넣어 키운 걸그룹 1 (매우 장편 주의)
멍멍이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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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22:44
넣어 키운 걸그룹 1-370 완결 및 후기
프롤로그
연간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의 수는 남녀를 통틀어 40~70여 팀.
그 중에서 2년 후까지 활동하는 팀은?
많이 잡아야 1할 정도 될까?
앨범 녹음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치고 데뷔를 코앞에 뒀던 팀이라고 해도 무기한 연기 될 수 있는 게 바로 아이돌의 세계이다.
그럼 뜨지 못해서 활동을 접은 90% 이상의 친구들은 어떻게 될까?
그 중 일부만이 연기나 예능 등의 다른 분야로 도전을 할 것이고, 대부분은 꿈에서 깨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쉬운 부분은 후자 쪽에서 발생한다.
실력이나 끼가 없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겠지만, 그 중에는 분명 대스타로 발돋움할 가능성을 지닌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된 아이돌 그룹이라면 스타성을 가진 아이가 한명 이상은 확실하게 끼어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내 눈에는 그게 보이니까.
감이나 촉 따위의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누가 연예인의 재능을 타고 났는지가 실제적인 빛의 파장―아우라로 보인다는 뜻이다.
파란색은 가수.
빨간색은 연기자.
노란색은 예능 쪽의 스타성을 보여준다.
요즘에는 분야별 벽이 허물어져서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색을 동시에 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그런 공상을 하고는 한다.
내가 만약 이 능력을 이용해서 걸그룹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멤버 전체가 얼굴 되고 몸매 되고 노래, 춤, 예능, 연기까지 모조리 씹어 먹을 수 있는, 각 그룹의 센터 급들만 모인 걸벤저스.
왜 굳이 걸그룹이냐.
예쁘잖아?
걸그룹은 항상 옳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공상을 현실로 이뤘다.
내게 운명처럼 다가온 다섯 명의 소녀들을 ‘업키걸(업어 키운 걸그룹)’이란 이름으로 데뷔시켰고, 데뷔 3년차인 현재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탑 걸그룹으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녀석들이 내 상상에서처럼 모두 완벽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었지만 저마다의 확실한 개성과 팀으로서의 조화를 통해 성공을 일궈낼 수 있었다.
내가 한 일은 그들을 한 곳으로 모아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듬어준 것뿐이다.
물론 나도 발끈해서 유치하게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고 스트레스로 몸 져 누울 때도 많았지만 결국 쓰디 쓴 인내 끝에 맺힌 달콤한 열매를 따 먹은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실시간으로 함께하는 동안 나 역시도 한 차례 성장을 했다고 생각한다.
업키걸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나는 매니저에서 소속사 대표로 떡상했다.
내 이름 김윤호의 이니셜을 딴 YH엔터테인먼트의 공동대표―얼굴마담이자 신인개발팀장으로서 업키걸에 이은 두 번째 걸그룹을 준비 중이다.
현재 소속된 10여명의 연습생들 가운데 나와 떨어질 수 없는 특별한 운명을 가진 아이들은 두 명 뿐.
그들은 업키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보라색 아우라를 가졌으며, 보라색 아우라라는 건 내가 잡아주지 않으면 엇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물론 큰 걱정은 없었다.
미쳤다고 해서 업친녀, 망나니라 하여 업나니라 불리던 업키걸 다섯 명을 케어하며 노하우가 쌓였고, 무엇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급의 정보창이 있으니까.
문제 해결 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결국 정보창이 올바른 길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난이도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
―브으으
두 명의 아이 중 한 명에게 카톡이 왔다.
라희 [대표님 저 이번에 녹음한 거 평가해주세요8ㅅ8]
라희 [커피마실래(라희ver).mp4]
예라희.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지만 업키걸의 요나를 롤모델 삼아 기적처럼 재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비가 다시 시작됐고, 그 무렵 업키걸 팬 미팅에 참석해 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지만, 하반신 마비 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의지가 강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아이이다.
라희는 내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다리 마비야 내가 해결할 수 있고 가수로서의 재능과 성실함도 뛰어나니까.
문제는 이 놈이다.
할 얘기가 있다면서 연습생 주제에 대표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 새끼···.
“대표님.”
“왜.”
