 더 끌리는 걸까. 단순한 취향이라고 넘기기엔, 그 감정은 너무도 깊고 안정적이며, 때로는 나를 감싸 안는 듯한 위안을 준다. 그 감정의 뿌리를 더듬다 보면, 결국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불안이라는 심리적 구조를 마주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과 욕망이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특히 어린 시절,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최초의 사랑과 경쟁, 두려움을 경험한다. 남자아이의 경우, 어머니에게 성적 애착을 느끼며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이때 아버지의 권위와 힘은 아이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 위협은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거세당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 불안은 아이가 욕망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규범을 내면화하면서 초자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단지 어린 시절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그 흔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연상 여성에게 끌리는 남성의 심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보호와 애정은 심리적 안정감의 원형이 된다. 연상 여성은 그 원형을 재현하는 존재로 다가오며, 그녀의 성숙함과 감정적 여유는 남성에게 위안을 준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때로는 단호하며, 무엇보다도 ‘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런 감정은 때로는 사회적 시선과 충돌하기도 한다. 연상 연하 커플에 대한 편견, 남성은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그리고 ‘왜 나는 이런 사람에게 끌리는 걸까’라는 자기 의심까지.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그 감정은 결코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내면이 안정과 애정을 갈망하는 방식이며,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감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의 흐름에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감정이 반복적인 고통이나 관계의 왜곡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의존적인 관계, 감정적으로 불균형한 연애, 혹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들. 그런 때에는 한 번쯤 멈춰서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는 왜 이런 관계를 반복하는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랑을 원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애착 유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감정에 자주 휘둘리는지를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의 지배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심리치료나 상담은 그 여정에 큰 도움이 된다.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의식의 구조를 언어화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를 배운다. 또한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면서 고정된 심리적 패턴을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서 안정감을 찾기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단단히 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질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랑도 더 자유롭고 성숙한 형태로 피어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연상 여성에게 끌린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의 뿌리를 알고 있고, 그것이 나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다. 그리고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나는, 더 이상 무의식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를 감싸던 품, 그 너머의 사랑
— 연상 여성에 대한 애착과 확장된 무의식의 풍경
어릴 적 나는 할머니의 무릎에서 잠들곤 했다. 엄마의 품도 따뜻했지만, 할머니의 손길은 어딘가 더 느긋하고 깊었다. 큰엄마는 늘 나를 챙겨주었고, 큰 숙모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안정감을 느꼈고, 그 감정은 단순한 가족애를 넘어선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왜 나는 엄마보다 더 연상인 여성들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을까. 그것은 단순한 유년기의 기억일까, 아니면 더 깊은 무의식의 흐름일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 대표적인 예로, 남자아이가 어머니에게 성적 애착을 느끼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심리적 갈등을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욕망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하며 사회적 규범을 받아들인다. 이때 어머니는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자, 안정감의 원형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어머니보다 더 연상인 여성들—할머니, 큰엄마, 큰 숙모—그들에게 느끼는 애착은 단순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연장선으로 설명되기엔 부족하다. 그 감정은 어머니와의 관계보다 더 느슨하고, 더 포괄적이며, 때로는 더 깊은 위안을 준다. 나는 그 감정을 ‘확장된 모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확장된 모성이란, 생물학적 어머니를 넘어선 여성적 보호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들은 아이에게 직접적인 양육을 하지 않더라도, 감정적 지지와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특히 할머니는 세대의 경계를 넘어선 지혜와 인내를 상징하며, 아이에게는 ‘절대적인 수용’의 공간이 된다. 큰엄마나 큰 숙모 역시 가족 내에서 어머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며, 아이는 그들로부터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경험한다.
