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기 좋은날 007 -----
네코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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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전
바람피기 좋은 날 007 -----
휴대전화가 울린다.
정희씨의 전화다.
나로 인해 힘들어할 또 다른 한 사람..
갑작스레 모든 연락을 하나도 받지 않아 너무나 걱정스럽겠지..그래서 지금 이 시간까지 잠 못 들고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겠지..
아내와 정희씨,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생각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고 이미 아내에게 커다란 상처를..정희씨에게도 커다란 상처를 가져다주기 직전까지 내몰고 있었다.
“여보세요..”
“민수씨 울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왜 하루 종일 연락이 안되요..걱정되게..”
가늘게 떨려오는 정희씨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위태했다.
“난 괜찮아요. 시간이 늦었는데 안자고 뭐해요..”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는데 잠이 와요..이런 적 한 번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러는데..”
한 번도 이런 적 없는 사람..난 오늘 두 사람에게 동시에 신뢰를 잃어버린 것인가..
한 번도 바람을 피워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가..한 번도 연락 안 된 적이 없던 사람이 되어 있는 나는 두 사람의 신뢰를 얼마나 깨트려버릴 것인가..
“날 왜 기다려요..나 같은 사람을 왜..나같이 정신 나간 쓰레기 같은 놈을 왜...”
“민수씨 도대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그리로 갈까요? 어디에요. 내가 갈게요”
다급하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정희씨..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말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지..
하지만 내가 유부남이라면..아내와 내가 사는 집으로 오라고 한다면 그녀는 올까..그럴 리가 없겠지..그건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짓이니까..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날 걱정해주는 건 정말 너무나 고맙고 미안한데 당분간은 그냥 날 믿고 기다려줘요. 내가 모든 걸 설명해줄게..그동안은..그냥 날 믿고 기다려줘요..”
“알았어요...그게 민수씨 결정이라면..기다릴게요..”
깊은 한숨과 함께 정희씨의 전화가 끊어진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짜고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고 당분간 기다려달라는 내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려올까..
정희씨의 연락에 넋이 나가서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도어락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들어온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비틀대면서 들어오던 아내는 내가 다가가 부축을 하려고하자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내가...내가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왜 다 오빠 마음대로야..내 말이 우스워? 바람피는 것도 오빠 맘이고..내 몸에 손대는 것도 오빠 맘이야? 왜 그렇게 다..오빠 맘대로야..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니..”
“은주야 그게 아니라..”
“됐어..시끄러..다 필요 없어..다..”
은주는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비틀비틀 대면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이미 완전히 아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난 안방으로 들어가 아내를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히기 위해 옷을 벗겼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난 혹시나 아내가 태현과 잠자리를 가지진 않았는지 확인했는데 아내의 벗은 몸에 그런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란 놈은 이런 상황에도...’
끝까지 아내와 태현의 관계를 의심하는 나란 인간에 대해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고..그 순간 아내가 몸을 옆으로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난...난..그럴 수 없더라..태현 오빠에겐 아무 마음이 생기지 않더라..오빠를 사랑하니까..”
술에 취해 잠에 취해 힘들게 한 단어 한 단어를 말하는 아내의 잠꼬대가 너무나 선명하게 내 귓가에 들려왔고, 그 말은 내 마음을 너무나 깊게 후벼 파고 있었다.
“나...나란 놈은 정말....”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난 그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면서 아내에게 잠옷을 입혀주고 조용히 안방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쇼파에 앉아 한참을 울며 내 뺨을 때렸다.
아내에게 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뺨이 아니라 다른 곳을 더 심하게 때릴 수도 있었다.
아내의 맘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다면..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지금은 아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아내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뺨이 얼얼하다. 얼마나 내 손으로 내 뺨을 때린 걸까..
비릿한 피 맛도 나는걸 보니 입 안이 터진 것일까.. 아무렴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느새 새벽 6시, 날이 밝아온다. 까맣던 어둠이 지나가고 조금씩 푸르스름한 하늘로 세상이 바뀌어간다.
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쇼파에 멍하니 그대로 앉아 날을 지새웠다.
