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5
고스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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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22:36
그날은 그녀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내가 방을 만들기도 전에 세이클럽 대화방 목록에서 익숙한 제목이 보였다.
「평범한 일상 공유」
방장은 보통의하루.
나는 웃으며 들어갔다.
나: 오늘은 먼저 왔네요.
그녀: 가끔은 제가 기다려도 되잖아요.
나: 기다렸어요?
그녀: 조금.
나: 또 조금.
그녀: 많이는 아니고.
나: 제가 하던 말 따라 하네.
그녀: 배웠죠.
대화가 익숙해졌다.
처음처럼 문장을 하나하나 고르지 않아도 됐다.
그녀가 어떤 말에 웃는지도 조금 알았고, 어떤 질문을 싫어하는지도 조금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과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녀가 물었다.
그녀: 오늘은 재미있는 거 없어요?
나: 제가 맨날 재미있게 해줘야 돼요?
그녀: 방장이잖아요.
나: 오늘 방장은 그쪽인데.
그녀: 그러네.
나: 그럼 방장님이 해봐요.
그녀: 싫어요.
나: 책임감 없네.
그녀: ㅋㅋ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썼다.
나: 그러면 상황극 하나 할래요?
답을 보내고 조금 긴장했다.
지난번 일이 바로 떠올랐다.
그녀의 대답도 바로 오지 않았다.
그녀: 또 이상한 거?
나: 아니요.
그녀: 진짜?
나: 이번엔 방장님이 내용 정해요.
그녀: 제가요?
나: 네.
나: 싫은 거 안 하려고.
잠시 후 그녀가 웃었다.
그녀: 많이 배웠네.
나: 교육 효과 좋습니다.
그녀: ㅋㅋ
나: 해볼래요?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빨랐다.
그녀: 어떤 건데요.
나: 처음 만나는 거.
그녀: 우리요?
나: 네. 실제로 처음 만났다고 치고.
그녀: 어디에서요.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넘겼다.
나: 그쪽이 정해요.
그녀: 카페.
나: 좋아요.
그녀: 사람 많은 데.
나: 왜 꼭 사람 많은 데예요.
그녀: 안전하게.
나는 웃었다.
나: 아직도 못 믿네.
그녀: 아직 보는 중이라니까요.
나: 알겠습니다.
그녀: 그리고 낮.
나: 밤은 안 되고?
그녀: 안 돼요.
나: 조건 많네.
그녀: 싫으면 하지 말고요.
나: 합니다.
그녀: 그럼 시작.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상하게 조금 긴장됐다.
상황극일 뿐인데, 실제로 그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나: 카페 문 열고 들어왔어요.
그녀: 저는 먼저 와 있어요.
나: 왜 먼저 왔어요?
그녀: 늦는 사람 싫어서.
나: 제가 늦었어요?
그녀: 5분.
나: 처음부터 감점이네.
그녀: 많이.
나: 들어가서 찾고 있어요.
그녀: 어떻게 찾아요?
나는 멈췄다.
맞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몰랐다.
나: 옷 알려줘요.
그녀: 검은 코트.
나: 카페에 검은 코트가 열 명인데.
그녀: 그러면 그냥 찾아봐요.
나: 손 흔들어줘요.
그녀: 싫어요. 먼저 찾아요.
나: 너무하네.
그녀: 상황극이잖아요.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얼굴은 여전히 없었다.
검은 코트만 있었다.
창가 자리일까.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머리는 길까 짧을까.
나: 찾았어요.
그녀: 어떻게요.
나: 느낌으로.
그녀: 거짓말.
나: 보통의하루처럼 생긴 사람이 있었어요.
그녀: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요.
나: 얌전하게 앉아서 사람 구경하는 얼굴.
그녀: 틀렸어요.
나: 뭐 하고 있는데요.
그녀: 창밖 보고 있어요.
나: 그럼 맞네.
나: 사람 안 보고 있는 척하면서 기다리는 사람.
잠깐 답이 없었다.
그녀: 피터팬은요?
나: 들어가서 그쪽 앞에 앉아요.
그녀: 인사는요.
나: 안녕하세요.
그녀: 너무 평범한데.
나: 방 제목이 평범한 일상 공유잖아요.
그녀: ㅋㅋ
나: 뭐 마시고 있어요?
그녀: 커피.
나: 무슨 커피.
그녀: 아메리카노.
나: 역시.
그녀: 왜 역시예요.
나: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녀: 피터팬은요?
나: 달달한 거.
그녀: 의외네.