이러한 애착은 무의식 속에서 ‘보편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다. 어머니가 욕망과 금기의 경계에 있는 존재라면, 할머니나 큰엄마는 그 경계를 넘어선 ‘순수한 안정감’의 상징이 된다. 아이는 그들에게서 욕망의 긴장 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 감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연상 여성에 대한 선호로 이어질 수 있다. 연상 여성은 단순히 나이 많은 존재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나를 판단하지 않고 받아주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변형일까, 아니면 새로운 심리적 구조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경쟁과 억압, 금기와 욕망의 구조 속에서 작동하지만, 확장된 모성에 대한 애착은 그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수용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에 가깝다. 이 감정은 인간의 근원적인 안정 욕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연애나 결혼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여전히 연상 여성에게 끌린다. 그 감정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이 선택한 안정의 방식이다. 나는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더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해, 나는 사랑이란 단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를 감싸주는 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의 벽을 넘은 사랑, 마크롱과 브리지트의 이야기
— 연상 여성에게 끌리는 심리와 그 너머의 의미
사랑은 때로 세상의 기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과 그의 아내 브리지트 트로뉴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다. 두 사람은 무려 24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세상의 편견과 가족의 반대를 넘어 부부가 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진다.
마크롱이 브리지트를 처음 만난 건 그가 15살이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녀는 학교 연극부를 지도하던 문학 교사였고, 이미 세 자녀를 둔 유부녀였다. 세상은 이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라 불렀고, 그의 부모조차도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마크롱은 파리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결혼할 겁니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2007년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하필 연상?” “왜 그렇게까지?” 하지만 그 질문은 너무 표면적이다.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연상 여성에게 강하게 끌리는가?” 그 감정은 단순한 취향이나 우연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심리적 구조일 수 있다.
어릴 적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최초의 애착을 경험한다. 그녀는 보호자이자 사랑의 원형이며, 우리의 감정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존재다.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보다 더 연상인 여성—할머니, 큰엄마, 선생님—에게서 더 깊은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판단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으며, 아이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여주는 품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연상 여성에 대한 선호로 이어질 수 있다. 그녀들은 단순히 나이 많은 존재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나를 감싸주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마크롱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교사들과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감정적으로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브리지트는 그에게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정신적 동반자이자 감정적 안정의 중심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육체적 열정보다 정신적 연결이 강한 커플로 평가되며, 수비학적으로도 ‘사회적 상징이 되는 운명적 조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
이런 사례는 마크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연상 여성과의 관계를 선택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배우 애쉬튼 커처와 데미 무어, 가수 해리 스타일스와 올리비아 와일드, 일본의 정치인이나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시선과 규범을 넘어서, 자신만의 감정과 선택을 따랐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다. 사랑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안정감, 감정적 연결, 그리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에서 비롯된다. 연상 여성에게 끌리는 감정은 결코 이상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내면이 선택한 방식이며, 그 안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 무의식의 흐름, 그리고 존재의 갈망이 담겨 있다.
마크롱은 대통령이 되었고, 브리지트는 그의 곁에서 여전히 단단한 동반자로 존재한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기준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삶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나요?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요?
아들을 향한 사랑, 며느리를 향한 그림자
— 시어머니의 질투와 무의식의 심리 구조
나는 종종 며느리의 입장에서, 혹은 딸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시어머니가 저를 너무 싫어하세요. 제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아들 앞에서는 저를 무시해요.” 처음엔 단순한 고부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심리적 구조가 숨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성격 차이나 세대 차이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의 무의식 속에서 아들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질투와 시기로 변질되는지를 이해해야만 이 감정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단순한 자식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분신이자,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존재이며, 때로는 남편보다 더 깊은 정서적 유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남편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거나 감정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경우, 어머니는 아들에게 감정의 중심을 옮긴다. 그 사랑은 깊고 헌신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내가 지켜야 할 존재’이자, ‘나만의 세계’가 된다.
그런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위협을 느낀다. 며느리는 단순한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내 아들을 빼앗아가는 여자’로 인식된다. 이때 어머니의 무의식 속 어두운 그림자가 드러난다. 융 심리학에서는 이를 ‘어머니 원형의 그림자’라고 부른다. 원래 어머니 원형은 보호와 양육의 상징이지만, 그 그림자는 소유욕과 통제, 질투와 경쟁심으로 나타난다. 며느리는 그 그림자의 투사 대상이 되어, 어머니가 인정하지 못한 자신의 여성성, 젊음, 욕망, 열등감이 모두 며느리에게 쏟아진다.
이러한 심리 구조는 며느리에게 큰 상처를 준다. 아무리 잘하려 해도, 아무리 공손히 대하려 해도, 시어머니의 눈에는 며느리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인다. 며느리의 요리 방식, 육아 방식, 말투 하나하나가 시어머니에게는 ‘내가 밀려나고 있다’는 불안으로 해석된다. 그 불안은 간섭과 지적, 무시와 핍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고부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표면화된다.
