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 제 8화
처형Mandy봊이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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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전
지난번에 언어 모임에 다녀온 이후로, 수잔나의 일상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신경을 안 쓰면 지나쳤을 지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엘리나랑 밀애를 나누고 있어서 그런가, 나는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TV를 보다가도 누군가랑 자주 카톡을 주고 받았고, 이따금씩 빙긋 웃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이나 어학원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 며칠 지켜보던 나는 밤에 수잔나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휴대폰을 열었다. 비밀번호를 푸니까 메인 화면이 나왔고, 카톡을 눌러 들어가 보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주혁과 함께 대화를 나눈 내역이 보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읽어보았다.
[수잔나 - 주혁아, 퇴근하는 길에 차가 많으면 ‘퇴근길이 막혀요’ 라고 하면 돼?]
[주혁 - 응! ‘막히다’라고 하면 돼]
[수잔나 - 오, 고마워! 근데 그 단어 말하니 다들 한숨 쉬던데? ㅋㅋ]
[주혁 - 퇴근길 막히는 거 다들 싫어하니까 ㅎㅎ]
[수잔나 - 그럼 ‘오늘은 막히지 않았어요’ 이건 맞아?]
[주혁 - 응, 완전 자연스러워. 한국사람 다 됐네?]
[수잔나 - 그렇게 말해주니 자신감 생기는데? 다음에도 더 가르쳐 줘]
[주혁 - 좋아, 그때는 좀 더 어려운 문장으로 알려줄게!]
읽으면 읽을수록, 이게 별거 아닌 대화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정말로 언어 교환, 표현 질문, 가벼운 농담 몇 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금 불쾌했다. 왜 굳이 단둘이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감정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이미 엘리나와 몰래 섹스까지 했다. 정작 먼저 시작한 건 나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수잔나의 대화를 보니 찝찝함과 경계심이 동시에 올라왔다. 마치 내 죄책감이 반사처럼 튀어나와 질투라는 이름으로 뒤틀려 나오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큰 번역 건이 들어와서 회사는 바쁘게 돌아간다. 감수팀에 서류 몇 장을 주고 오는데, 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 끝나고 술 한 잔 하자던 그 놈 말에 창밖을 본다. 먹구름이 잔뜩 낀 채, 세찬 비가 창문을 연신 두드린다. 안 그래도 막걸리 한 잔 생각났던 터라, 퇴근 후에 역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파전과 어묵탕을 곁들여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이었다.
처음으로 주혁과 함께 하는 술자리. 불륜녀의 남편과 마주하고 있으니 처음에는 되게 기분이 이상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우리는 같은 남자로서 공감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말수도 적고, 점잖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술에 취한 주혁은 전혀 달랐다. 더럽고, 은근히 비뚤어진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얼굴이 벌개진 채,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 말했다.
“형님. 저는 종종 그런 생각해요.”
“뭔데?”
“결혼 생활 오래 가려면, 남자는 가끔은 다른 여자 좀 맛봐야 한다고요.”
나는 웃음인지 긴장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게 말이 되냐?”
“돼요. 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형님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지 않아요? 남자는 다 그렇잖아요.”
그 말에 잔을 들던 내 손이 잠깐 멈췄다.
‘있지. 나도 그러고 있지. 그것도 네 마누라랑.’
속이 뜨끔했지만, 표정만은 최대한 무덤덤하게 유지했다.
“뭐, 충동이야 다들 있겠지. 근데 결혼하면 조심해야지.”
주혁은 픽 웃으며 잔을 또 채웠다.
“에이, 형님 진짜 김빠지는 소리 하신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속 깊은 곳을 찔렀다. 이 인간, 뭔가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그냥 취해서 헛소리 하는 건가?
나는 그의 잔을 채워 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나랑 결혼 생활하는 게 힘들어서 그래?”