나: 실제로는 잘 안 마셔요.
그녀: 갑자기 실제 얘기 하면 반칙.
나: 알겠습니다.
우리는 웃었다.
이상했다.
상황극인데 실제 이야기가 자꾸 섞였다.
설정 속의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녀는 실제 나를 떠올렸고.
그녀가 무엇을 고르면, 나는 실제 그녀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상상했다.
나: 이제 뭐 해요?
그녀: 피터팬이 물어봐야죠.
나: 뭘요.
그녀: 실제로 만나면 뭐부터 물어볼 것 같아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얼굴 얘기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떠오르는 건 다른 것이었다.
나: 진짜 보통의하루 맞아요?
그녀: ㅋㅋ 왜요.
나: 확인해야죠.
나: 라면만 먹는 사람한테 뭐라고 했죠?
그녀: 밥 좀 챙겨 먹으라고.
나: 맞네.
그녀: 그러면 피터팬 맞는지는 제가 확인할게요.
나: 어떻게요.
그녀: 제가 싫다고 하면?
나: 멈춰야죠.
답을 보내고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상황극 속 대화였지만, 그 말은 실제였다.
그녀: 합격.
나: 뭘 합격해요.
그녀: 피터팬 확인.
나: 겨우 그걸로?
그녀: 중요한 거잖아요.
나: 이제 커피 마셔요.
그녀: 네.
나: 어색해요?
그녀: 조금.
그녀: 채팅에서는 잘 말했는데 얼굴 보면 어색할 것 같아요.
나: 저도요.
그녀: 피터팬은 안 그럴 것 같은데.
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잘 못할 수도 있죠.
쓰고 나서 손이 멈췄다.
나는 상황극을 핑계로 조금 진짜를 섞었다.
그녀: 누구 좋아하는데요?
나: 지금은 상황극인데요.
그녀: 피하네.
나: 그럼 설정상.
나: 앞에 앉아 있는 사람.
다시 침묵.
나는 괜히 너무 나갔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그녀: 너무 빠른데요.
나: 그러면 취소.
그녀: 취소까지는 아니고.
나는 웃었다.
나: 그럼 놔둘게요.
그녀: 네.
처음이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밀어내지 않았다.
받아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 정도가 좋았다.
나: 커피 다 마셨어요.
그녀: 이제 가요?
나: 벌써?
그녀: 상황극도 오래 하면 이상해져요.
그녀: 카페 앞까지 같이 나와요.
그녀: 각자 집에 가요.
나: 너무 건전한데.
그녀: 싫어요?
나는 잠깐 웃었다.
나: 아니요.
나: 다음에 또 만나면 되잖아요.
답이 늦었다.
그녀: 다음도 있어요?
나: 오늘 괜찮았으면.
그녀: 누가 괜찮았대요.
나: 안 괜찮았어요?
그녀: 조금 괜찮았어요.
나: 또 조금.
그녀: 많이는 아니고.
나: 그럼 다음 약속 잡아요.
그녀: 아직 상황극이에요?
나는 손을 멈췄다.
나도 순간 헷갈렸다.
나: 모르겠어요.
나: 어디까지가 상황극인지.
답이 한동안 없었다.
그녀: 저도 조금.
그날 상황극은 거기서 끝났다.
처음에는 가짜로 만났다.
사람 많은 카페.
낮.
검은 코트.
얼굴도 없는 여자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대화를 이어갈수록 가짜 안에 진짜가 조금씩 섞였다.
그녀: 이제 상황극 끝.
나: 네.
그녀: 어땠어요?
나: 재밌었어요.
그녀: 저도요.
나: 다음에 또 할래요?
잠시 뒤.
그녀: 이상한 것만 아니면.
나: 알겠어요.
나: 싫다고 하면 그만.
그녀: 합격.
나: 또 합격했네.
그녀: 오늘은 두 번.
그녀가 나가기 직전 한마디를 남겼다.
그녀: 그런데.
그녀: 실제로 만나도 오늘처럼만 해요.
나는 한동안 답을 쓰지 못했다.
상황극은 끝났는데,
그녀는 처음으로 실제 만남을 말하고 있었다.
나: 알겠어요.
나: 사람 많은 데.
나: 낮에.
그녀: ㅋㅋ
나: 잘 자요.
그녀: 피터팬도요.
그녀가 나간 뒤에도 나는 한동안 대화창을 닫지 못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상황극을 했다.
가짜로 만나고,
가짜로 커피를 마시고,
가짜로 헤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끝나고 남은 것은 전부 진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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