이틀 동안 잠을 잔 게 거의 두 시간이 될까 하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누군가 나를 옆에서 툭 하고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이런 상태로 과연 회사는 출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감정은 감정, 현실은 현실.. 난 부서질 거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퀭한 눈, 입술껍질이 다 일어나서 부르튼 입술,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얼굴에 잔뜩 올라와 있는 뾰루지까지..
“몰골이 말이 아니구만....”
쓴 웃음이 나온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기에..
대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물만 끼얹고 면도도 하지 않고 난 욕실에서 나와 조심히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 난 조심스레 아내가 깨지 않게 침대에 살며시 앉아 새우처럼 불편하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는 아내의 몸을 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제대로 베개에 눕히고 위해 돌리는 순간 아내의 얼굴에 묻어있는 눈물 자국을 보았다. 자면서도 울었던 것일까..아니면 새벽에 깨어나서 운 것일까..
마음이 저릿하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내 가슴을 면도날로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난 차마 출근한다고 아내를 깨울 수 없었고, 편하게 자도록 아내를 내버려두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부장에게 쉬고 싶다고 연차를 냈다.
부장은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많이 안 좋으면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된다고 얼른 들어가라고 말했다.
아마도 부장이 날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 정도로 내 몰골이 말도 안 되게 형편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부장의 허락을 받자마자 난 곧바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주변의 다른 부서원들은 하나같이 어서 들어가라고 많이 힘들어 보인다는 말을 한 마디씩 했고, 난 듣는 둥 마는 둥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그렇게 회사를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집안, 아직 아내는 잠들어있는지 집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혹시나 난 아내가 깰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고 들어와 조심스런 걸음으로 안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순간 불안한 느낌과 함께 난 욕실부터 온 방문을 다 열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함께 그 순간 식탁 위에 하나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필체, 아내의 글씨였다.
-당분간 친정집 가서 쉬고 올게. 가서 아무 말 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휴대폰 꺼놓을 거니까 연락 하지 마. 그리고 내 말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정리가 될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아직까지 오빠를 놓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그리고 조금 생각해봤는데 사람 맘이라는 게 마음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 순간 생각이 들더라. 만약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나도 태현 오빠를 버리고 오빠를 택하진 않았겠지..오빠가 지금 그 정희라는 여자에게 마음 가는 거 어쩌면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물론 아직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최소한 어떤 생각으로 오빠가 그 여자에게 빠진 것일까 뭐 그런 걸 나 혼자 최소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할까..아무튼 나 없어도 잘 지내고..그 여자 만나는 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진 않을게..오빠가 그 여자를 정리를 하든 계속 만나든 어떤 상황이더라도 그 여자를 한 번은 더 만나야 할 테니까..그리고 그건 오빠 선택이겠지. 우리가 부부라고 하더라도 내가 오빠의 선택까지 간섭할 순 없을 테니까..
메모는 그렇게 끝나 있었고, 난 메모를 확인하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분명 내가 출근할 때까지 아내는 자고 있었고, 내가 출근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 이제 될까 말까였다.
그렇다면 아내가 아직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난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슬리퍼를 신고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나갔다. 하지만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탄 것일까..
서둘러 다시 아파트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난 곧장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며..떠나기 전에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가는 동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메모의 말대로 아내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타들어가는 마음..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원망스럽게도 오늘따라 신호는 왜 이렇게 걸리는지.. 차는 왜 이리 막히는지 평소보다 이십분이 더 걸려서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는 벌써 출발했을까..
난 해남 행 버스가 출발하는 곳으로 미친 듯이 사람들 속에서 아내를 찾았다.
혹시라도 아내가 아직 있을까봐.. 내가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과 달리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역시나 이미 가버린 것일까..내가 늦은 것일까..
“하아.....”
답답함에 깊은 한숨이 튀어 나온다. 그렇게 늦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늦었다니..
그 순간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는다.
누구지...?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아내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은주야...”
“왔네..혹시나 올까봐 기다렸는데..”
“너...”
아내를 보자마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내의 모습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게 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울지 마.. 나 그리고 이제 가 봐야 해..”
“무슨 소리야. 기다렸다며..”
“그런 메모 써 놓고 이런 말 하면 진짜 웃긴 거 아는데 그냥 가기 전에 오빠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갔으면 싶어서 그래서 기다린거야. 버스 시간 10분밖에 안 남아서 이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딱 오네..”
