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 제 2화
처형Mandy봊이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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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전
한 주가 또 시작됐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특별한 알림도 없는데 괜히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하길 두 세 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엘리나 생각에 하루 종일 사로잡혀 있었다.
외로움과 익숙함에 젖어버린 결혼 생활에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그녀. 단순히, 같은 지역에 살았다는 공감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와 나는 통하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을 첫 만남에서 알게 됐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흔히들 코드가 잘 맞다고 하는 그런 순간들.
12시부터 6시까지 영어 강사로 일한다던 그녀. 시계를 보니 12시가 훨씬 넘어 있었고, 근무 중이라 연락이 될까 싶었지만, 도저히 안 하고는 못 베길 것 같아서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로, 영어에서는 한국어처럼 존칭이나 존댓말이 세세하게 구분되지 않기에 편의상 반말체로 대화를 번역하겠다.
[나 - 일하고 있어? ㅎㅎ]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읽음 표시가 금방 사라지고 답장이 왔다.
[엘리나 - 응. 이따 오후에 있을 수업 준비하고 있어. 너는?]
점심을 먹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또 다시 대화가 이어진다. 이따금씩 답장이 늦기는 했지만, 말투나 내용으로 봐서는 나의 연락이 귀찮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 다 결혼을 했고 그녀도 그걸 잘 아는데, 이렇게 유부남과의 대화를 즐긴다? 엊그제 친해진 사람으로만 대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비슷한 처지이거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메시지를 천천히 입력했다.
[나 -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잠깐 커피 한 잔 할래?]
보내 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뻔히 알고 있었다. 유부남이, 그것도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단둘이 만나자고 먼저 제안한 셈이다. 이건 위험했다. 아니, 이미 위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손은 내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고 말았다. 채팅을 입력 중인 지 말줄임표가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마 그녀도 뭐라 해야 할 지 고민 중인 듯 하다. 까이면 말고라는 식으로 채팅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나 - 좋아 ㅎㅎ]
그걸 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창가로 갔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들떠 있었다.
‘미쳤다, 진짜…’
속으로 욕하면서도 입꼬리는 내려가질 않았다.
* * *
약속 시간이 되어 카페 앞에서 전자담배를 한 모금 빨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을 스크롤 하던 중, 멀리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률!”
엘리나였다.
“왔어?”
내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엘리나는 밝은 크림색 니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두툼하지 않지만 부드러운 짜임에 몸의 라인이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스웨터 아래로는 깊은 네이비 색 하이웨이스트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실루엣인데, 스커트가 허리를 감싸는 방식 때문에 그녀의 넓고 풍만한 골반 라인이 굉장히 또렷하게 드러났다. 순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조금 난감했을 정도였다.
160 초중반 정도 되는 아담한 키인데도 골반이 유독 커 보였고, 그 라인이 스웨터와 스커트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전체적인 비율이 균형감 있게 보였다. 금발 머리는 바람에 흩날려 몇 가닥이 뺨 위로 떨어져 있었다.
엊그제 펍에서는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보니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더욱 도드라졌다. 나는 그녀의 옷을 홀딱 벗기고서 젖가슴과 보지를 주무르는 상상을 하고 있다. 저 옷들을 다 벗기고 나서 보는 나체는 어떨까?
“미안, 좀 늦었지?”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그녀의 가슴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서는 재빨리 시선을 거둬들였다.
“아,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얼른 들어가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웃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커피 한 잔씩을 각자 주문하고서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모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엘리나는 남편 얘기도 했고, 나는 수잔나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말했다. 아주 친한 친구들 아니면 누구에게도 하지 않던 솔직한 얘기들이 그녀 앞에서는 술술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때 알 수 있었다. 익숙함에 젖어 버린 결혼 생활, 그리고 타향살이에서 오는 외로움에 그녀와 나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기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가볍게 웃으면서 시작했던 대화는 점점 진지한 이야기로 바뀌어갔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 앉았다. 엘리나는 말을 끝내고, 창밖으로 수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그 눈빛이 참으로 외롭고 슬퍼 보였다. 국적만 다르지, 어찌보면 우리 둘은 같은 처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찍 들어가야 돼?”
“아니? 왜?”
“괜찮으면...... 술 한 잔 안 할래?”
엘리나는 테이블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산다는 말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리 둘은 밖으로 나와서는 근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테이블 위에는 벌써 빈 맥주병 세 병과 소주 한 병이 올라가 있었다. 엘리나가 고기 한 점을 쌈 싸먹으면서 말했다.
“한국식 바비큐는 언제나 먹어도 맛있어, 헤헤.”
“솔직히 호주식 바비큐보다 이게 낫지?”
“응. 그나마 음식이 맛있어서 다행이지, 그것까지 아니었다면 나 한국 생활 못 했을 거야.”
가볍게 웃으며 시작했던 대화는 조금씩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고, 숯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만 잠시 대화를 대신했다. 잔잔한 연기가 올라오고,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섞여 들려오는데도 우리 테이블만 조용한 것 같았다.
맥주 한 잔을 서로 앞에 놓고 건배를 한 후, 엘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꺼냈다.
“처음에 남편이 설득을 많이 했거든. 한국 가면 호주에서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도 연애할 때 한국에 몇 번 왔고, 그 때의 좋은 기억이 있어서 결국 온 거야.”
“그랬구나. 근데, 지금은 어때?”
“여행으로 오는 거랑 사는 거는 많이 다르더라고.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거든. 한국말도 완벽하지 않으니까 친구 만들기도 힘들고. 다들 바쁘고, 다들 자기들끼리만 친해서 들어가기 어렵고.”
엘리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살짝 웃었는데, 그 웃음은 명백히 외로움을 숨기는 웃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고향 생각 진짜 많이 나. 멜번이 이렇게 그리울 줄 몰랐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멜번.......
내가 처음 호주 유학 갔을 때 그 막막함, 영어가 안 통해 답답했던 순간들, 집에 돌아오면 누구도 나를 기다리지 않던 적막한 방의 공기. 그 때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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