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의 발악 9

늘 그랬듯이 아침 일찍 등교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젠 여기 와 골머리를 앓으며 죽도록 고민하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정답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잠시 머리를 식혀 주기 위해 오늘은 그냥 가볍고 단순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엑스는 분명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일상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내게 명령문을 보내고 있다. 심지어 화장실 안이나 세나의 집에서 몰래 해결한 미션까지 파악하며 답장을 보내고 있지 않느냔 말이야. 내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지? CCTV와 위치 추적?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이후에 나는 혹시 몰라 내가 자위 미션을 수행했던 여자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샅샅이 살펴 봤었지만 먼지보다도 더 작은 초소형 무선 실시간 카메라 같은 건 없었다. 하긴 당연한가? 만약 카메라 같은 걸 붙였었다고 해도 나중에 누군가가 그걸 발견한다면 난리가 날 텐데 금방 회수했겠지. 게다가 그 때 내가 정확히 이 화장실 안에서 미션을 수행할 줄 어떻게 알고 여기에만 카메라를 붙였다가 도로 회수한단 말인가? 더욱이 이런 화장실은 사람이 없을 때 얼마든지 카메라를 붙일 수 있겠지만 세나의 방 안에다 설치하기란 무리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게 또 있다. 세나와 계속 얽히게 되는 내용의 명령문. 어째서 엑스는 목표를 세나로 고정한 채 내게 미션을 계속 주는 것일까? 대상을 굳이 세나로 정한 것은 짐작이 간다. 만약 엑스가 우리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다면 주변 인간 관계 또한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겠지. 여태껏 엑스는 수행하기 정말 어려운 미션들만 우리에게 요구하였다. 성관계 대상이 세나라면 내가 손을 쓰지 못할 거라 여기고 그런 명령문을 보낸 거라고 한다면 왜 아직까지도 세나를 대상으로 삼는 거지? 이미 세나는 나와의 관계를 거부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학교 안에서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게 몸을 허락하게 되었는데 내가 미션을 실패하기를 바란다면 세나가 거부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 성관계 대상을 다른 누군가로 바꾼다거나 더 어려운 미션을 내 줘야 하지 않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다.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는 녀석의 심리를 읽어낸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예측이 어려운 비정상적인 심리를 가진 사이코패스라 할지라도 특정한 패턴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 맨처음 미션을 받은 건 주현준, 김태원, 정종훈, 그리고 나 순이었다. 현준이와 태원이는 아예 미션을 시도조차 하지 않다가 살해당했고 종훈이는 앞서 두 친구의 죽음으로 경각심을 느끼고 미션을 착실히 수행하기는 했지만 차츰차츰 올라가는 미션의 난이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근데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맞는 건가? 경찰도 타살의 정황을 전혀 못 찾아냈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수로 친구들의 완벽한 자살을 연출한 거지?
'가만......'
애초에 타살이 맞기는 한 거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와는 상관없이 문득 촉이 왔다. 사실 확인을 위해서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나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설사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천절을 밟는다 해도 최소한 엑스의 실마리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정리했을 무렵에는 학생들이 거의 다 자리에 착석하여 담임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임이 들어왔을 때 우리 반의 책상은 한자리가 비어져 있었다. 그곳은 최기철의 자리였는데 그 자리가 빈 이유를 담임이 설명해 주었다.
"다들 조용히 하고......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겠다."
갑자기 담임이 무게를 잡으니 평소 산만하던 애들도 귀를 기울였다. 담임은 정말로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기철이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하는구나."
다들 담임의 얘기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내 친구들 세 명이 떠난지가 언제라고 또다시 사망자가 나오다니. 담임의 얘기를 들으니 자살이라고 한다.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내 친구들의 전례가 나에게 이 소식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끔 만들었다.
최기철이 자진해서 목을 매? 내 친구들보다 더 자살할 놈으로 안 보이는 뻔뻔한 놈이?
설마 이것도 엑스가 개입된 일은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최기철도 남몰래 엑스에게서 명령문을 받고 있었다는 건가? 엑스의 목표 대상의 폭이 최기철로까지 넓어진다면 내 빈약한 추리로는 더 이상 무리다. 역시 내가 직접 미끼가 되어 단서를 찾는 수밖에 없는 건가?
결심한 나는 카메라를 구입하여 내 방에다 설치해 두었다.