“저는 진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알아, 너 남자 좋아하는 거. 어디 남자만 좋아해? 술도 좋아하고 클럽도 좋아하지. 그 셋을 합치면 클럽에서 남자랑 술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한다는 건데··· 넌 뭐하는 놈이야? 연예계 복귀할 마음은 있어?”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란.
본명 이소란.
별명 망란이.
‘아이컨택’이라는 팀으로 데뷔를 했지만 보이그룹 멤버와 마약 복용 후 환각파티를 벌이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집행유예 2년 2개월을 선고받고 연예계에서 거의 퇴출당한 상태.
아이컨택 활동 당시에도 실력도 없이 스폰으로 연명하던 주제에, 불치병 중의 불치병이라 불리는 연예인병까지 처 걸려서 지랄옘병을 떨다가 암튼 시발 내가 이 새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움찔움찔 경기를 일으킨다.
그래도 처음에는 마음을 잡고 곧잘 따라오는가 싶더니 요즘에는 다시 도화살이 도졌는지 제멋대로 굴고 있는 중이다.
업키걸 애들은 얘에 비하면 천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칠 수가 없는 이유는 그놈의 보라색 아우라 때문이다.
“대표님.”
“아, 왜. 나 라희 녹음한 거 들어줘야 되니까 빨리 말하고 나가.”
“그놈의 라희, 라희, 라희. 라희한테 하는 거 반만큼만 저한테 해보세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야. 제발 라희 반만큼만 해라. 업고 다녀줄 테니까.”
“암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대표님 혹시 쎅 좋아하세요?”
“후우··· 니가 말한 쎅이 가방은 아니겠지.”
“예, 쎅쓰요, 쎅쓰으. 떡, 빠구리.”
발음 찰진 것 좀 봐라.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란아, 난 니가 정말 밉다.”
“나는 남자가 좋은 걸까, 아니면 쎅쓰가 좋은 걸까.”
“나랑 그거 상의하려고 온 거면 내 대답은 하나야. 썩 꺼져.”
“아뇨. 이 얘기하려고 온 건 아니고요.”
“그럼 할 얘기가 뭔데. 나 너랑 말장난할 생각 없으니까 본론만 얘기하라고.”
“저 그만 둘래요.”
“응?”
“연습생 안 할 거라고요. 다른 회사에서 계약하자고 연락 왔어요.”
“이야, 잘 됐네! 올해 들어, 아니, 니가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 한 일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그 회사 사람들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고.”
“참나. 대표님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후회? 무슨 후회?”
“저 다른 회사에서 잘 돼서 대세 되고 CF도 막 스무 개씩 찍고 그런 거 보면 배 안 아프겠냐구요.”
“배 아프기는. 그래도 한 때 내 새끼였던 애가 잘 되면 박수 쳐줘야지.”
“아뇨. 대표님은 분명 이렇게 생각하면서 후회하실 거예요.”
“무슨 생각.”
“내가 란이를 한 번 따먹기라도 했으면 이 정도까지 후회는 안 들 텐데. 원래 남자들이 여자랑 헤어지면 그게 제일 후회된다잖아요. 저 진짜 쎅 잘해요. 남자들이 그러는데 저 진짜 맛있대요.”
한 마디 한 마디에 태클 걸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짚고 넘어가야할지 모르겠다.
세상에 어떤 연습생이 회사 대표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가장 중요한 요점만 전달하자.
“아니. 후회 자체를 안 한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좀 다른 회사로 가달라고.”
“에이, 됐다···.”
“뭐가 됐는데.”
“그동안 대표님이 저 때문에 고생한 거 봐서 그냥 남을게요.”
항상 이런 식이다.
안 그만둘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고.
“아니, 가라고 제발. 나 좀 살려줘. 오늘은 클럽 안가냐? 너의 오빠야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가서 니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든 섹스를 하든 맘대로 해.”
“오늘은 그 컨디션 아니에요. 심심한데 연습이나 하러 가야겠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클럽, 심심할 때는 연습실로 향하는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까.
녀석은 “아이 러브 섹스.”라는 가사의 팝송을 흥얼거리며 대표실을 나갔다.
쟤가 다른 건 몰라도 섹스 발음 하나는 참 맛깔나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몇 개월 째 잠잠하던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
★예라희, 이소란과 함께 할 멤버를 모아 5인조 걸그룹을 제작하세요.
――――――
하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나머지 3명은 과연 어떤 희대의 망나니들일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울린다.
