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녀는... 1
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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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3 16:29
아주 오래 전,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알았다.
아니, 인식했다.
작대기 하나로 정말 힘이 없던 군 시절이었다. 나는 포병 출신인데, 당시 우리
포대에 아주 특별한 왕고가 있었다. 왕고는 말은 포대 내에서 가장 짬밥이 많은
고참이었고, 전역이 멀지 않은 말년병장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많은 걸 그룹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너튜브까지
포함해서 볼거리가 많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을
통해서 젊고 예쁜 여자들을 보는 것은 지금과 다를지 않을 터...
그러나 우리 특별한 왕고는 일반적인 군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말년 병장이었지만,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내무반 TV 리모컨은 항상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간단히 TV 채널 선택에 대한 자유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오래되어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하면서도 특이했던
왕고는 항상 시사와 다큐, 혹은 교양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그래서 왕고가 있던
내무반은 언제나 을씨년스러웠다.
짧은 치마로 탱탱한 허벅지를 보여주는 처녀들을 볼 수 없었기에 대다수 병사들
은 왕고가 존재하는 내무반이 아닌, 다른 내무반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왕고와 나는 소위 짬밥 차이가 어마어마했기에 말 한 마디 나눌 기회가 없었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왕고가 나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나 역시 왕고
에게 다가갈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주말 오후에 탄약고 근무를 서고 총기를 반환 한 후, 군장을 풀고 환복을
위해서 내무반으로 들어갔는데, 아주 이례적으로 족히 40명 정도가 생활하는 그
넓은 내무반에서 오로지 왕고만이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20명이 넘는 인원들은 연병장에서 땀을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고, 또 일부는 면회
혹은 PX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며, 또 일부는 다른 내무반에서 오침을 하
거나 TV를 시청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렇게 넓은 내무반에서 왕고 홀로 TV 시청을 하고 있는 그림은 그 누구도 상상 하
지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당시에 군장을 풀면서 매우 긴장
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괜한 소음으로 왕고의 심기를 건들일까 걱정을 했었다.
나름 조심스런 행동으로 군장을 풀고, 환복을 하면서 왕고가 보는 TV를 쳐다보았고,
예상대로 왕고의 취향은 예능이 아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EBS에서
하는 교양프로그램이었는데,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환복을 마치고 천천히 침상으로 내려왔다. 나 역시 여타의 선임들처럼 다른 내무반으로
가서 TV 시청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왕고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본다. 그
리고 말을 걸었다.
“야... 너 이리 와봐.”
갑작스런 왕고의 부름... 그리고 나는 관등성명을 외치며 급하게 그에게 뛰어갔다.
“앉아서 봐.”
왕고는 나에게 침상에 걸터앉을 것을 명했다. 그리고 졸지에 그 넓은 내무반에서 왕고와
단 둘이 TV 시청을 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그 전까지 왕고와 무언가를 함께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매우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
침묵이 이어졌고, 내 눈은 TV를 바라보고 있지만, 도대체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으로는 화면을 받아들이지만, 머리로는 전혀 기억이 되지 않는 상황이 이
어 졌고, 왕고와 나는 정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음...”
10분? 15분 지났으려나? 아니... 20분이려나?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살기 위해서 헛기침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왕고가 고개
를 돌려서 나를 쳐다본다.
“재미없어? 다른거 볼까?”
아... 아닙니다.
대답과 다르게 왕고는 채널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가 선택한 건, 예능이나 오락이 아니었다.
“오호... ”
채널을 돌린 왕고가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난 왕고가 탄성을 내뱉었던 채널... 아니, 그때 방영했던 프로그램을 정확
히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밝힐 수가 없다.
그리고 오래 전, 나는 처음으로 TV를 통해서 그녀를 알았다.
아니, 보았다.
“이야... 너 이름 뭐라고 그랬지?”
왕고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나에게 질문을 했고, 난 다시 한 번 관등성명으로 대답을
해야 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왕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TV의 화면으
로 시선을 돌렸는데, 당시에 왕고의 눈빛은 괴이할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야...”