오늘의 미션은 21시까지 세나에게 질내사정을 3번 완수할 것. 정해진 시간까지 그 미션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내 신변에 무슨 변화 같은 게 일어나겠지. 그 순간을 포착할 수만 있다면 설사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 증거를 나중에 조사하러 올 경찰들에게 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핸드폰을 켜고 경민이에게 송신되게끔 문자 메시지 기능을 열었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정해진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뿐. 시침의 바늘이 9에 가까워져 갈수록 손바닥은 땀으로 넘쳐났고 심장은 평소의 배 이상으로 두근거렸다. 시간이 되면 지금까지 희생됐던 사람들처럼 나 역시 똑같이 될 거라 생각하니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로 어떤 방법으로 엑스가 사람들을 자살로 위장시켜 없애 버리는지 진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비장한 각오를 굳히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이런 시간에 누구지? 집으로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밖을 내다 보니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혀 뜻밖의 인물인 세나였다. 얘가 여기는 뭐하러 온 걸까? 일단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웬일이야? 네가 우리 집엘 다 오고."
"들어가도 돼?"
지금 얘가 나한테 허락을 구하는 거야? 아무리 남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나가 이러니 영 어색했다. 일단 이렇게 왔으니 난 세나를 안으로 들였다. 편하게 앉으라고 한 다음 마실 거를 내 왔는데 세나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위축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한눈에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티가 났다.
"여긴 어떻게 왔어?"
세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그 때문에 내 궁금증은 더 가중되었지만 지금은 얘한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21시가 되면 곧 내 신상에 이변이 일어날 텐데 그 전에 얘를 어떻게 해서든 돌려보내야 한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얼굴에 수심이 깊어 보여."
"나, 학교 그만 다녀야 될 것 같아."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아니, 왜?"
혹시 내가 자꾸 자기랑 하자고 조르는 것 때문인가? 그 뒤에 이어진 세나의 얘기는 내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나......임신했어......"
"뭐!?"
이게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야? 임신이라니?
나에게 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너, 사후피임약 안 먹었어?"
"안 먹었어."
"아니, 내가 분명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안 먹었다니? 이유가 뭐야?"
"나도 처음에는 먹으려고 했었지."
"그런데?"
"아빠가 먹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엥? 갑자기 여기서 아빠가 왜 나와?
"아빠?"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우리 사이를 알고 있더라고. 성관계한 사실까지 전부."
이건 또 뭔 소리야? 세나 아빠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안단 말이야?
"아니, 내가 지금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리가 안 되거든. 너희 아빠가 우리 관계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알면서도 피임약을 먹지 못하게 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나도 그 이유를 물었는데 아빠가 널 우리집의 사위로 맞아들이고 싶다고......"
"뭐? 사위? 니네 아빠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응......"
"아니, 아빠가 그렇게 하라 했다고 해도 그렇지 넌 어떻게 그 말을 그대로 따르냐? 아직 학생 신분이고 너도 마음에도 없는 사람의 아이 배는 건 싫을 거 아니야?"
"......"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당장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애아빠가 될 거라는 소식을 듣다니. 만약 아이를 지우지 않는다면 세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밴 채 과부가 된다는 얘기잖아. 이대로 죽으면 그야말로 나는 파릇파릇한 10대 소녀의 인생을 망치고 저세상으로 도망친 개쓰레기가 된다는 거네. 뭐, 세나를 범한 시점에서 이미 개쓰레기라 불려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런데 의외다. 내가 세나를 범한 사실을 알고서도 세나 아빠가 나를 아직까지 가만히 두다니. 내가 비록 세나 아빠의 목숨을 구한 경력이 있다지만 그 아저씨는 은혜를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벌을 내릴 때는 가차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딸의 임신을 조장하고 자기 딸을 범한 사람을 사위로 삼으려 한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풀가동시키면서까지 추측을 해 보고 있는데 하나같이 개연성이 없는 일들 뿐이라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 아저씨가 혹시 자기 딸을 범한 나를 엿먹이기 위해 뭔가 큰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옛날부터 날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기는 했었는데 엿먹일 기회를 엿보고 있다 적기가 찾아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아이가 생긴 걸 지금 나한테 제일 처음 말하는 거야?"
"아니. 아빠한테 가장 먼저 알렸지. 그러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온 거야. 널 집에 데리고 오래."
삼자대면이 따로 없구만.
"지금 바로?"
"지금 당장."
나는 시계를 보았는데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았다. 9시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보나마나 긴 얘기를 할 게 뻔하니 금방 흘러가 버릴 시간이다. 만약을 위해 오늘 하루 증거를 잡는 걸 미루고서 미션을 완수하고 가는 게 안전하겠지만 원치도 않는 임신을 한 것 때문에 심적 충격을 크게 받았을 애한테 3번 질싸하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돌아 버리겠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니. 지금 세나의 축 쳐진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차마 못 가겠다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지. 어떻게든 9시가 되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오도록 노력해 보는 수밖에. 다른 곳에서 비명횡사라도 했다간 모처럼 집에 설치한 증거 포착용 카메라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돼 버린다.