주혁은 주전자를 받아 내 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내가 엘리나를 사랑 안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그게 꼭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런 사랑은 또 아니잖아요. 형님도 알잖아요. 오래 같이 살다 보면 부부간의 감정이라는 게 보통 정? 익숙함? 뭐 그런 걸로 바뀌는 거.”
“풉, 흐흐, 누가 보면 결혼한 지 몇 십 년은 된 커플인 줄 알겠다.”
나는 비꼬듯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라는 건 부부마다 느끼는 게 다를 것이니.
그는 또 한 잔을 비우고 말을 이어갔다.
“엘리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착하고, 배려도 많고. 근데, 제 욕정을 오롯이 채워주기엔 솔직히 많이 부족해요. 뭐랄까, 너무 안정적이어서 재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편하기는 한데, 그 편안함만으로는 안 되는 게 또 있는 거죠.”
나는 가만히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마음 한복판이 저릿해졌다. 그의 말에서 나의 결혼 생활이 오버렙되었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가 대신해서 읊어주고 있는 듯했다.
‘네가 그 지랄하는 동안, 나는 네 아내랑 떡을 쳤어.’
그 생각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톡, 하고 아프게 찔렀다. 죄책감인지, 우월감인지, 경계인지 알 수 없었다.
주혁은 마치 중요한 결론이라도 내린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에 엘리나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운다가 들켰다? 음...... 그러면 기분은 좆나 더럽겠죠. 상대 새끼는 반쯤 죽일지도 몰라요. 근데, 뭐랄까요, 그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저는 더 풀릴 것 같아요.”
“풀린다고?”
내가 되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그래도 엘리나 생각해서 좀 조심하는 척은 하잖아요. 근데 그 선이 무너지면? 저는 아마 대놓고 업소에 다니거나 다른 여자 만날 걸요. 뭐, 결혼 생활 깨지면 깨지는 거고. 요즘 이혼이랑 돌싱은 낙인도 아닌데, 흐흐흐.”
나는 잔을 내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너무 위험하고,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묘하게도, 그의 그런 태도가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이미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그와 마주한 술자리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나, 주혁, 수잔나, 그리고 엘리나. 우리 넷의 관계가 이미 격랑 속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그 끝은 당연히 비극이겠지만 뭐랄까, 그 과정만큼은 정말 스릴 넘칠 것만 같은, 미친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역 근처 오피스텔로 향했다. 러시아 여자를 픽했고, 1시간 동안 신나게 욕정을 풀고 왔다. 주혁과 작별 인사를 하고는 대리 기사를 불러 뒷좌석이 올라탔고, 눈을 감는다. 취기에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에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잔나가 아닌 엘리나였다. 주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녀가 왜 그토록 외로움을 느끼는 지 알 수 있었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휴대폰 화면을 보며 망설이던 나는 조용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어 번 가다가 엘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률! 어쩐 일이야?”
“잘 있었어? 나 지금 주혁이랑 술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어머, 정말?”
“응.”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숨을 길게 내뱉고 말했다.
“술 한 잔 마시니까, 네 생각나더라. 보고 싶네.”
“........ 나도.”
엘리나의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그 한 마디에 정말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늘 많이 마셨어?”
“좀 마셨어.”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예전처럼 들뜬 웃음이 아니라, 마음 깊은 데서 조용히 올라오는 그리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
“응?”
“주혁이 이번 주 주말에 친구들이랑 1박 2일로 놀러 간대.”
“그래?”
“응. 그래서 말인데, 우리 볼 수 있을까?”
말끝이 떨렸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정말 만나고 싶어서 묻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당연하지.”
“후훗.”
엘리나는 다시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고, 그 소리에 내 입가에도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다가올 토요일에 있을 일을 상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제대로 데이트 한 번 하자.”
“그래.”
“나 집에 거의 다 왔어. 들어갈게. 잘 자.”
“너도 잘 자. 그리고.......”
“응?”
“나도 많이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고, 내 머릿속은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될 순간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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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