이병.... 최영민. 왕고의 부름에 관등성명을 다시 외쳤는데, 이 글에서는 가명이다.
“저 여자 어때?”
왕고가 TV 화면 속에 나오는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TV에 출연하는
그 여자는 걸 그룹도 아니었고, 연예인도 아니었다. 흔히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기품이 있고, 지식이 있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간단히 왕고나 나의 나이를
대비해서는 큰 누나뻘로 보이는 예쁜 아줌마였다.
“괜찮지 않냐? 난... 진짜 저런 스탈이 참 좋더라.. 말도 잘하잖아.”
왕고는 TV 속 예쁜 아줌마를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했다. 물론, 우리
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기는 했고, 연예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예쁘장한 얼굴을 가
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애들.... 대가리에 똥만 들었어... 물론 아닌 애들도 있겠지만....”
분명 지금까지 왕고와 나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듣든 말든, 왕고는 TV 화면을
쳐다보면서 입을 쉬지 않았다.
“난 저렇게 배운 사람이 좋더라... 나이 좀 있으면 어때? 스타일 좋고... 스타킹 죽이지
않냐? 얇은 발목에... 하이힐... 성숙한 느낌에... 이게 여자거든....“
왕고의 별명이 ‘또라이 새끼’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왕고의 말에 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 떠들었다. 시발... 이거 맞장구라도 쳐야하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졌는데...
“야? 너 여자 친구는...”
네.... 있습니다. 비록 군인 신분이지만, 입대 전에 2년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지방 거점 국립대에 다녔던 나는 동기였던 여자 친구와 과에서 유명한 CC 였고, 운이
좋게도 동기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사진 가져와 봐.”
군대에서 선임의 말은 곧 법이었다. 특히 왕고의 말은 절대적으로 거역할 수 없었고,
난 품에서 꺼낸 지갑 속에서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을 왕고에게 건넸다. 왕고는 잠시
동안 사진을 보더니, 다시 나에게로 돌려주며 말했다.
“예쁘네... 얼마나 됐냐?”
2년 됐습니다.
“군대에서 일말상초는 진리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이런 개/새끼가.., 이등병이었지만, 일말상초라? 내 여자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믿고 또 믿었다. 그런데 있지도 않을 일 가지고 저주를 내리는 왕고라니... 사회였으면,
죽빵 한 대 정도는 갈겨 줄 텐데 말이다.
“네 여자 친구도 나쁘지 않은데... 난 왜 이리 저 아줌마가 좋을까?”
어라...이 시/발놈이. 네가 왕고면 왕고지 무슨 자격으로 내 여자를 평가 하냐.
주먹이 울었다. 군대만 아니었다면, 저런 새끼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데...아..씨/발.
진짜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사람 하나 살렸다.
“너 내가 졸라 병/신처럼 보이지?”
왕고의 말에 속을 들킨 것 같았다. 당연히 병/신 같이 보이기는 하지...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침묵을 할 뿐.
“형이 군대 오기 전에 100명도 넘게 따먹어 봤는데... 아줌마가 제일 맛있어.”
군대에서 이런 병/신 같은 새끼한테, 이런 병/신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다니,
심지어 병/신 같은 새끼가 병/신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대꾸조차 할 수 없는 위치라니.
“다 형이 인생 경험해보고 하는 말이야...”
씨/발... 니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았다고? 1년? 길어야 2년?
“이병 찌끄레기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건 그렇고 저 년 진짜 먹고 싶다.”
왕고는 TV 화면에 나오는 예쁜 아줌마를 두고 연신 입맛을 다셨다.
이래서 왕고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마 그 후로도 10분
이상 내무반에서 단 둘이 TV 시청을 했던 것 같다.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왕고가 전역을 했고, 나는 그저 묵묵하게 군 생활
을 이어 나갔다. 나름 힘들다면 힘들었던 군 시절은 주기적으로 오는 여자 친구
의 편지를 버팀목 삼으면서 이겨 나갔고,
오랜 만에 휴가를 나가면, 여자 친구와 좋은 추억을 만들면서 군 생활의 고통을
지워 나갔다. 그리고 안 올 것 같았던 나의 전역 날은 결국 다가왔고, 지긋 지긋한
군복을 드디어 벗어버릴 수 있었다.
