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이야기 - 악연
김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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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전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의 흥미나 재미라는 건 어느 순간 아주 조용히 맛이 간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열정보단,
머리 구석에 처박힌 낡은 기록들을
하나둘 꺼내 먼지를 터는 회상의 시간뿐이다.
나이가 점점 든다는 건 아마도 그런 것일까.
가슴 뛰는 기억의 파동조차 예전 같지 않고,
이성에 관한 욕망도 이젠 바삭하게 말라버려 귀찮음으로 변질되버린다.
하지만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바랜 듯한 지금도,
그 여자를 생각하면 내 안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10여 년이 넘은 긴 시간의 고리는 여전히 생생한 감각으로 내 피부에 달라붙어,
다시금 그녀를 품었던 과거의 환각을 만들어낸다.
기억이 더 뒤죽박죽되기전에 빛바랜 일기처럼 적어보려 한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열렬히 사랑했고 그리워했으며,
더없이 즐거웠으나 증오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소망하게 된 인연이다.
나 : "찾으시는 와인이 있으신가요? 취향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정말 어울리는 걸로 하나 골라드리고 싶어서요."
보통 이렇게 말을 건네면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갈린다.
적당히 거리를 두며 혼자 구경하겠다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부류, 혹은 기다렸다는 듯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오는 부류.
나는 조심스럽게 응대하는 점원의 말투로 그녀가 어느 쪽일지 가만히 가늠해 보았다. 그녀는 전자에 가까워 보이는 정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말을 걸기 시작하며 그녀의 눈을 보았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지만, 눈매가 무척 또렷하면서 깊이가 있고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작았다.
눈가에 살짝 자리 잡은 끝주름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이내 들려온 목소리의 침착함과
말투에서 묻어나는 우아함이 그녀의 연륜을 짐작게 했다.
평범한 주부라기보다는 고생 한번 안해본 사모님 같은 기품이 느껴졌다.
나의 제안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았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동자에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어리며 가늘게 떨렸다.
평상시에도 외모가 출중하거나 내 농담을 잘 받아줄 것 같은 손님들에겐 응대를 핑계로 슬쩍 말을 걸어보곤 했다.
하지만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내가 이제껏 겪어온 손님들의 그것과는 아주 조금, 하지만 분명히 달랐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단순히 낯선 이의 호의에 경계심과 그렇다고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가려는 여유도 아니었고
그 깊은 눈매 속에는 세월이 겹겹이 쌓인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묘한 정적과
그 정적을 깨고 들어온 나의 당돌함에 흔들리는 아주 미세한 틈이 보였다.
나의 제안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았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동자에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어리며 가늘게 떨리는것처럼 보였다.
확실한건,
그녀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영업을 해오며 쌓아온 능숙한 말주변으로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와인에 대한 지식인 척 혹은 가벼운 농담인 척 말을 이어갔지만, 사실 내 모든 신경은 그녀의 눈빛을 캐치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적절한 타이밍에 파고드는 것
그것이 내가 지루한 매장에서 익힌 유일한 기술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빛에 서린 호기심이 아주 미세하게 승기를 잡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린 남자의 당돌한 접근이 불쾌하기보다는 그녀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나보다 어디까지나 판매를 위한 영업이니까.
길었던 침묵 끝에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 : "...네, 골라주시겠어요?"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골라준 와인을 계산하기 위해 포스기 앞에 섰을 때,
지금까지의 영업 생활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것은 익숙함과 호기심이 기묘하게 뒤섞인 형태였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자인데도 어디선가 마주쳤던 것 같은 아련한 기시감이 들었고, 동시에 그녀라는 존재와 가까워져야 한다는 강한 끌림이 들었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쿠폰 발행을 핑계 삼아 그녀에게 슬쩍 미끼를 던졌다.
나 : "손님, 저희 매장 VIP 회원 목록에 넣어드릴게요. 쿠폰도 발행해드리고 행사 있을 때마다 제가 따로 챙겨드릴 거라서요."
조금은 과한 친절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vip도 없을뿐더러 할인 쿠폰 따위는 백화점 제휴카드 할인 말고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건네준 종이 위에 정갈한 글씨로 자신의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그녀는 짧은 목례와 함께 매장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내 잔잔했던 마음의 호수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던지고 간 셈이었다. 가슴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뜨겁게 일렁이던 감정도 시간이 흐르자 일상의 먼지 아래로 조금씩 덮여갔다. 광고인 척 파격적인 할인 문자를 보내
그녀의 응답을 유도해 보았지만,
휴대폰은 야속하리만큼 조용했다.