“은주야. 잠깐만..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러지마..응?”
“오빠...”
“어....?”
“나도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뭘 잘못한지 알아? 이렇게 묻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지금은 묻고 싶네.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여자에게 사랑했다고 말한 거 그거 거짓이었던 거야? 오빠 그렇게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는 사람 아니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나 처음 사귈 때 오빠가 말했잖아. 난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는 사람 아니라고. 그래서 너한테도 사랑한다는 말 정말 아껴서 할 거라고..그렇게 나한테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어....기억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아주 선명하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대로 난 사랑해 라는 말은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신조로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 맘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랑해 라는 말을 써본 건 내 인생에서 정말 몇 안 되는 순간이었고..
그리고 얼마 전 정희씨에게 사랑해 라는 말을 한 사실.. 정희씨의 앞에서..그리고 정희씨와의 카톡에서도 그 말을 주고받은 걸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란 놈은...끝까지 어쩔 수 없구나..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돼, 안 돼 할 수 없는 거잖아. 정말 오빠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빠의 마음대로 그렇게 움직이진 않았겠지..사랑이라는 거 한 번 빠져들면 나올 수 없는 그런 거니까..그래서 시간을 좀 갖자고..나에게도 오빠에게도 생각할 시간이란 게 필요할 테니까..”
“그러다 내가 널 놓아버리면....”
진심이 나와 버렸다. 정희씨를 좋아하는 내 맘도 이미 너무나 커져 버렸기에..
해서는 안 될 말을 다시 아내의 앞에서 해버렸다.
그런데 아내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오히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오빠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오빠를 놓치고 싶지 않지만..오빠가 너무나 내 옆에 있어줬으면 싶지만..그렇다면..받아 들여야지...”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뺨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아내의 손이 내 손을 빠져 나간다.
지금 이 손을 놓으면 영영 다시는 아내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내가 점점 나에게서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데..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붙잡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새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며 버스를 올라타는 아내의 모습..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지금 내가 다시 한 번 붙잡는다면 아내가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는데..
선택, 붙잡을 수 없는 선택.. 난 그 선택을 해버렸다.
거짓된 마음으로 아내를 붙잡는다면 더욱더 힘들어질 걸 알았기에..
나에게서 멀어지는 아내를 놓아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돌아온 집 안..분명 아침까지 있던 아내였는데 어디에도 더 이상 아내가 없다.
침대에는 아직 아내의 체취,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아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거짓말처럼 신기루처럼 아내가 사라졌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아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내 손으로 붙잡지 못한 아내인데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아내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다는 이 순간이..
웃음이 튀어 나온다. 헛웃음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내의 말처럼 난 어쩔 수 없이 정희씨를 본 그 순간부터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확실한 건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정희씨에게 빠져들지 않았을 거란 확신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되돌린다고 해도 빠져들겠지..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
난 조금의 손도 까딱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저 멍하니 하루 종일 쇼파에 앉아 있었다.
완전한 정적을 느끼며..
어느새 어두워져 가는 주변..불을 켜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사방에 어둠이 밀려오고 집 안이 너무나 깜깜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싫지 않다. 뭔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
하루 종일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그런 기분이다.
고개를 흘깃 돌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지나있다. 이렇게 하루가 가버린 것인가..
내 연차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날아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정희씨가 떠오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 하려 노력해보았지만 역시나 힘들고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지금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게 정희씨였다.
나란 인간은 정말...
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정희씨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정희씨에게 연락을 해버렸다.
고작 하루만에..내가 직접 설명해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놓고..
난 지금 아무 것도 설명해 줄 수 없는데..참지 못하고 그렇게 연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민수씨?”
“네...”
“벌써 생각할 시간 끝난 거에요? 어제는 엄청 걱정스런 목소리로 기다리라 그러기에 난 빨라도 일주일..어쩌면 한 달은 못 볼지도 모를 거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뭐에요..”
정희씨의 목소리가 장난스럽다. 고작 하루도 못 참고 연락할 거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 거냐고..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지금 너무 위로를 받고 싶은데..정희씨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 정희씨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그리로 지금 가도 돼요?”