전역을 한 나는 바로 대학 복학 준비를 했는데,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기 때문에,
3학년으로 복학을 해야 했고, 같은 동기였던 여자 친구는 졸업을 한 후, 곧바로 취업
에 성공했다.
심지어 S자로 시작하는 대기업에 말이다. 지난 2년 간 떨어져 지냈기에 조금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군 입대 및 전역과 여자 친구의 졸업 및
취업이 엇갈리면서 다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기를 맞아야 했다.
“자주 내려올게...”
여자 친구는 고향에 자주 내려올 것임을 약속하면서 수원으로 떠났고, 나는 3학년이
지만 새로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도 빨리 대학 2년을 마치고, 여자 친구처럼 S자
로 시작하는 대기업에 취직하리라 다짐하면서....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도 여자 친구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군인
일 때처럼 어느 특정 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면 생각보다는 자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사회생활에 힘들어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와의 미래를 꿈 꿀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빨리 시간이 흘러서 내가 취업을 하길 바랐고, 그건 나 역시 바라던
바였다. 조금만 버티면... 평생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기에 충실한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간은 군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렀고, 내가 전역을 한 지도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어느 겨울 날...이었지 싶다.
오랜 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TV를 보기 위해서 여러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예능, 뉴스, 영화 채널 등 그저 흥미로운 장면이 보일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아니, 여자가 있었다.
족히 3년은 됐을 것이었다. 병/신 같던 왕고가 매력적이라며 극찬을 했던 예쁜 아줌마
가 TV 화면에 나오고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왕고는 따먹고 싶다고 했었다.
헛...허..허.
그 왕고 새끼를 생각하니, 이유모를 헛웃음이 나왔다. 취향이라는 것이 존중이라지만,
새파랗고 젊은 여자들이 천지인데... 저런 아줌마가 무엇이라고... 옛 왕고를 생각하면서
그 예쁜 아줌마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한동안 시청했는데...
한 가지는 나도 인정할 수 밖 에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여유를 가지고 가만히 지켜
보니까, 나름 외모도 괜찮았지만, 목소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발음도 명확하고 정확
했기에 눈만 감고 들으면 마치 성우인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TV 속에 나오는 그녀는 역시나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다.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또한 무슨 내용인지, 전부 기억이 나긴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밝힐 수는 없다.
왜 그럴까?
그 예쁜 아줌마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가 TV 화면을 보고
소리를 지르셨다.
“어머머머머... 또 나왔네.... 또 나왔어!”
또 나왔네? 또 나왔어?
설마 어머니가 아는 사람인가? 지금 TV에 나오는 그 예쁜 아줌마가?
어머니는 황급히 소파에 자리를 잡으시고, 나에게 볼륨을 올릴 것을 재촉하셨다. 그리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와 함께 더불어 양손은 감격의 박수로 춤을 췄다.
“영민아... 너 정말 누군지 몰라? 기억 안나?”
아무것도 몰라서 어리둥절한 나에게 어머니가 오히려 그 예쁜 아줌마의 존재를 묻는다.
몰라요... 몰라. 저 아줌마가 누군데?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니 이모잖아... 이모. 기억 안나?”
아니.... 저 예쁜 아줌마가 내 이모라고????????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내 이모라고?????
그렇게 오래 전, 나는 처음으로 TV를 통해서 이모를 알았다.
아니, 인지했다.
그건 그렇고,
씨.발 왕고 새끼.... 그럼 그때 나한테 패 드립 친 거야?
이 개/새끼가...
... 이어서.
아니, 인식했다.
작대기 하나로 정말 힘이 없던 군 시절이었다. 나는 포병 출신인데, 당시 우리
포대에 아주 특별한 왕고가 있었다. 왕고는 말은 포대 내에서 가장 짬밥이 많은
고참이었고, 전역이 멀지 않은 말년병장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많은 걸 그룹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너튜브까지
포함해서 볼거리가 많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을
통해서 젊고 예쁜 여자들을 보는 것은 지금과 다를지 않을 터...