연습생 예라희(1)
“와아, 김윤호 대표님 실물이 더 잘생기셨어요.”
“아이고 민망하네요.”
“아니요, 진짜예요. 깜짝 놀랐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다음 달이면 꽃다운 나이 방년 38세.
한 달 모자란 38년을 살아오는 동안 못 생겼다는 말 보다는 잘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외모 칭찬을 받을 때면 여전히 표정이 어색해진다.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그럼요.”
하지만 사람들과 사진 찍어 주는 건 많이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표정도 어느 정도 각이 나온다.
연예인과 매니저의 케미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 ‘그림자의 빛’을 촬영하면서 단련된 결과였다.
나와 업키걸은 6개월 전에 하차했고 이제는 업키걸의 ‘뮤노 실장님’보다 YH엔터테인먼트 김윤호 대표라는 직함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얘기부터 꺼낸다.
업키걸의 첫 남미 투어를 위해 만난 에이전시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 여자 친구가 ‘그림자의 빛’ 광팬인데 제가 오늘 김윤호 대표님 미팅 있다고 하니까 사진 꼭 찍어오라고 하네요. 업키걸보다 대표님을 더 연예인처럼 생각한다니까요.”
인기가 대단하긴 했었지.
예능의 위력이라는 건 일반인도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어줄 정도로 대단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라는 말은 90년대에나 통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첫 회 방송이 나가자마자 그 다음날부터 세상이 바뀐 것이다.
방송이 나간 날만큼은 실검에 업키걸보다 내 이름이 더 많이 거론 될 정도였고, 거리에 나가면 초등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나를 알아보고는 휴대폰 렌즈를 들이밀었다.
뮤노 실장님 외에도 ‘츤장님(츤데레 실장님)’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을 받았다.
CF는 줄이고 줄여서 총 6개를 찍었는데 만약 들어오는 대로 다 찍었다면 스무 개 이상은 됐을 것이다.
유명세 때문에 사생활이 많이 침해 받긴 했지만 그래도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 업키걸은 미니앨범 1집 ‘바이올렛’과 ‘커피 마실래’의 연타석 히트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중이었다. 거기에 예능 대박까지 겹쳐버리니, 그때의 회사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에 매일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었다.
그때 로켓처럼 탄력 받은 인기는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제는 걸그룹 중에서는 라이벌이 없을 정도의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탑 걸그룹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림자의 빛’을 주제로 가볍게 시작된 남미 투어 미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던 중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브으으, 브으으으
업무용과 개인용 중, 개인용 폰이었다.
발신자는 ‘연습생 라희’.
다른 전화였다면 회의 중 메시지를 보내고 미뤘겠지만 라희 전화는 바로 받아야 한다.
“죄송합니다. 급한 전화라서···.”
“예, 예.”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염 대표랑 계속 얘기 나누시면 됩니다. 어차피 저는 바지 사장이고 염 대표님이 실세거든요, 하하하.”
“그럼 잠깐 끊었다 가죠. 혹시 담배 태우시는 분 계십니까.”
나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염대수가 흡연 포즈를 취하며 묻자 에이전시 사람 두 명 모두 선뜻 일어섰다.
염이 그들을 흡연지역으로 안내해서 나간 뒤 전화를 받았다.
“어, 라희야.”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 라흰데요.
내가 분명 라희야, 라고 먼저 아는 척을 했음에도 항상 자기 이름을 밝힌다.
우리가 알게 된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예의가 바른 아이다.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는 거고.
―혹시 오늘 출근 하셨나요?
“어, 나 지금 6층에서 미팅 중. 왜?”
―다른 게 아니라 저 안무 연습하는데 다리가 조금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요.
“아이고, 요즘 조금 잠잠하다 싶더니.”
―그러니까요···.
“A연습실이야?”
―예.
“미팅 끝나려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마비 시작됐어?”
―아, 아뇨. 아직은 괜찮아요. 30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미팅 끝나고 갈 테니까 숙소에 먼저 가 있어. 혹시라도 안 좋아지면 바로 전화하고.”
―예, 알겠습니다. 회의 잘 하세요.
“그래~”
라희는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예감이 영 안 좋다. 그리고 ‘보라색 아우라’를 가진 녀석들에 대한 불길한 예감은 거의 100% 확률로 정확하다.
나는 염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서 양해를 구한 뒤 9층 연습실로 향했다.