하지만 나는 이 감정을 단순히 ‘시어머니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살아오며 겪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억눌린 감정의 결과다. 어머니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때로는 사랑받지 못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아들에게 쏟은 사랑은, 어쩌면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의 보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이 며느리라는 존재 앞에서 위협받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그렇다고 해서 며느리가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감정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시어머니의 질투는 그녀의 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며느리는 그 약함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거리와 경계를 조절하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때로는 적당한 무심함이, 때로는 조심스러운 인정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다. 시어머니의 질투는 사랑의 뒤틀린 형태이며, 그 안에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존재의 불안이 숨어 있다. 며느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필요는 있지만, 감정의 희생자가 될 필요는 없다. 관계는 이해와 거리, 그리고 자기 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균형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평화로운 가족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서 멀어진 마음, 아들에게 쏟아진 사랑
— 어머니의 애착이 향하는 방향에 숨겨진 심리
어떤 어머니는 아들에게 유난히 애정을 쏟는다. 그 사랑은 단순한 모성애를 넘어선다.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그의 선택에 간섭하며, 때로는 그의 배우자에게까지 감정적으로 개입한다. 주변에서는 “아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감정의 뿌리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 그 사랑은 정말 아들만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남편에게서 멀어진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결과일까.
많은 여성들이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에서 기대했던 감정적 친밀감이나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 남편은 무뚝뚝하거나, 바쁘거나, 혹은 감정 표현에 서툴다. 그럴 때 아내는 점점 외로워진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을 주고받고 싶지만, 그 대상이 더 이상 남편이 되지 못할 때,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 대상이 바로 아들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정적으로 더 가까운 존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의 감정을 받아주는 존재였다.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다정함과 관심을 아들에게서 느낄 수 있을 때,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아들에게 감정의 중심을 옮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감정의 대리 충족’이라고 부른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자녀에게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겉으로 보기엔 모성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성으로서의 외로움과 상실감이 숨어 있다. 남편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여성성, 무시당하거나 소외된 감정,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아들에게 투사된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단순한 자식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안전한 남성’이 된다. 그는 판단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을 받아주며, 그녀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 감정은 균형을 잃기 쉽다. 아들이 성장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새로운 여성을 만나게 되면,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위협을 느낀다. 그녀의 감정적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며느리는 ‘아들을 빼앗아가는 여자’로 인식된다. 그 결과, 며느리에 대한 질투와 시기, 그리고 갈등이 생겨난다. 이는 단순한 고부 갈등이 아니라, 감정의 중심을 잃은 어머니의 불안과 상실감의 표현이다.
이런 심리 구조는 우리 문화 속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특히 전통적으로 부부 간의 감정적 교류가 제한되었던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남편보다 자녀와 더 깊은 정서적 유대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생계의 책임자였지만, 감정의 동반자는 아니었다. 그럴 때 여성은 자녀에게서 감정적 보상을 받으려 했고, 그 보상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대상이 바로 아들이었다2.
나는 이 감정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는 여성으로서의 외로움과 억눌린 감정이 담겨 있다. 어머니도 누군가의 아내였고, 사랑받고 싶었던 여자였다. 그녀가 아들에게 쏟은 사랑은, 어쩌면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흔적은 며느리라는 새로운 존재 앞에서 흔들리며, 갈등으로 표출된다.
중요한 것은 이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결핍되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며느리는 그 감정을 단순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머니의 내면에 있는 상처를 이해하려는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이해가 감정의 희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계는 거리와 경계 속에서 조율되어야 하며, 모든 감정은 존중받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때로 남편에게서 멀어진 마음의 흔적일 수 있다. 그 감정은 복잡하고, 때로는 아프지만,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조금 더 깊은 공감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후기
모자상간(母子相姦)은 ChatGPT, Copilot에서 주제 탐색 후 취합하였습니다.
근본 가설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융의 여성 원형상(元型像) 입니다.
링크 사이트로 가시면 음성 및 AI Image로 볼 수 있습니다
블루메딕 후기작성시 10,000포인트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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