그러나 우리 특별한 왕고는 일반적인 군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말년 병장이었지만,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내무반 TV 리모컨은 항상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간단히 TV 채널 선택에 대한 자유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오래되어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하면서도 특이했던
왕고는 항상 시사와 다큐, 혹은 교양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그래서 왕고가 있던
내무반은 언제나 을씨년스러웠다.
짧은 치마로 탱탱한 허벅지를 보여주는 처녀들을 볼 수 없었기에 대다수 병사들
은 왕고가 존재하는 내무반이 아닌, 다른 내무반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왕고와 나는 소위 짬밥 차이가 어마어마했기에 말 한 마디 나눌 기회가 없었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왕고가 나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나 역시 왕고
에게 다가갈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주말 오후에 탄약고 근무를 서고 총기를 반환 한 후, 군장을 풀고 환복을
위해서 내무반으로 들어갔는데, 아주 이례적으로 족히 40명 정도가 생활하는 그
넓은 내무반에서 오로지 왕고만이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20명이 넘는 인원들은 연병장에서 땀을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고, 또 일부는 면회
혹은 PX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며, 또 일부는 다른 내무반에서 오침을 하
거나 TV를 시청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렇게 넓은 내무반에서 왕고 홀로 TV 시청을 하고 있는 그림은 그 누구도 상상 하
지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당시에 군장을 풀면서 매우 긴장
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괜한 소음으로 왕고의 심기를 건들일까 걱정을 했었다.
나름 조심스런 행동으로 군장을 풀고, 환복을 하면서 왕고가 보는 TV를 쳐다보았고,
예상대로 왕고의 취향은 예능이 아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EBS에서
하는 교양프로그램이었는데,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환복을 마치고 천천히 침상으로 내려왔다. 나 역시 여타의 선임들처럼 다른 내무반으로
가서 TV 시청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왕고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본다. 그
리고 말을 걸었다.
“야... 너 이리 와봐.”
갑작스런 왕고의 부름... 그리고 나는 관등성명을 외치며 급하게 그에게 뛰어갔다.
“앉아서 봐.”
왕고는 나에게 침상에 걸터앉을 것을 명했다. 그리고 졸지에 그 넓은 내무반에서 왕고와
단 둘이 TV 시청을 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그 전까지 왕고와 무언가를 함께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매우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
침묵이 이어졌고, 내 눈은 TV를 바라보고 있지만, 도대체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으로는 화면을 받아들이지만, 머리로는 전혀 기억이 되지 않는 상황이 이
어 졌고, 왕고와 나는 정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음...”
10분? 15분 지났으려나? 아니... 20분이려나?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살기 위해서 헛기침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왕고가 고개
를 돌려서 나를 쳐다본다.
“재미없어? 다른거 볼까?”
아... 아닙니다.
대답과 다르게 왕고는 채널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가 선택한 건, 예능이나 오락이 아니었다.
“오호... ”
채널을 돌린 왕고가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난 왕고가 탄성을 내뱉었던 채널... 아니, 그때 방영했던 프로그램을 정확
히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밝힐 수가 없다.
그리고 오래 전, 나는 처음으로 TV를 통해서 그녀를 알았다.
아니, 보았다.
“이야... 너 이름 뭐라고 그랬지?”
왕고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나에게 질문을 했고, 난 다시 한 번 관등성명으로 대답을
해야 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왕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TV의 화면으
로 시선을 돌렸는데, 당시에 왕고의 눈빛은 괴이할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야...”
이병.... 최영민. 왕고의 부름에 관등성명을 다시 외쳤는데, 이 글에서는 가명이다.
“저 여자 어때?”
왕고가 TV 화면 속에 나오는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TV에 출연하는
그 여자는 걸 그룹도 아니었고, 연예인도 아니었다. 흔히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기품이 있고, 지식이 있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간단히 왕고나 나의 나이를
대비해서는 큰 누나뻘로 보이는 예쁜 아줌마였다.
“괜찮지 않냐? 난... 진짜 저런 스탈이 참 좋더라.. 말도 잘하잖아.”