라희가 있다던 A연습실 문을 열자 화장품 향과 땀 냄새가 섞인 안무실 특유의 후끈한 열기가 훅 밀려왔다.
안무 연습에 열중하던 일고여덟 명의 여자 연습생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내게 인사를 건넨다.
“어, 대표님이다!”
“안녕하세요오!”
업키걸 아이들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성격상 권위적인 걸 싫어해서 연습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다.
허물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담당 실장이나 직원들보다 나를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야, 너네 연습 중에는 회사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도 끊지 말라고 배웠어, 안 배웠어?”
“저희한테는 하나님보다 뮨댕댕 대표님이 더 높은데요?”
녀석들은 늘 그랬듯 말대꾸에 이어 칭얼칭얼 볼멘소리를 시작했다.
“대표님, 배고파요!”
“저희 아침에 방울토마토 몇 개 먹고 지금까지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응. 물 마셔, 물. 원래 땀 흘린 뒤에는 물이 제일 맛있는 거야.”
“물 배 채우는 것도 이제 지겨워요오오! 두툼하게 씹히는 거 먹고 싶어요!”
“닭 가슴살 먹어. 냉장고에 꽉꽉 채워 놓잖아.”
“아아앙! 입에서 닭똥 냄새 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치킨은 잘도 먹겠지?”
“어어, 팩폭 자제 좀 요!”
아이들과 가볍게 대화를 하면서 면면을 쭉 살피는데 라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라희 어딨어?”
“아까 화장실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언제?”
“한 5분 쯤 됐나.”
“그래, 연습들 해라.”
라희를 찾기 위해 나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좀처럼 놔주질 않는다.
“아아, 대표님 저희 진짜 배고파요오오!”
“너네 나한테 음식 맡겨 놨냐?”
“어? 맡겨놓으면 주실 거예요?”
“와, 그럼 내일부터 치킨 사와서 대표님한테 맡겨놓으면 되겠다.”
하여튼 요즘 애들 말대꾸 스킬 하나는 기발하다니까.
“알았다, 알았어. 뭐 먹고 싶은데.”
“아싸! 피자요!”
“치킨!”
“부르스타에 갓 끓인 냄비 라면이요!”
“오케이. 먹고 싶은 사람들은 연습 끝나고 대표실로 와. 배 터지게 먹게 해줄게.”
“와, 진짜요?”
“응. 그 대신 연습생 포기 각서도 같이 써서 오는 거 잊지 말고.”
“에휴, 그럼 그렇지···.”
“아아앙, 나빴어요!”
“너네는 식단 조절 하나 못하는 애들이 무슨 데뷔를 한다고 그러냐. 그럴 거면 그냥 포기해. 포기하면 편하잖아.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
“대표님은 모르셔서 그래요. 저희 나이 때에는 노래랑 춤 연습보다 다이어트가 더 힘들단 말이에요.”
“모르긴 뭘 몰라. 업키걸 홍이 지옥의 다이어트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이 난데. 너네는 홍이만큼 하지 않는 이상 내 앞에서 다이어트의 디귿자도 꺼내면 안 된다니까.”
비단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연습생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우리홍 다이어트 썰이 나오자 일동 시무룩해졌다.
그 중에서 서아라는 녀석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근데 대표님. 홍이 선배님 데뷔 전에 진짜 90킬로그램이었어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죠?”
“응. 90키로는 아니었는데.”
“그쵸? 거봐! 얘가 자꾸 90키로였다고 우기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사람이 어떻게 두 달 만에 30키로를 빼냐고요. 3키로 빼기도 힘들어 죽겠···.”
“90키로 아니고 93키로였어.”
“헐, 대박···.”
“두 달 만에 정확히 31.3키로 뺐다. 이런데도 피자랑 치킨 얘기가 나와?”
“아니요···.”
“물 마실게요···.”
“그래. 열심히들 해.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아요. 게으름이 뒤통수 칠뿐이지. 스타라는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적당한 훈장질로 마무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니 잠깐.
망란이는 또 어디 갔어.
“란이 오늘 안 나왔어?”
라희 때와는 달리 단번에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들 서로에게 미루듯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 안 나온 거지 뭐.
망란이 놈은 일단 버린다.
라희부터 찾는 게 우선이다.