"그래. 알았어. 지금 바로 가자."
나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는데 세나는 여전히 앉은 채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래? 안 가?"
"혹시 이거 지금 몰카라고 의심하는 거야?"
"뭐?"
난 그런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뭐야, 이거 몰카였어?"
"아니. 그건 진짠데. 너무 선선히 가자고 하는 게 좀 의외라서. 게다가 당황하는 것도 잠깐이고 왜 그렇게 침착해?"
요즘 워낙 산전수전을 잔뜩 겪다 보니 멘탈이 강철급까지는 아니더라도 플라스틱에서 구리급으로 단단해진 모양이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확실히 위화감이 느껴지긴 하네. 분명 엄청난 얘기를 들었는데도 멘탈이 나가는 시늉도 하지를 않아 오히려 당사자인 내가 더 무서워질 지경이다. 아무튼 나는 세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옆에 서서 걸었는데 세나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입을 풀로 붙인 것 마냥 서로 아무 대화도 없었지만 딱히 어색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 때까지는 침착한 나였지만 막상 세나 집 앞으로 오니 슬슬 긴장감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세나 아버지를 직접 본 건 중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이다. 세나 어머니와 같은 이유로 그 때도 그냥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 얘기까지 나눈 건 중학교 입학 전이 마지막이다. 그 아저씨가 예전부터 내게 호의적인 편이긴 했지만 자기 딸을 혼전 임신시킨 지금도 그럴 거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내 심중을 어느 정도 눈치챘는지 세나가 말했다.
"걱정 마. 아빠 보니까 화난 눈치는 아니었어."
"흠흠! 걱정은 무슨. 어서 들어가자."
나는 세나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세나 어머니였다.
"어서 오렴, 세윤아."
"아, 네."
나도 모르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세나 어머니도 알고 계시려나? 세나 아버지한테만 신경 쓰느라 세나한테 어머니한테도 얘기했냐고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 분위기를 보니 세나 어머니는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듯 했다. 혹시 말 안 했나? 세나 어머니가 안내했는데 세나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계셨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음, 오랜만이구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세나 말대로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하게 내 방으로 가자꾸나."
"예? 아, 네......"
세나 아버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세나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우린 올라가 보리다."
"네, 여보."
세나 아버지는 서재로 보이는 것으로 날 데려와 앉히고 마주 보는 위치에 앉으셨다.
"오기 전에 세나한테 얘기는 다 들었겠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절 사위로 삼고 싶으시다고 하셨다면서요."
"네가 내 딸이 품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나에겐 사위가 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
"그 전에 세나와 우리의 관계를 아시고 피임까지 하지 말라 하셨다던데 그건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불려온 쪽이 기가 죽기 마련인데 어째 내가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구나."
이 집에 발을 들이기 직전만 해도 긴장감이 엄습해 왔었는데 지금은 뭔가에 씌이기라도 한 것처럼 긴장감은 커녕 영문을 모르겠는 근자감까지 생겼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해진데다 그걸 넘어서 냉정해지기까지 하다니. 나 혹시 미친 거 아닐까?
"아, 죄송합니다. 여기 오는 내내 생각해 봤는데 아저씨가 왜 그러셨는지 짐작이 가질 않아서."
"우리 세나랑 너 말이다. 어렸을 때는 참 친했고 너도 우리집에 자주 와서 놀고 그러지 않았느냐? 근데 나이를 먹으며 진학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이 서로에게 많이 소원해진 것 같더구나."
알고 계셨었구나. 하긴 중학교 올라와서부터는 한 번도 집에 찾아오지를 않았으니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만 하지.
"세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많이 변했지?"
연약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초딩 시절의 세나는 마치 탈피를 하듯이 중학생이 되면서 당당한 인기인으로 급부상을 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몸져누워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세나가 그렇게 변한 데에는 이유가 있단다."
"이유요?"
"초등학교 때 네가 세나를 괴롭히는 애들을 혼내 주면서 대신 왕따 역할을 자처하지 않았느냐? 그 후로 세나를 멀리한 것도 예전처럼 애들의 표적이 될까 봐 그런 거고."
아저씨가 꽤 자세히 알고 있네. 세나가 구구절절 설명한 건가?
"그런데 세나가 그러더구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 너와 멀어지는 게 더 힘들다고 말이다."
"세나가 그랬다고요?"
