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비밀연애3-외전(여자관점) (3)
바람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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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전
7. 그 남자, 정우
정우 씨를 처음 만난 건 강남역 근처 호텔 커피숍이었다. 엄마가 고른 장소였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이십 분 일찍 와 있었고, 내가 들어서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무릎으로 테이블을 쳤다. 물잔이 흔들렸다. 그가 당황해서 냅킨으로 테이블을 닦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요."
서른다섯. 지방 혁신도시에 있는 공기업의 설비 엔지니어. 경상도 소도시에서 나고 자라, 대학도 그 근처에서 나왔다고 했다. 말투에 사투리가 조금 묻어 있었는데, 서울말을 쓰려고 애쓰는 게 보여서 그게 오히려 귀여웠다.
그는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 카페인이 몸에 안 받는다고, 유자차를 시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칫했다. 이 사람도 무언가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대화는 서툴렀다. 그는 질문을 하고 나서 내 대답을 끝까지 기다렸다. 중간에 끼어들지도, 자기 얘기로 돌리지도 않았다. 내가 회사 얘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고,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솔직하게 "그건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었다. 아는 척하지 않는 남자. 그런 사람을 오랜만에 봤다.
헤어질 때 그가 말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는 말을 잘 못해서, 지루하셨을 수도 있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떨림도 없었다. 그게 그날 내가 느낀 전부였다. 편안함과 떨림 없음.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지 알 수 없었다.
그 후로 그는 주말마다 KTX를 타고 올라왔다. 두 시간 반.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다음엔 제가 내려갈게요, 했더니 그가 손을 저었다. 서울 구경하는 게 좋다고.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고 공기가 탁하다고 했다. 그래도 매주 올라왔다.
그는 데이트 코스를 미리 공책에 적어왔다. 진짜 공책이었다. 스프링 노트에 볼펜으로 식당 이름, 주소, 대표 메뉴, 예상 대기 시간까지. 그걸 들킨 날 그는 귀까지 빨개졌다. 나는 웃다가, 갑자기 목이 메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다는 게.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게 아무 죄도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게.
평일 저녁이면 그는 사진을 보내왔다. 숙소 창문 너머의 노을, 공장 굴뚝 위로 걸린 달, 퇴근길 논두렁에 앉아 있는 왜가리. '여기는 하늘이 넓어요.' 그런 문장과 함께.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며 그 사람의 방을 생각했다. 그리고 죄책감에 휴대폰을 엎었다.
그 사람과는 여전히 만나고 있었다. 정우 씨를 만나기 시작하고도 두 달 동안, 화요일과 목요일은 바뀌지 않았다. 토요일에 정우 씨와 유자차를 마시고, 화요일에 그 사람과 박카스를 나눠 마셨다. 그 두 개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주일 안에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그런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토요일, 정우 씨가 우리 동네 앞 공원까지 바래다주었다. 한강 공원. 그 사람과 비를 피해 뛰었던 그 길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정우 씨가 돌아봤다.
"왜요? 다리 아파요?"
"아니요. 그냥…… 여기 오랜만이라서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처음이었다. 그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었다. 설비를 만지는 손. 그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 목요일은 안 될 것 같아요.' 이유는 쓰지 않았다. 그도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청혼은 만난 지 넉 달째, 첫눈이 오던 겨울에 받았다. 그의 혁신도시 숙소 근처,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를 자기 동네에 데려간 날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얼어붙기 시작한 저수지 가장자리가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사진으로만 보내주던 그 넓은 하늘이 머리 위에 있었다.
그는 반지 상자를 꺼내다가 떨어뜨렸다. 풀숲에서 그걸 둘이 같이 찾았다. 찾고 나서 그가 무릎을 꿇었는데, 바지에 흙이 묻어 있었다.
"저는 말을 잘 못해요. 그래서 짧게 할게요. 지은 씨 옆에 있으면, 제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멎었다. 언젠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했던 말과 너무 닮아서. 과장님이랑 있으면 제가 좀 괜찮은 사람 같아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결국 괜찮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이 사람도 나 때문에 그렇게 될까 봐, 나는 무서웠다.