A연습실에서 나온 나는 보컬 연습실이 양옆으로 위치한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향하며 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내가 지나쳐 온 복도 쪽에서 라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우리 회사 내에서 요나의 솔로곡 ‘오픈’을 벨소리로 한 사람은 라희 밖에 없다.
하지만 보컬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사람 두 명이 들어가면 꽉 들어차는 보컬 연습실에는 문마다 작은 창이 달려 있어서 누군가 있었다면 스치는 곁눈만으로도 상반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바닥에 쓰러졌나?
나는 발길을 돌려 벨소리의 출처라고 생각되는 4번방 앞에 섰다.
역시 창문으로는 확인이 안 돼서 곧장 문을 열었는데.
“에이,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내 예상대로 라희는 바닥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하반신 마비가 이미 진행이 된 것이다.
바닥 쪽 바지주머니에 깔린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내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멋쩍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오오···.”
“넌 진짜··· 이 정도면 아까 전화했을 때 이미 심각했겠네. 맞지?”
“···대표님 바쁘신데 방해하는 것 같아서요···.”
이게 내가 라희의 전화만큼은 지체 없이 받아야 하는 이유였다.
평소에는 멀쩡하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하반신 마비가 불시에 발병되고, 마비 초기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경직과 경련 ―하반신 자체에는 감각이 없지만― 허리와 목 통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임에도 내가 곧장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건 병원에 가도 별 치료 방법이 없고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라희의 몸을 통째로 들어 올려서 의자에 앉혀주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수십 차례 반복했던 행동이다. 효과는 100% 확실하기 때문에 라희도 내 터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무릎 못 펴겠어?”
의자에 앉은 자세로 무릎이 뻣뻣하게 굽혀져 있기에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경직까지 진행 중인 것이다.
라희 앞에 양반다리로 앉은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신발과 양말부터 벗겼다.
찾았다.
다행히 양쪽 발등에 손톱 크기만 한 보라색 빛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라희를 포함한 그 어떤 누구도 이 반점을 볼 수 없다.
‘스타의 아우라’와 마찬가지로 오직 내 눈에만 보이고 오직 라희의 몸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표식이다.
적게는 1개부터 많게는 10개 이내까지 랜덤으로 나타나는데, 하반신 곳곳에 생기는 이 보라색 반점을 모두 찾아내서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주면 마비가 풀린다.
1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것부터 손바닥만 한 것까지 다양하고 발병 지점은 대개 발끝에서 허벅지 사이 어딘가이다.
여름철에는 주로 짧은 반바지를 입어서 바로 식별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처럼 긴 바지를 입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하의를 벗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만 민망해 했을 뿐, 내 행동에 그 어떤 흑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바지를 벗어도 크게 창피해하지 않았다.
마치 환부를 확인하고 치료하는 의사와 환자처럼 말이다.
라희의 작은 발바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엄지를 이용해 반점을 마사지했다.
둥글게 둥글게 꾹꾹, 둥글게 둥글게 꾹꾹, 문지르기를 10여초.
안쪽으로 굽어졌던 발가락들이 꿈틀꿈틀 거리며 경직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발등을 조금 아플 정도로 꾹 누르며 물었다.
“느낌 있어?”
“음······ 쪼금요.”
“무릎은 아직 안 움직이지?”
“네.”
발등에 나타났던 반점 두 개가 사라진 뒤에도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
그럼 다른 곳에 반점이 더 있다는 건데···.
굳이 말을 안 해도 되지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본인의 상태를 점검하는 라희에게 예의상 통보했다.
“미안한데 다리 좀 걷을게.”
“예.”
통이 넉넉한 트레이닝팬츠를 입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종아리와 무릎 위를 거쳐서 핫팬츠 라인까지 걷어 올리고 허벅지 뒤쪽까지 꼼꼼히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제2의 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엉덩이나 하복부 어딘가에 있다는 건가?
만약 그곳에 반점이 나타났다면 바지가 문제가 아니라 팬티까지 벗겨야 되는 수가 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연습생 예라희(2)
팬티를 벗긴다······?
라희는 내가 안마사처럼 손의 감각을 이용해서 마비의 원인이 되는 근육을 찾아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라희 입장에서는 굳이 팬티까지 벗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냥 손만 넣어서 만져보면 되니까.
나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해도 최후의 보루인 팬티를 건드리면 불쾌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굳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같은 남자끼리도 민감한 문제 아닌가.