뭐, 어렸을 적 세나라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세나는 중학교에 올라가면 다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거다. 그러면 네가 또 세나 대신 괴롭힘의 표적이 되는 걸 자처할 필요도 없을 테고 다시 예전처럼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도 네가 계속 거리를 두는 바람에 그게 마음의 상처가 많이 됐던 모양이더구나."
"아, 그건......"
모처럼 세나가 인기인이 됐는데 나 같은 찐따가 괜히 아는 척했다간 걔 이미지에 손상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였는데.
"고등학교 진학만 해도 그렇다. 세나 성적이면 더 좋은 학교로 갈 수도 있는 것을 너와 같은 학교로 가고 싶다는 이유로 그 학교에 입학을 한 거야."
"그게 정말이에요?"
놀랄 노 자다. 나랑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이유로 더 좋은 학교 진학을 포기했다니. 하긴 나도 그 부분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하다. 솔직히 우리 학교가 공부 잘하는 애들이 가는 곳은 아닌데 세나처럼 성적이 상위권에 속하는 애가 굳이 이런 학교를 택하다니. 그 때는 그냥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학교가 가까워서 등하교가 편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여겼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럼 고등학교에 올라올 때까지도 세나는 나랑 다시 친해지고 싶었단 말이잖아. 하지만 나랑 가까워지고 하는 낌새는 전혀 눈치 못 챘는데. 게다가 아무리 친해지고 싶다고 해도 그렇지 보통 본인 스펙보다 떨어지는 학교를 자처해서 가는 경우도 있나?
"이 얘기는 본래 세나가 본인 입으로 해야 하는 거지만 이대로라면 영영 스스로 말을 못 꺼낼 것 같아서 내가 대신 얘기하마. 세나는 세윤이 너를 남자로 보고 있다."
'그럼 내가 남자지 여자에요?'라는 말장난은 하지 말자. 그래서 너무 말이 안 돼 기가 찼다.
"세나가 절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씀이세요?"
"좋아하는 감정 이상이다. 그 아이는 너와의 먼 미래까지도 염두해 두고서 언제나 너를 생각하며 혼자서 기뻐하고 슬퍼한단다. 오히려 보는 내 쪽이 더 괴로울 만큼 애처롭더구나."
"세나가 직접 아저씨한테 그렇게 얘기한 거에요?"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럼 지금 한 말이 모두 당사자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걸 멋대로 지레짐작하고 한 거란 말이야? 아무래도 너무 이건 너무 넘겨짚는 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저를 세나랑 엮으려고 하셨던 거에요?"
"너도 세나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 짓을 했을 게 아니냐?"
"아니, 그건......"
엑스에 관한 걸 설명하면 믿어 주시려나? 설사 믿어 준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자기 딸을 범했다는 것을 알면 나를 생매장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난 마음도 없는데 그런 척 구라를 까는 것도 양심에 찔리고. 아, 돌아 버리겠네.
"벌써 3주째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배도 불러오고 할 세나한테 계속 학교를 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육체적으로 지치는 것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것이다. 벌써부터 학교 친구들이 세나 보고 발랑 까졌다느니, 걸레라느니 하며 쑥덕거리는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다. 잘 모르는 놈들은 있지도 않은 얘기를 지껄여대며 소문을 부풀리기까지 하겠지. 남친의 존재, 원조 교제, 유흥업소 등등 아주 소설을 쓰지 않을까?
"그럼 세나에게 중퇴를 하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래야겠지. 뭐,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학교 측에 조치를 취할 테니 염려할 것 없지만 그 때문에 너에게도 할 얘기가 있단다."
얘기?
"네가 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식을 올렸으면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저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싶으신 거에요?"
"딸이 상사병에 시달리는 걸 아비로서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 아니냐? 너밖에 눈에 안 들어온다면 붙여줘서라도 그 병을 낫게 해 줘야지."
세나를 범한 나도 나지만 이 아저씨, 일을 벌이는 스케일이 남다른 거 아니야? 딸 상사병을 치료해 주기 위해서 그 남자의 아이를 딸에게 혼전 임신하게 하다니. 그렇다고 해도 이 가족들에겐 미안하지만 난 세나를 책임질 수 없다. 난 지금 엑스에게 휘둘리고 있는 몸. 언제 어디서 내 친구들 현준이, 태원이, 종원이처럼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지금도 아슬아슬하다. 오늘밤 9시까지 세나에게 질내사정을 3번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난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엑스가 직접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집에 설치한 카메라로 영상을 확보해서 증거를 남겨야 하는데 이대로 얘기가 계속 길어지면 9시 전에는 집에 절대 못 돌아간다. 그렇다고 이런 중요한 얘기를 하는 도중에 급한 일이 있으니 이만 가 보겠다고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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