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1
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1
나는 98년도 가을에 군 입대를 했다. 부대가 좀 엄한 곳이었던지라, 99년 하고도 늦봄이 되어서야
겨우 첫 휴가를 나올 수가 있었다.
부대를 나서자마자, 나는 곧장 사촌인 다혜누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을 진정코자 애쓰며 돌린 번호에서는, "없는 국번입니다." 소리만, 포장된 상냥함으로
거듭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잠시 머엉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나한테는 초등학교때부터의 친구인 주현이녀석 번호를 누르게 되었다.
전화속 녀석의 목소리는 쾌할하게 나를 반겼지만, 나는 왠지 서먹서먹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녀석도 속마음은 나와 같기에 이렇든 격앙된 목소리로 부러 반가운 티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진작 전화를 했으면 야, 내가 부대 쪽까지 마중나갔을텐데~!"
나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녀석도 호들갑스레 떠들 밑천이 대충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이쯤에서 대충
끊을까 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너, 다혜누나한테는 연락해 봤냐?"
뜻밖에, 녀석이 먼저 누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었다.
"어...... 아니, 아직..."
"잘됐다. 실은 누나 전화번호가 바뀌었대거든. 혹시 너한테서 연락이 오면 꼭 전해달라 그러더라."
녀석의 말투가, 아까와 딴판으로 조심스러웠다.
나 역시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우리는 제각기, 작년 내가 입대하기 직전에 떠났던, 그 여름의 여행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 평생, 결코 잊혀지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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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소 급작스레 군에 입대하게 된 건, 새로 시작한 대학생활에 내가 도통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년간의 힘든 재수생활 끝에 겨우 모 사립대에 입학했건만, 학교생활은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신입생들은 무슨 출석번호 비슷한 학번에 따라 몇 개 반으로 무작위로 나뉘었고, 곧장 전공을 선택
하기 위한 학점 경쟁에 들어갔다. 새로 알게 된 아이들은 모두들 서로 서먹해 하면서, 술자리에서나
술기운을 빌려 서로간의 과장된 우정을 흉내낼 뿐이었다. 모든 것이 1년간의 괴로운 재수생활로
지칠대로 지친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결국 휴학원을 냈다. 고 3때부터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 - 내가 재수를 하게 된 결정적인 원
인 제공자였는데, - 그 무렵 자기네 학교 선배와 눈이 맞아 버렸다.
참으로 암담한 시절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비젼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때 유일하게 내 곁에 있어주고, 나를 다독거려 준 것이
바로 사촌누나 다혜였다.
그녀는 때로는 위로해 주고, 때로는 꾸짖어도 주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듯했던 나를 지탱해 주었었다.
나보다 네살이 많은 그녀는 당시, 돌연 일본으로 가 거기서 학업을 마치고는, 돌아와서 디자인 계통으로
취직했지만, 마침 닥쳐온 불황으로 실직하고 집에서 놀던 참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소 "야릇한" 일도 본의아니게(?) 생겨 버렸지만, 힘들던 때 누나는 내 엄마노릇을 해 주었는데,
내 진짜 엄마는 사내자식 꼬락서니가 한심하다며 덜컥 군 입대 신청을 해 버렸다.
다혜누나는 그런 식으로 도망치듯 입대하는 게 아니라서 극구 말렸지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영장이 나와
버렸고, 나는 그걸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서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나는 입대에 앞서 나 자신을 좀 정리하고 싶었고, 다혜누나는 전부
터 꼭 한번 울릉도에 가보고 싶어서 자기 친구와 함께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해서 내 불알친구인 주현이까지 해서, 2박 3일 잡고 휑하니 다녀오자는 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우리 둘이 가는 건... 좀 그렇지?"
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또한 똑같이 어색한 웃음으로 답 할수 밖에 없었더랬다.
"미안, 미안해...... 나 많이 늦었지?"
"안녕하세요? 저는 정호 친구 주현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주현이녀석, 다혜누나는 보자마자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하기야, 정말로 수많은 남자들이 그래 왔었다.
"......민정이 누나는?"
"응... 실은 걔 기다리느라고 많이 늦었던 거거든.
걔가 오늘 갑자기 집안에 일이 있다 그러네? 오늘은 도저히 같이 못 가겠다 그러더라구."
어......라, 이건 낭패였다. 모처럼 짝 맞춰 날 잡은 여행이었는데... 남자 둘, 여자 하나로 떠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애매했다.
