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생활
조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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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전
내가 제주로 내려온지 4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4년 동안 제주의 곳곳에 가보았고 가서 느낀것과 알게 된 것을 나만의 생각으로 적어 보았다.
제주는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립니다. 어디를 가도 돌담이 집과 토지의 경계를 이루고, 바람은 늘 불어오며,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특히 제주 여성들의 생활력은 강렬합니다. 과거 추사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 왔을 때, “남자들이 안 사는 곳”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여자들이 바다(해녀)와 밭에서 주로 일하고, 남자들은 집안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제주에는 본처 외에 작은어멍(작은 엄마)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한 집안에서 함께 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육지에서 말하는 '첩'과 비슷하지만, 맥락이 다릅니다. 제주는 땅이 척박하고 작물이 부족하며, 남성들은 어업으로 먼 바다를 나가 풍랑을 만나 죽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 특히 아이가 있는 과부는 생계를 위해 잘 사는 집이나 먹여 살릴 수 있는 집의 '작은어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제도는 단순한 축첩이 아니라, 생존과 공동체 유지의 현실적 선택이었습니다.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해녀 문화 등)과 맞물려, 처첩 간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 남자를 두고 여러 여성이 함께 사는 모습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제주의 혹독한 자연 환경과 남성 사망률이 만든 독특한 사회 구조였습니다.
제주 동쪽 조천읍 북촌리는 4.3 항쟁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하나입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정부군(토벌대)이 총과 죽창으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이 단일 사건으로만 약 400~443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마을 인구가 400~500명 수준이었으니 마을 전체가 거의 초토화되었습니다.
남성들이 대거 희생되면서 마을은 '무남촌'이 되었고, 살아남은 여성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동네에 남아 있는 소수의 남성들의 '씨'를 받는 행위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현재 북촌리 주민들의 외모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거의 형제·자매 수준으로 혈연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는 생존과 마을 재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약 20만 명 정도였습니다. 4.3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수는 공식 확인된 희생자: 약 14,000~15,000명 정도 (4·3위원회 기준), 정부·학계 추정: 25,000~30,000명, 제주도민들이 전하는 체감: 5만 명 이상 (최대 8만 명까지 추정도 있음)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목숨을 잃은 셈입니다. 많은 마을이 불타고, 유명 관광지인 천제연·천지연 폭포, 정방폭포 등도 당시 학살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토벌 과정에서 정부군,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비윤리적·잔혹한 행위(강간, 가족 간 강제 행위 강요, 임산부 학대 등)가 극에 달했다는 증언이 많습니다. 이런 폭력은 악마보다 더한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환경적 시련을 겪으며 제주 여성들은 강한 생활력과 확고한 주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손해 보는 일을 절대 피하고, 자기 삶을 스스로 챙기는 태도가 강합니다. 해녀 문화부터 4.3의 생존 투쟁까지, 여성들이 공동체를 지키고 재건하는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후나 대규모 희생 후에 신생아가 급증하는 현상처럼, 1950~60년대 제주 인구 증가도 이런 여성들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깊은 상처와 회복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당신이 3년 동안 느끼고 경험한 제주 여성들의 강인함은, 단순한 '생활력'이 아니라 수백 년의 자연 환경과 20세기 최대 비극 중 하나를 이겨낸 생존의 DNA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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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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