그런데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났다. 정우 씨는 그 눈물이 기쁨인 줄 알고 나를 꼭 안았다. 그의 가슴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어머니가 빨래를 해주시는 집의 냄새. 반은 기쁨이었다. 나머지 반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날 그의 품 안에서 끝내 이름 붙이지 못했다.
8. 막간 — 남편의 숙소
(이 장은 정우의 시점에서 적는다.)
혁신도시의 사택은 열두 평이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2구짜리 인덕션. 결혼 전과 달라진 건 책상 위 액자 하나와, 냉장고에 붙여둔 아내의 손글씨 메모 한 장뿐이었다. '밥 거르지 마요. 금요일에 봐요.'
정우는 퇴근하면 그 메모를 먼저 봤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저수지 쪽 하늘을 찍었다. 신혼 첫 달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은 일이었다. 아내가 처음 만났을 때 하늘 사진이 좋다고 했으니까. 정확히는 "하늘이 넓어 보여서 좋아요"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서울에서 사는 사람은 하늘이 좁다고 느끼는구나. 그렇다면 자기가 보내주면 되겠다고, 정우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주말부부는 그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아내가 서울 회사에서 쌓아온 것들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사업계획서 얘기를 할 때 눈빛이 달라지는 걸 정우는 봤다. 그 눈빛을 지방 사택의 열두 평에 가둘 자신이 없었다. 2년만, 2년만 버티면 본사 순환 근무로 서울에 올라갈 수 있다. 그때까지는 금요일 밤 KTX가 우리 집이라고, 그는 동료들에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아내는 좋은 사람이었다. 정우는 그걸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에게 먼저 전화하는 며느리, 그의 서툰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금요일 밤 서울 집 현관을 열면, 식탁 위에 늘 그가 좋아하는 반찬이 있었다.
다만 가끔, 아주 가끔, 정우는 아내에게서 어떤 거리 같은 걸 느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녀가 다른 방에 있는 것 같은 순간. 그녀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정했고, 조심스러웠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정우는 가끔 자신이 무언가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서울 집 냉장고 안쪽에서 박카스 두 병을 발견했다.
"당신 이거 마셔요? 박카스만 마셔도 얼굴 빨개진다며."
아내는 설거지를 하다가 잠깐 손을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아, 그거. 회사에서 받아온 거예요. 버리기 아까워서."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는 그 대답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밤, 아내가 잠든 얼굴을 오래 봤다. 자는 동안에도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애쓰게 만드는 걸까. 그걸 물어볼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물어보면 무언가가 끝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녀가 대답하기 어려워할까 봐.
일요일 저녁, 서울역 플랫폼에서 아내는 늘 열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끝까지. 정우는 창가 자리에서 그 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봤다. 끝까지 남아서 손을 흔드는 사람. 그게 그가 아내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몰랐다. 그 사람이 끝까지 남는 이유가, 어떤 자리에서는 외로움 때문이라는 걸.
수요일 밤, 정우는 사택 침대에 누워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하늘. 별 많아요.' 저수지 위로 흐릿한 은하수가 찍힌 사진이었다.
답은 오지 않았다. 열한 시에도, 열두 시에도. 정우는 아내가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두고 잠들었다.
9. 수요일의 아내
이듬해 봄, 나는 결혼했다.
청첩장을 돌리던 날, 그의 자리에도 한 장을 놓았다. 다른 사람들 것과 똑같이, 봉투에 이름만 적어서. 손이 떨리지 않게 하려고 아침에 청심환을 먹었다. 그는 축의금을 다른 동료들 것과 섞어서 보냈다. 봉투에는 팀 이름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봉투를 찾지 않으려고 애썼고, 결국 찾았다. 액수는 남들과 같았다. 그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축하라는 걸 알았다.