"어떡하지? 그냥 우리끼리 갈까? 아니면 나중에 다시 날 잡을까?"
내 굳은 표정을 살피며 누나가 덧붙였다.
뭐 나나 주현이야 상관 없겠지만서도, 다혜누나 입장에서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어... 그냥 우리끼리 가죠! 얘 (나 말이다.) 군대 갈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언제 또 시간 잡겠어요? 그냥 지금 출발하죠."
주현이녀석이 얼른 말해버렸고, 다혜누나도 잠시 뭔가 생각하는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현이녀석이 누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노골적으로 눈웃음 보이고 하는 건 좀
보기에 그랬다.
누나가 그것 때문에 불편해 하지나 않을지 많이 걱정이 되었다.
녀석은 화장실 가는 길에 내 어깨를 치면서 음흉하게 이빨을 보이기도 했다.
"야... 디따 이쁜데~? 네살 많다 그러더니 너보다도 더 어려 보인다야~ 진짜 동안에다,
무지 귀엽다......"
버스로 양양까지 가서, 다시 거기서 배를 타고 세 시간을 가야 울릉도였다.
민정이 누나가 펑크를 낸 문제로 지체한 것 때문에라도 서둘러야 했다.
양양도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지만, 구경할 새도 없이 곧장 배를 타야 했다.
뭐, 돌아오는 길에 천천히 구경하기로 했으니까,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나는 뱃멀미를 좀 했다.
날씨가 안 좋아선지 배가 좀 흔들렸던 것이다.
주현이 녀석이 등을 두들겨 주었고, 누나가 보드라운 손길로 이마에 땀을 닦아주었다.
가는 동안 우리는 꽤 친해졌다.
울릉도의 숙소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깜깜해 져 있었다.
나는 멀미도 하고 해서 꽤 피곤했지만 주현이 녀석은 쌩쌩해 보였다.
방을 잡는 문제로 잠깐 고민을 했지만, 그냥 방 하나를 같이 쓰기도 했다.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욕실 겸 화장실이 딸려 있고 해서 별 문제는 없으리라 여겼다.
"동생들인데 뭘~" 누나는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 웃으며 아무렇잖게 넘겨버렸다.
오는 길에 장을 좀 봐두었어야 했는데, 밤길에 숙소 찾고 어쩌고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미처 그
러지를 못했더랬다.
그래서 장을 보러 나가기로 했고, 외진 곳이라서 좀 멀리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누난 여기 있어. 주현이랑 둘이서 다녀올게."
"어 그래... 그럼 키 가지고 가."
다혜누나를 방에 남겨두고 둘이서 민박을 나섰다. 일부러 외진 곳을 잡았든지라 바깥은 거의 허
허 벌판이었다. 그런데,
"야 정호야. 굳이 멀리 안 나가도 되겠는데?"
민박집을 나서다 말고 주헌이녀석이 이러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민박 내에 쬐그만 슈퍼가 하나 딸
려 있었던 거다. 작고, 물건들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고 그랬지만 술이니 안주꺼리, 반찬꺼리 부
탄가스를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소규모나마 특산품들까지 팔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보다 훨씬 빨리 (실은 거의 노타임으로) 방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키로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방에 누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서, '응, 어디 간거지?' 하고 두리번 거릴려니깐, 갑자기 주현이 녀석이 내 어깨를 꽉 틀어쥐는
것이었다.
"응? 왜그래?"
"쉬이잇! 잠깐만!"
주현이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욕실 쪽을 가리켰다.
방에 딸린 욕실 문의 반투명 유리창에, 뽀얀 사람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
주현이의 얼굴에 일순 긴장이 어리며, 무언가 마력에 홀린 것처럼 살금살금 그쪽을 향하고 있었
다. 나도 왠지 모르게, 그 뒤를 따라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욕실문의 반투명 유리창 한구석에 살짝 이가 빠져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새가 있다는 걸,
우리가 미리 인식하고 있었던 건지 그때에야 깨달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 이 썰의 시리즈 (총 5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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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25.11.25 | [펌]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5 (2) |
| 2 | 2025.11.25 | [펌]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4 (1) |
| 3 | 2025.11.25 | [펌]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3 (1) |
| 4 | 2025.11.25 | [펌]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2 (2) |
| 5 | 2025.11.25 | 현재글 [펌]그 여름의 여행(다혜누나) 1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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