매주 꾸준히 문자를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가벼운 식사나 커피 한 잔을 제안하는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현실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림잡아도 열 살은 족히 위일 것 같은 그녀에게,
매장의 어린 직원이 던지는 시시한 제안 따위가 먹힐 리 없었다. 만약 한번의 제안 거절당한다면 내게는 다시 기회조차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저 어린 남자라면 연상의 여자가 무조건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어리다'는 건 어디까지나 매력이 전제되었을 때의 가산점일 뿐이다. 알맹이가 없다면 나이 차이 같은 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딱히 훤칠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서른 살의 남자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몇 달이 속절없이 흐른 뒤, 그녀가 잊혀질때쯤 연락이 왔다.
손님 대접용 와인을 몇 병 구매하고 싶다는, 아주 사무적이고도 정중한 메시지였다. 그녀는 곧 매장을 다시 찾았다.
다시 마주한 그녀는 여전히 그 정갈한 머릿결을 찰랑거리며,
이번에는 마스크를 벗은 채 매장으로 들어섰다. 첫 만남의 낯선 경계심도 두 번째 만남에 어느 정도 녹아내린 듯,
드러난 그녀의 표정은 전보다 한층 맑고 환해 보였다.
그 정갈한 분위기 속에 우아하고 고운 피부는 매장의 조명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눈가와 입가에 아주 조금씩 자리 잡은 잔주름만이 그녀가 지나온 세월을 짐작게 할 뿐,
마스크 뒤에 숨겨져 있던 온전한 이목구비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고귀함이 배어 나왔다.
성숙한 여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은은한 기품과 향기. 매장의 조명조차 그녀의 얼굴 위에서는
부드럽게 굴절되어 흩어졌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그 찰나의 움직임조차
내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나는 그저 홀린 듯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기에 급급했다.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 웅장한 예술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끼는 경건한 전율에 더 가까웠다.
마음 한구석이 일렁였지만, 나는 이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평소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나 : "그때 골라드린 와인은 입에 맞으셨나요?
곧이어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내 질문에 수줍은 듯, 혹은 반가운 듯 아주 짧게 호흡을 섞어 대답했다.
그녀 : "...네, 덕분에 아주 좋았어요."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내뱉는 말소리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정성껏 와인을 추천했다. 그녀가 계산을 마칠 때쯤,
슬그머니 사비를 털어 준비한 고급 치즈와 안주 몇 가지를 쇼핑백 구석에 함께 담았다.
나 : "이건 저번에 골라드린 와인이랑 같이 드시면 정말 맛있거든요. 제가 따로 챙겨드리는 서비스예요."
뜻밖의 선물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내 안의 가벼운 흥미는 어느덧 그녀라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지금껏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며 쌓아온 나의 계산적인 친절이, 그녀 앞에서는 자꾸만 길을 잃고 서툴게 흩어졌다.
그저 그 정갈한 머릿결을 찰랑이며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막연하게나마 직감했다.
오늘 이 만남이 내 무미건조했던 일상에 아주 작은,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졌다는것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쫓던 시선은, 때마침 매장 안으로 들어오던 사촌 동생 준우와 눈이 마주쳤다.
준우는 내 시선의 끝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물었다.
준우는 같은 식품관 다른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가끔 쉬는 시간마다 내 쪽으로 건너와 담배를 피거나
같이 손님들을 품평하곤 했다.
준우는 내 시선의 끝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물었다.
준우 : "형, 뭐 봐?"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나 : "아니, 그냥 손님."
준우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시선이 머물던 곳, 매장 입구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같이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입가에 비열한 듯하면서도 솔직한 미소가 걸렸다.
준우 : "오, 저 아줌마 관리 잘했네."
나 : "그래? 그래봤자 아줌마지 뭐."
짐짓 덤덤한 척 내뱉었지만, 내 안에서는 묘한 불쾌감과 알 수 없는 흥분이 뒤섞였다.
준우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어깨를 툭 치며 낄낄거렸다.
준우 : "에이, 형. 원래 저런 아줌마들이 더 맛있는 법이야. 딱 봐도 맛있겠네."
녀석의 가벼운 농담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평소라면 같이 맞장구를 치며 웃어넘겼을 저급한 농담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그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맛있겠다'는 천박한 단어가 그녀의 우아함과 섞이자, 묘
하게도 그녀의 고결한 이미지는 순식간에 관능적인 대상으로 비껴보인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까는 기품 있게만 보였던 그 정갈한 코트의 곡선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이는 치맛자락 아래의 종아리와 잘록한 발목까지,
준우의 말대로, 그녀는 단순히 '곱게 늙은 아줌마'가 아니었다. 관리되고 보호받은 육체가 뿜어내는, 숨겨진 욕망을 자극하는 기운이 있었다.
내 시선은 그녀의 허리 라인에서부터 골반까지, 그리고 구두 끝까지 아주 느리고 집요하게 내려앉았다.
그전까지 내게 그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자 고결한 귀부인이었다면,
그 찰나의 순간 그녀는 비로소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여자'로 내게 다가왔다.
블루메딕 후기작성시 10,000포인트 증정

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