결혼식장에서 신부 대기실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오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버진로드를 걸어 들어가는 동안, 나는 하객석의 얼굴들 사이에서 그를 찾고 있었다. 아빠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빠는 내가 긴장한 줄 알고 내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정우 씨가 단상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앞에 서자 그가 아주 작게, 나만 들리게 말했다. "예뻐요." 그 말에 나는 웃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생각했다. 예뻐서, 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코인노래방의 분홍색 조명을.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팀마다 초콜릿 상자를 돌렸다. 그의 팀 상자는 내가 직접 가져가지 못하고 후배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들었다. 그 팀 사람들이 다 나눠 먹었는데, 과장님만 한 조각도 안 드셨다고.
주말부부가 되었다. 정우 씨는 금요일 밤에 올라와 일요일 저녁에 내려갔다.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이 부럽다고 했다. 주중엔 자유고 주말엔 신혼이네, 하고.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등 뒤에서 누군가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았다.
신혼집은 투룸이었다. 정우 씨가 고른 집이었다. 창가 화분은 다섯 개로 늘었다. 정우 씨 어머니가 보내주신 것들이었다. 냉장고 문에는 고향 부모님 사진 옆에 웨딩 사진이 붙었다. 사진 속의 나는 아주 잘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게 무서웠다.
평일 밤이 문제였다. 정우 씨가 없는 집은 너무 조용했다. 원룸보다 넓어진 만큼, 혼자 있는 시간도 넓어졌다. 정우 씨는 매일 밤 하늘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매일 밤 그 사진에 하트를 눌렀다. 그리고 매일 밤, 휴대폰 연락처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열었다가 닫았다.
석 달을 버텼다.
그 수요일은 비가 왔다. 퇴근길 회사 로비에서 우산을 펴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그를 봤다. 그는 우산이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가 회전문을 밀고 빗속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나는 끝까지 봤다. 셔츠 어깨가 순식간에 젖었다. 처음 그를 내 방에 들였던 날의 셔츠처럼.
집에 와서 젖은 신발을 벗기도 전에,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시간 돼요?'
2년 동안 수없이 보냈던 문장. 반년 넘게 보내지 않았던 문장. 보내고 나서 나는 현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취소하고 싶었다. 취소 버튼 위에서 엄지가 떨렸다. 그 순간 '1'이 사라졌다.
'지금 갈게요.'
그 답이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십 초였다. 나는 그 사십 초 동안 정우 씨의 얼굴을 떠올렸고, 시어머니의 화분을 떠올렸고, 웨딩 사진 속의 내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면서도, 일어나서 욕실로 가 머리를 빗었다. 이번에는 립밤을 발랐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었다.
그는 젖어 있었다. 반년 만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을 꺼내도 나머지가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
그가 현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고,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그 소리가 신호였다.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쌌고, 나는 발끝을 들었다. 신발도 다 벗지 못한 채였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간단히 접힐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의 입술은 그대로였다. 숨이 닿는 거리도, 손이 허리를 감는 방식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떨림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이건 안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그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는 거실을 지나 침실로 갔다. 정우 씨와 함께 고른 침구 위로. 나는 그 생각을 했다.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지웠다.
예전처럼 뜨거웠다. 아니, 예전보다 더. 반년 동안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나는 그의 등에 손톱을 세웠고, 그는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결혼한 여자의 이름. 그게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정우 씨가 내려가 있는 평일, 한 달에 두어 번. 대개 수요일이었다. 그 사람이 오는 날이면 나는 냉장고 문의 웨딩 사진을 뒤집어 붙여두었다가, 그가 가고 나면 다시 바로 붙였다. 그 동작 역시 기도 같았다. 다만 무엇을 비는 기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과장님이랑 있으면 제가 괜찮은 사람 같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제 거짓말이 될 테니까. 그도 더 이상 내 보고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을 줄였고, 대신 서로를 더 오래 안았다. 말이 줄어든 자리를 몸이 채웠다. 그게 사랑인지, 사랑이 남긴 습관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그의 등을 보며 나는 물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럴까요?"
