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소개팅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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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덕분에 혼란스러운 밤을 보내고,
월요일 주간회의 내내 복잡미묘한 채로 있다가
팀장님이 자리를 뜨자마자 선배 자리로 튀어갔다.
저기 대리님, 저 어제 그분 만났는데요.
오 어때, 너랑 잘맞을것같지?
그..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싸가지없잖아. 단호박이고.
...그럼 저도 싸가지...단호박...
아니ㅋㅋㅋ너도 맨날 정색때리는데 나쁜애는 아니잖아. 얘 의외로 착해. 딴데 한눈팔애도 아니고.
수습하시는 거 아니죠?
싸가지없는 게 아니라 낯가리는거야. 지랄하는거 보니까 너 맘에 드나보네. 술이라도 같이 마시면서 친해져.
아침까지만 해도 주리를 틀고 싶었던 선배지만,
과연 선배 값은 하는 변명과 포장이었다.
평소에는 정색이지만 지내볼수록 괜찮다. 딴데 볼 사람도 아니다.
주리를 당하지 않으려 한 말이겠지만,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고민 끝에, 점심시간에 마녀에게 다시 연락을 넣었다.
저기 마녀씨~ 혹시 이번주 시간 괜찮으신가요? 저는 주말에는 괜찮은데...
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재깍 답장이 울렸다.
네~~! 저도 주말은 다 좋아요ㅎㅎ 안그래도 이번주는 일이 많아서ㅠㅜ
혹시 주말 괜찮으신가 하던 참이에요^^다행이다!
내가 더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다행히 빙의상태구나.
얼음마녀가 행여 튀어나올까 얼른 약속을 잡고 책상으로 향했다.
회사 일이 아닌 일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즐겁다.
설령 그것이 메시지와 본인이 다소 다른 수상쩍은 빙의체라도.
분명 첫만남의 기억은 좋지 않았는데
선배의 포장 덕에 토요일이 조금 기다려졌다.
토요일 오후, 다시 한번 비장한 마음으로 마녀와 마주 앉았다.
잔뜩 굳어 냉기가 풀풀 나는 얼굴을 보니 여름인데도 조금도 덥지 않았다.
예쁜 얼굴인데 저렇게 굳을 수도 있구나.
식사 내내 말을 아끼던 마녀는
느닷없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펭귄씨.
네?
혹시 술 드시나요?
아 저요? 좋아하죠...ㅎㅎ 잘먹지는 못해도ㅠㅜ
그럼 혹시 이따가 맥주 마시러 갈까요?
남들은 첫만남에 술도 마시고 모텔도 가고 별 짓을 다 한다지만
나는 아직 아니었다.
친한 여사친들과는 죽어라 술을 마시고 난장판을 친 적도 많지만,
아직까지는 두 번 본 여자와 술을 마시러 간 적은 없었다.
그래도 선배의 말이 생각나 그 처음을 해 보기로 했다.
네, 그러면 그러죠. 차 안가져오길 잘했네요.
첫 잔이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다.
둘째 잔이 들어갈 때도,
세 번째 500cc잔을 비울 때도.
그런데 나도 슬슬 취하기 시작하고,
소맥이 몇 잔인가 돈 뒤부터 문득 깨달았다.
대화는 마녀가 이어 가고 있었다.
자기가 지난 주에 얼마나 무례하고 바보같았는지,
친구에게 얼마나 미친년 소리를 들었는지,
사촌오빠한테(소개팅 주선자) 얼마나 변명을 했는지,
소개팅 부탁은 자기가 해놓고 얼마나 민망하던지.
대역죄인처럼 머리를 박을 듯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괜찮아요 괜찮아. 그래도 마녀씨 지금 귀여워요.
지금 돌이켜 보면
마녀는 그날 지난 주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다 술술 속마음을 불어 버렸고,
나는 예상외로 강한 마녀의 주량과 예상대로 약한 내 주량 덕분에
잠시 정신을 놓치고 귀엽다는 말을 그만 뱉어 버렸다.
어 그럼 마녀씨, 저 어떻게 아시고 소개해 달라고 하신거에요?
네에...사촌오빠가 지이이이난달에 말했는데 지금까지 말 못하다가아아...
ㅋㅋㅋ귀여워요, 귀여워.
그런소리 자꾸 하시면 민망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분명 밥을 먹을 때만 해도 덥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 주변은 조금 더웠다.
마녀의 차분한 말투는
어느새 메시지와 얼추 비슷한, 조곤조곤하고 말랑말랑한 톤으로 흐르고 있었다.
정신차리자.
화장실에서 손을 닦으며 다짐했다.
이건 술기운이다. 더 지켜봐야 한다.
술버릇이 나쁜 여자는 자고로 피해야 한다.
다짐을 하고 테이블로 돌아오던 중
마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하얀 얼굴에 살짝 분홍빛을 띠며 웃었다.
어, 펭귄씨 화장실 자리 있어요? 저 저녁때보다 좀 낫지 않아요? 다행이죠? 저 지금 너무 업돼있나요?
무슨 말을 더 하고 화장실로 가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지나쳐 그대로 마녀 옆자리에 앉았으니까.
마녀씨 얼굴 빨간데요.
아... 좀, 더워서요.
술기운이었겠지만,
이미 귀에는 마녀의 낮고 말랑말랑한 목소리뿐이었다.
...내가 아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술버릇이 나쁜 여자는 피해야 한다고?
아, 왜인지 알겠다. 나는 이미 못 피하고 빠졌구나.
이상하네.
분명 키스를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
정말 마녀가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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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몰입해서 뻘글을 이렇게 길게 썼는데도 아직 1일이 아니라니 부끄럽습니다.
간결하게 쓰는 게 제일 어렵다는 말이 맞네요ㅠㅜ
그래도 제 쪽에서 처음 반한 순간들이라 저도 모르게 갑정이입했습니다.
절치부심해서 다음편은 보다 간결하게 쓰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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