나는 절대 그런 마음이 없지만, 만약 라희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는 나도 성적인 부분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래도 어쩌랴.
마비를 풀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는 것을.
“라희야, 혹시 속바지 입었어?”
“아뇨. 긴 바지 입을 땐 속바지 안 입는데··· 왜요? 아, 바지 벗어야 돼요?”
“어. 허벅지 위쪽에 복부나 엉덩이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만약 거기에서도 못 찾으면, 어······.”
“···패, 팬티도 벗어야 돼요?”
“아마도 그··· 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라희의 얼굴이 1초 만에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당연하다.
내가 지금 당장 사고가 나 의사 앞에서 바지를 깐다고 해도 속옷 상태라든지 위생 문제로 신경이 쓰일 텐데 라희는 오죽하랴.
하지만 녀석도 이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수긍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어쩔 수 없죠···.”
“미안해. 일단은 바지만 벗자.”
“예. 제, 제가 벗을게요. 잠깐만 딴 데 봐주세요오···.”
“어, 어, 그래.”
시선을 돌렸는데도 라희의 행동이 훤히 그려진다.
하반신 마비가 시작되면 바지 하나 벗는 것도 버겁다. 바지춤에 손을 넣고 낑낑거려보지만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자의로 엉덩이를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아이코오···.”
결국 라희는 답답하고 자조 섞인 한숨을 토해내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녀석은 수줍거나 부끄러울 때면 늘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버릇이 있다.
“아, 힘들다. 죄송한데 대표님이 벗겨주셔야 될 것 같아요. 제가 팔걸이 잡고 일어설 테니까 벗겨주세요오···.”
“오케이.”
“하나, 두울, 세엣···.”
“읏차.”
라희가 의자 팔걸이에 지탱해서 엉덩이를 떼는 순간, 나는 라희의 바지춤을 잡고 잽싸게 무릎까지 내렸······ 아뿔싸, 옘병!
이거 사뭇 큰일인걸.
나는 정확하게 바지만 잡고 기술적으로 벗기려고 했는데 팬티까지 딸려 나와서 허벅지에 보란 듯이 걸쳐진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평소 여자 바지를 벗겨봤어야 알지.
밴드에 푸마 로고가 박힌 에어리즘 재질의 베이지 컬러였다.
라희도 팬티가 딸려 내려온 것을 한 발 늦게 확인하고는 당황해서 ‘흐잌’하며 짧은 숨을 집어삼켰다.
“엄마야···.”
“어이고, 미안하다 야. 바지만 벗기려고 했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땐 결국 팬티도 벗었어야 될 운명이었다.
스치듯이 확인한 결과, 보라색 반점이 허벅지 안쪽 깊숙이, 정확하게는 음부와 허벅지가 구분되는 사타구니 국경지대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시야에서는 오른쪽이었고 크기는 종이컵 밑동 둘레만 했다.
그것이 음부와 허벅지를 가르는 라인에 정확하게 반씩 나눠서 걸쳐져 있는 것이다.
“근데 어차피 팬티는 벗어야 됐겠네.”
“아, 그래요···?”
“어. 왼쪽 허벅지 안쪽 부분을 마사지해야 될 것 같은데··· 어쩌냐.”
“아······ 어쩔 수 없죠 뭐··· 그럼 저는 그냥 눈 감고 있을 게요. 어차피 감각 없으니까 편하게 해주세요.”
불쾌해하거나 내 저의를 의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민망해 할까봐 배려해주고 있다. 이러니 내가 라희를 안 예뻐할 수 있겠냐고.
“미안해. 근데 어딘지는 확인했으니까 바지랑 팬티는 입어도 될 것 같아. 내가 입힐 테니까 아까처럼 잠깐만 일어서줄래?”
“예.”
“하나, 두울, 셋.”
“으힣.”
“오케이, 됐다.”
라희나 나나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각도 상 서로의 상체가 어스름하게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연히 아무 느낌이 없는데 ―보라색 아우라를 가진 녀석들에게는 웬만해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들지 않는다― 라희 녀석이 많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나저나 어휴, 힘들다.
좁은 공간에서 낑낑거렸더니 한 겨울인데도 땀이 나네.
나는 잠시 일어서서 허리를 폈다.
라희도 더웠는지 반질반질해진 이마를 손으로 훔치며 얕은 한숨을 흘렸다.
“아휴우······.”
“힘들지?”
