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부부들 - 제 15화
처형Mandy봊이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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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간전
“.......”
컴퓨터 화면에 무수히 뜬 글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다. 은근히 나를 돌려 까던 대화, 그리고 두 사람이 손을 잡았음을 암시하는 말들까지. 잊으려 하면 떠올라서 나를 괴롭힌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출발은 내가 먼저 했고, 우리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나 때문이라는 것도. 그런데, 가슴은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이성이 “네가 먼저 망가뜨린 관계다”라고 속삭여도,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며칠 동안 수잔나에게 미안해서 더 잘해보려고, 마음을 다잡고 정성과 애정을 쏟아보려고 했던 그 시간과 노력이 한 순간에 부정당한 기분. 내가 만든 균열임을 알면서도,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기댔다고 생각하니 억울함, 질투, 분노가 몇 겹으로 밀려왔다.
“경률씨.”
“네, 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 팀장님이었다.
“미안한데, 그거 잠깐 중단하고, 능성테크에서 보내 온 수출 계약서 먼저 좀 번역해줘야겠어. 파일은 내가 메일로 보냈거든.”
“아....... 그래요?”
“응. 원래 그쪽이랑 합의한 납기는 내일 모레까지인데, 사정이 생겼나 봐. 내일 오후 4시까지 받고 싶대.”
“네, 알겠어요.”
“그리고 이건 그 업체에서 보내 온 자료야. 계약서상의 제품이 대형 장비다 보니까 사양서 번역할 때는 여기 적힌 전문 용어를 써서 해야 된대. 참고해서 작업해.”
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옆에 내려두었다. 긴급한 업무를 받았지만 도저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분초를 다투는 순간임에도 나는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서 사무실을 나왔다.
[Elina]
통화 목록을 찾아 눌렀다. 서너 번 정도 신호가 가다가 신호음이 끊기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률!”
엘리나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 기대고 싶었고, 보고 싶었다.
“출근 준비 잘 하고 있어?”
“응. 아침 먹고 조금 이따가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랬구나.”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네 남편, 내 마누라랑 단둘이 술 먹고 손도 잡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들어갔다. 말해본들 뭐하겠는가? 엘리나랑 나는 더한 짓도 했는데.
“저녁에....... 잠깐 볼래?”
“아....... 미안해. 오늘 저녁에는 나 약속 있어.”
“그래, 알았어. 출근 잘 하고.”
엘리나의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잠시 후, 그녀가 보냈을 걸로 추정되는 카톡이 하나 떴지만, 읽지도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수잔나....... 네가 주혁이랑 그렇게 놀아난다 이거지? 좋다. 우리 결혼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마음 한쪽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우리 둘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삶이 어떤 걸로 채워질 지, 그 모든 것들을 똑똑히 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과연 누구를 붙잡으려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엇보다도....... 내게도 명분이 생겼다. 엘리나와의 밀애를 이어갈 수 있는 명분. 혹, 나중에 수잔나한테 들켰을 때, 적어도 내가 주눅들 필요는 없어졌으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미친 듯이 아렸다. 그런데 그 아픔마저도 이제는 내 몫이라고, 내가 만든 길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책상에 앉고서는 다시 일에 매진했다.
* * *
집으로 오는 길. 조수석에는 레드 와인 한 병과 한우 소고기 한 세트가 올라가 있다. 오늘 맛있는 거 좀 먹이고 이야기 좀 나눌까 한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길 기다리며, 앞차를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적어도 나는 수잔나와의 관계를 지키면서 엘리나와 그 지랄을 하는데, 수잔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저러고 있을까?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우리 관계를 어떻게든 지켜보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주혁에게 기댄 건지, 아니면 그냥 마음이 식어서 자연스레 다른 길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도 나처럼 그래도 우리의 결혼 생활을 계속 지키자는 마음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이 결혼을 지켜낼 것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이어붙일 여지는 있으니. 그러나, 그녀가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라면...... 그땐 내가 본 모든 걸 그녀 눈앞에 그대로 펼쳐 보일 생각이었다. 덮고 넘어갈 일도, 철저히 모른 척할 일도 아니니.
그리고 나도 결정을 내려야겠지. 갈라설 지 말 지를.
그 생각을 하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수잔나가 막 저녁 준비를 하다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자기 왔어?”
“응. 짜잔!”
나는 손에 든 와인과 소고기를 들어 보였다.
“어머, 오늘도 한 잔 하는 거야?”
“응. 자기 한우 좋아하잖아. 갑자기 생각나더라.”
“파스타 하려고 했는데, 하지 말아야겠다, 헤헤.”
나는 수잔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내 등을 끌어안고 키스를 받아주었다. 내가 본 게 있고, 알아버린 게 있어서 그런 그녀의 모습조차 가식처럼 느껴졌지만 침착하게 숨기기로 한다.
씻고 와서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았다. 전기 그릴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우리는 와인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맛있게 먹는 그녀를 보면서 말을 꺼냈다.
“자기야.”
“응?”
수잔나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며 나를 바라봤다. 얼굴에 묘하게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리 호주 살 때 했던 말 기억나? 한국 가서 같이 살아보자고 한 거.”
“응응. 당연히 기억나지.”
“한국 오고 나서 계속 생각해봤어. 자기 입장에서는 큰 결정하고 나 따라왔을 텐데, 어렵게 이민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게 사는 지도 모르고. 내가 너무 못해준 거 같아 미안해.”
내가 말을 끝내자 수잔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요 근래에 많이 드네. 우리가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내가 당신한테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아.”
말을 아끼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죄책감 비슷한 흔적이라도 보일까 했지만, 수잔나는 오히려 부드럽게 웃었다.
“자기가 뭘 못해줘. 나 잘 살고 있어.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나 당신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도 못했어.”
되게 틀에 박힌 대답이지만,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고맙다’라는 말 치고는 너무 가볍게 들렸기 때문이다. 부담을 덜어내려고 하는 듯, 책임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톤.
나는 겉으로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요즘은 힘든 건 없어? 아니면 나한테 바라는 거라든지.”
“응?”
수잔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 그냥 어학원 일이 좀 스트레스라서 그렇지. 그리고 내가 자기한테 바랄 게 뭐가 있어. 같이 이렇게 밥 먹고 내 곁에 있어주고 그러면 되지.”
그렇게 말하면서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미동도 않고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아니면 나한테 서운한 거라든지?”
“없어.”
“그래. 그냥 물어봤어.”
나는 고기를 뒤집으며 태연한 척 말했고, 수잔나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자기 왜 그래 갑자기. 최근에 우리 분위기 좋잖아. 별생각 말고, 그냥 맛있게 먹자.”
그녀가 내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따뜻하게 온기가 전해졌지만.......그 따뜻함이 어쩌면 나만을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 왔다.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평온한 얼굴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그래. 맛있게 먹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의문과 의심으로 가득했다. 우리가가 하는 이 대화가, 이 부드러운 분위기가, 과연 진짜 우리 둘만의 것인지. 아니면, 이제 막 시작된 어떤 ‘연극’의 일부분인 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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