“지금이요...? 늦었는데...난 괜찮은데..민수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그리로 갈게요...”
“알았어요..”
난 정희씨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정희씨의 집으로 출발했다. 이제는 몇 번을 가서 익숙한 그 곳으로..
차에서 내리는데 정희씨가 집 앞에 나와 있다. 그 날의 귀여운 잠옷과 달리 예쁘장한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왜 기다렸어요. 내가 내리면 연락할 텐데..”
“걱정되니 그렇죠...”
정희씨가 내 품에 안겨온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희씨의 체온..
얼마나 날 걱정을 했을까.. 갑자기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선 무작정 기다려 달라 했으니..
그리곤 다시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뜬금없이 찾아온다고 했으니..
정희씨는 한참을 내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았고, 난 겨우 정희씨에게 괜찮다는 말을 계속해서 정희씨를 내 품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에요..?”
“네..그럼요...”
정희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난 어딜 가나 이렇게나 여자를 울리고 다는 운명인가..
순간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튀어 나왔고, 난 정희씨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라...너무 깔끔한 거 아냐..”
“오늘은 미리 정리 좀 했죠..온다고 미리 말해서..”
“안 그래도 되는데...”
“에이..그래도 여자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솔직히 실망했잖아요. 그때 그런 눈치가 조금 보이던데..”
“아니에요..정말...아..내가 오다가 편의점에서 와인 하나 사 왔는데 술 괜찮아요..?”
“술이요? 어쩐 일로 술을 다 마시자고..”
정희씨와 첫 데이트에서 간단하게 한 잔 하고 이번이 두 번째이니 꽤나 오랜만에 술을 권해서 그런지 정희씨는 놀란 눈치였다.
“정말 무슨 큰 일이 있나 봐요..술 마시고 이야기해야 할...? 알았어요 마셔요..”
정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가지고 왔고, 난 정희씨의 잔에 와인을 조금 따라주고 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어..무슨 와인을 그렇게 마셔요..”
그렇지. 와인을 이렇게 우스운 모습으로 원 샷 하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었다.
난 정희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정희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거푸 와인을 연속으로 마셔댔다.
알딸딸한 기분.. 슬 취기가 올라온다. 아까 편의점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와인을 사와서 그런지 고작 6~7잔정도 마신 거 같은데 머리가 살짝 빙글 도는 것 같다.
“계속 술만 마실 거 에요...?”
정희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분명 무슨 말을 할 거 같은데.. 그것도 중요한 말을..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으니 이런 내가 답답하겠지..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다.
난 연거푸 와인 3잔을 더 들이켰고,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민수씨 많이 취한 거 같아..누울래요?”
“아니..나 괜찮아요..나 이제 이제는 말해야 할 거 같아요..정말.. 더 이상 숨기면 안 될 거 같아..”
“............”
정희씨가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리.. 난 지금 이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한다.
“나...나.....하아...나 유부남이에요..”
“알아요..그럴 거 같았어..”
“네...? 알았다구요...?”
난 순간 술이 완전히 깨는 듯 했다. 내가 유부남이란 걸 알았단 말인가..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인가...
정희씨는 그 말을 하고도 표정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너무나 담담했다.
“그냥..나도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혹은 여자의 촉감이라고 할까..결혼을 하신 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어요. 그 날 우리 집에서 새벽까지 있다가 나간 날..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 어제 전화로 나중에 모든 사실을 말해준다고 할 때 거의 확신을 했어요. 결혼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런데...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사기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내가 밉지 않아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겠죠. 나도..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연애를 좀 해봤지만 유부남을 만난 건 처음이니까요. 그리고 백프로 유부남이란 걸 알고 처음부터 만난 건 아니었으니까.. 어느 순간 유부남이면 어쩌지란 생각과 함께 민수씨를 밀어내야 하는 생각을 했는데..사람 맘이란 게 그렇지 않잖아요. 내가 싫어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밀어내려 해도 자꾸만 민수씨가 더 마음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솔직히 좀 힘들기도 했는데..어느 순간 그냥 받아들였어요. 유부남이면 어떠냐..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고..끝내는 게 후회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희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려왔다. 창피함..부끄러움의 눈물..
난 나란 인간의 바닥은 정말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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