“아니에요. 저보다는 대표님이 더 힘드시죠.”
나는 라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슬쩍 농담을 흘리며 분위기를 밝게 이끌었다.
“그래. 이런 거 잊으면 안 된다. 나중에 음방 1위하면 꼭 내 이름부터 말해줘야 돼.”
“예, 예. 무조건 1번으로 말할 게요.”
흐뭇한 마음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출입문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이 눈에 거슬린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복도 한복판.
A연습실에 있는 연습생들이 외출을 하거나 화장실에 가려면 무조건 이곳을 지나쳐야 하는데, 라희와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겠지.
그동안은 마비 전조 증상이 보이면 회사와 1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옮겨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애들 연습 중에 혹시 이쪽으로 나와?”
“어··· 예. 화장실 가는 사람 있죠. 전화 오면 보컬 연습실 안에서 받기도 하고요.”
“그럼 여기 있으면 안 되겠구나···.”
나는 짧은 고민 끝에 평소처럼 숙소로 이동하는 쪽을 택했다.
“라희야, 그냥 업혀. 조금 늦어지더라도 숙소로 가서 편하게 푸는 게 낫겠다.”
그러자 녀석은 묘수가 있다는 듯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바닥으로 내려가면 돼요. 앉아서 불 끄면 밖에서는 안 보여요.”
“그래?”
“예.”
라희는 직접 시범을 보이려는 듯 의자에서 그대로 미끄러지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어잇.
당연히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공간이 너무 좁은 탓에 라희의 얼굴이 내 하복부 바로 정면에 위치하며 애매한 각도가 나와 버렸다.
로블로를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움찔 엉덩이를 뒤로 뺐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확 내려와서···.”
“아니야, 아니야. 불 끄면 되지?”
“예.”
민망한 마음에 얼른 전등을 끄고 라희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음, 밖에서 안 보일 것 같긴 하다.”
“절대 안 보여요.”
“많이 해봤구나?”
“예··· 이렇게 숨어서 실장님들 몰래 과자 같은 거 먹거든요.”
“아무리 단속을 한다고 해도 꼼수는 어디든 존재하는구나.”
“아. 제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요. 모른 척 해주세요오···.”
“알았어. 모른 척 할게.”
실외로 나 있는 창문이 없어서 대낮인데도 컴컴하다.
출입문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자연광으로 서로의 실루엣을 간신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래봤자 거의 붙어 있기 때문에 확인할 것도 없었지만.
“내가 편한 쪽으로 자세 잡는다?”
“예.”
라희가 하체를 못 쓰기 때문에 내가 인형을 만지듯이 하나하나 자세를 잡아줘야 했다.
일단 벽에 등을 기대게 하는 좋을 것 같아서 라희의 겨드랑이 사이에 양팔을 끼웠는데···.
“아끄아잌!”
라희는 내가 어떻게 잡아줄 틈도 없이 갸르륵 갸르륵 몸을 뒤틀며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머리를 콩 부딪쳤는데도 웃음이 터져서 아픈 줄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 라희 간지럼 많이 타는 구나.”
“예헤헤에, 저 겨드랑이 간지럼 엄청 타요오. 하체에서 느껴져야 될 게 다 위로 올라왔나 봐요.”
“그럴 리가 있나.”
“진짜예요호옼. 저 발바닥은 간지럼 안 타잖아요.”
“하긴. 그럼 니가 손으로 바닥 짚어서 움직일 수 있어? 벽에 등을 기대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예, 제가 할게요. 응차···.”
라희는 팔 힘만으로 일어서고 몸을 뒤틀어서 벽에 등을 기댔다.
“자리가 너무 좁다, 그치?”
“예, 하이고. 됐어요.”
“보자··· 왼쪽 허벅지였으니까 다리를 어깨 너비로 펴서 조금 벌리고··· 이렇게. 아, 근데 내가 자세가 안 나오는구나. 니가 차라리 나한테 기대볼래? 팔베개 하는 것처럼 이쪽으로, 이렇게···.”
“예, 예. 이렇게요.”
“옳지, 자세 나왔다. 이제 바지에 손 넣을게. 미안.”
“예. 대표님 편한 대로 하세요오···.”
“미안한데 다리 쫌 만 더 벌려볼래?”
말을 해놓고는 아차, 라희는 스스로 못 움직이지. 바로 말을 정정했다.