질문이었다. 그에게 하는 질문이었고,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었고, 어쩌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나는 그 등을 끝까지 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그리고 그 문이 닫히는 순간 알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걸. 끝이라는 대답도, 계속이라는 대답도, 나는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10. 다음 주 수요일
일요일 저녁, 서울역 플랫폼에서 정우 씨가 말했다. 열차 출발 오 분 전이었다.
"아, 맞다. 본사 순환 근무 신청한 거, 내년 봄으로 확정됐어요."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고 있었다. 오래 숨겨두었다가 꺼낸 선물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주말부부 끝이에요. 그러면…… 우리 아기 얘기도, 좀 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웃었다. 정말로 웃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잘됐다고,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열차에 올라 창가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고, 나는 열차가 작아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끝까지.
열차가 사라지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플랫폼에 서서, 나는 달력을 떠올렸다. 내년 봄까지 남은 수요일을 세었다. 손가락이 모자라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월요일에 회사에서 그를 봤다. 회의실에서, 늘 그렇듯 눈이 마주쳐도 웃지 않았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 서류를 챙기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 눈 속에서 반년 전 비 오던 수요일의 얼굴을 봤다. 그는 아직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몇 해 전 편의점 형광등 아래서처럼, 무언가를 알아챈 얼굴로.
나는 그게 사랑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것도, 나의 것도.
화요일 밤, 정우 씨가 하늘 사진을 보냈다. '서울 올라가면 이제 이런 하늘 못 보겠네요. 그래도 당신이 있으니까.'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결국 하트 하나만 눌렀다. 그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말을 아끼고, 이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말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되었을까.
수요일이 왔다.
퇴근길, 나는 일부러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걸었다. 원룸 시절 살던 동네를 지나갔다. 그 편의점이 그대로 있었다. 형광등도 그대로 밝았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박카스 한 병을 샀다. 계산대 직원이 봉투 필요하세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하고 병을 손에 쥔 채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았다. 그날 밤 그가 앉았던 쪽이 아니라, 내가 앉았던 쪽에.
병뚜껑을 땄다. 한 모금 마셨다. 금세 볼이 뜨거워졌다. 몇 년이 지나도 이건 변하지 않는구나. 나는 혼자 조금 웃었다. 저 거짓말 안 해요. 그렇게 말하던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그 여자를 지금의 나로 만든 데에, 그 사람의 몫은 얼마이고 나의 몫은 얼마일까. 계산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계산의 답이 무엇이든,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를 미워할 수 없는 만큼, 나 자신도 끝내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정우 씨가 서울로 올라오고, 수요일이 평범한 요일이 되고, 냉장고 안쪽에서 박카스가 사라지면. 아마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편의점의 형광등으로, 코인노래방의 분홍 조명으로, 비 냄새로, 반쯤 마른 셔츠로 기억할 것이다. 몸이 먼저 기억할 것이다. 반년 만에 문을 열었을 때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돌아갔던 것처럼. 십 년이 지나도, 그가 다시 내 앞에 서면 나는 아마 또 문을 닫지 못할 것이다.
그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게, 아주 조금, 위안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두 개의 알림이 거의 동시에 떴다.
하나는 정우 씨였다. '오늘 하늘. 노을이 꼭 당신 볼 같아요.' 주황색으로 물든 저수지 사진.
다른 하나는, 아직 열지 않았다. 미리보기에는 세 글자만 보였다.
'오늘 시간'
나는 박카스 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병이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미지근해졌다. 편의점 형광등이 깜빡였고, 길 건너편 건물 2층에서 코인노래방 간판이 분홍색으로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두 개의 알림 위에서, 엄지가 멈춰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을 먼저 열게 될까. 그리고 어느 쪽에 먼저 답하게 될까.
병 안에는 아직 박카스가 반쯤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반을 마저 마시지 않았다. 아직은, 다 마셔버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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