“내가 할게.”
“예에···.”
공원 벤치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처럼, 왼쪽 품으로 라희의 어깨를 감싸 안은 뒤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추리닝 허리 고무줄과 팬티의 탄력 에너지를 극복하고 최소한의 거리와 면적으로 목표지점까지 한 번에 쭈욱··· 아, 털.
손날 부근에 털로 의심되는 보드라운 보푸라기 더미가 닿았다.
그래, 아마도 털일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이 자리에 털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다면 더 이상한 거지.
라희도 털이 있구나.
나이가 몇인데 당연히 있겠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보드랍고 폭신한 털이었다.
아니, 아니.
잡생각 그만하고 집중! 집중!
털에 빼앗겼던 신경을 다시 손끝에 집중해본다.
보자, 아마 이 부근이었지······.
서늘하게 땀이 배어나와 있는 사타구니 사이를 중지와 약지로 누르고 포지션을 잡았다.
그런데 최대한 안 닿으려고 노력 해봐도, 바깥쪽 손바닥의 반 정도가 털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새끼손가락 인근으로는 도톰한 음부의 굴곡마저 느껴진다.
어쩔 수 없다.
불가항력이고 현상일 뿐이다.
중요한 건 내 의도겠지.
내가 라희에게 불순한 마음을 전혀 갖지 않고 있으니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
그 흔한 발기조차 되지 않고 있으니 심신 모두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것이다.
라희는 골반 밑으로 감각이 없어서 내 손길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서로의 호흡까지 들릴 정도로 밀착돼 있기 때문에 라희 입장에서는 자세만으로도 많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상체는 거북목 자세로 딱딱하게 굳었고 두 손은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가슴 앞에서 주먹을 말아 쥔 채 달달달 떨고 있다.
감싼 어깨와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심장박동도 꽤나 요란스럽다.
아마 내 심장박동도 라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겠지.
나는 아까 발등을 지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타구니 사이를 시계방향으로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시작했다.
“라희야.”
“예에···?”
“숨은 쉬어도 돼. 너 지금 숨 너무 오래 참고 있는 거 같은데.”
“아··· 예. 후우우웋···.”
라희의 한숨 속에 달달한 복숭아 향이 훅 섞여 나온다.
“껌 먹었어?”
“아뇨, 껌은 아니고 아까 마이쭈···.”
“입에서 복숭아 향 나길래.”
“아···.”
“힘들지? 1분 정도만 참아.”
“예에···.”
그리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안무실에서 틀어놓은 음악의 베이스가 쿵쿵 울린다. 덕분에 서로의 심장 소리가 묻혔다.
아무 말도 없으니 나도 좀 민망하네.
라희가 내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내 쪽에서 끊임없이 대화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아, 맞다. 란이 어디 갔어?”
“라, 란이 언니요?”
“오늘 연습실 안 나왔대?”
“아··· 저도 학교 끝나고 바로 회사로 온 거라서 잘···.”
연습생 예라희(3)
서울에 집이 있는 다른 연습생들과는 달리, 본가가 지방에 있는 라희와 란은 회사 앞 투 룸에서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굳이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듯이 둘의 라이프스타일과 성격은 완전 정 반대이다.
방도 따로 쓰고 서로의 사생활에는 터치를 안 한다고 한다.
그래도 1년 넘게 한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보다는 라희가 란이에 대해서 더 잘 알 것이다.
나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사타구니 지압을 이어나가며 라희에게 물었다.
“란이 걔 어제 연습 끝나고 숙소로 바로 안 갔지?”
“예에···.”
“클럽 갔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연습 끝나기 전부터 계속 누구랑 카톡을 하긴 했어요.”
“외박했지?”
“예···.”
“아침에 학교 갈 때까지 안 들어왔고?”
“예······.”
“하아, 진짜 그거 안 되겠네. 니가 볼 때는 란이 걔 어떠냐.”
“예?”
“실력도 없고, 의지도 없고. 과거는 노답이고, 이런 식으로 가면 미래는 더 노답이고. 니가 봐도 걔 가능성 없지?”
“아니에요. 그래도 란이 언니 나름 열심히 해요.”
“나름 열심히는 누구나 해. 근데 데뷔조에 들려면 나름 열심히 해서 안 된다는 거 니가 제일 잘 알잖아.”
블루메딕 후기작성시 10,000포인트 증정


시드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