왕고는 TV 속 예쁜 아줌마를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했다. 물론, 우리
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기는 했고, 연예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예쁘장한 얼굴을 가
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애들.... 대가리에 똥만 들었어... 물론 아닌 애들도 있겠지만....”
분명 지금까지 왕고와 나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듣든 말든, 왕고는 TV 화면을
쳐다보면서 입을 쉬지 않았다.
“난 저렇게 배운 사람이 좋더라... 나이 좀 있으면 어때? 스타일 좋고... 스타킹 죽이지
않냐? 얇은 발목에... 하이힐... 성숙한 느낌에... 이게 여자거든....“
왕고의 별명이 ‘또라이 새끼’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왕고의 말에 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 떠들었다. 시발... 이거 맞장구라도 쳐야하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졌는데...
“야? 너 여자 친구는...”
네.... 있습니다. 비록 군인 신분이지만, 입대 전에 2년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지방 거점 국립대에 다녔던 나는 동기였던 여자 친구와 과에서 유명한 CC 였고, 운이
좋게도 동기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사진 가져와 봐.”
군대에서 선임의 말은 곧 법이었다. 특히 왕고의 말은 절대적으로 거역할 수 없었고,
난 품에서 꺼낸 지갑 속에서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을 왕고에게 건넸다. 왕고는 잠시
동안 사진을 보더니, 다시 나에게로 돌려주며 말했다.
“예쁘네... 얼마나 됐냐?”
2년 됐습니다.
“군대에서 일말상초는 진리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이런 개/새끼가.., 이등병이었지만, 일말상초라? 내 여자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믿고 또 믿었다. 그런데 있지도 않을 일 가지고 저주를 내리는 왕고라니... 사회였으면,
죽빵 한 대 정도는 갈겨 줄 텐데 말이다.
“네 여자 친구도 나쁘지 않은데... 난 왜 이리 저 아줌마가 좋을까?”
어라...이 시/발놈이. 네가 왕고면 왕고지 무슨 자격으로 내 여자를 평가 하냐.
주먹이 울었다. 군대만 아니었다면, 저런 새끼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데...아..씨/발.
진짜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사람 하나 살렸다.
“너 내가 졸라 병/신처럼 보이지?”
왕고의 말에 속을 들킨 것 같았다. 당연히 병/신 같이 보이기는 하지...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침묵을 할 뿐.
“형이 군대 오기 전에 100명도 넘게 따먹어 봤는데... 아줌마가 제일 맛있어.”
군대에서 이런 병/신 같은 새끼한테, 이런 병/신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다니,
심지어 병/신 같은 새끼가 병/신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대꾸조차 할 수 없는 위치라니.
“다 형이 인생 경험해보고 하는 말이야...”
씨/발... 니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았다고? 1년? 길어야 2년?
“이병 찌끄레기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건 그렇고 저 년 진짜 먹고 싶다.”
왕고는 TV 화면에 나오는 예쁜 아줌마를 두고 연신 입맛을 다셨다.
이래서 왕고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마 그 후로도 10분
이상 내무반에서 단 둘이 TV 시청을 했던 것 같다.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왕고가 전역을 했고, 나는 그저 묵묵하게 군 생활
을 이어 나갔다. 나름 힘들다면 힘들었던 군 시절은 주기적으로 오는 여자 친구
의 편지를 버팀목 삼으면서 이겨 나갔고,
오랜 만에 휴가를 나가면, 여자 친구와 좋은 추억을 만들면서 군 생활의 고통을
지워 나갔다. 그리고 안 올 것 같았던 나의 전역 날은 결국 다가왔고, 지긋 지긋한
군복을 드디어 벗어버릴 수 있었다.
전역을 한 나는 바로 대학 복학 준비를 했는데,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기 때문에,
3학년으로 복학을 해야 했고, 같은 동기였던 여자 친구는 졸업을 한 후, 곧바로 취업
에 성공했다.
심지어 S자로 시작하는 대기업에 말이다. 지난 2년 간 떨어져 지냈기에 조금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군 입대 및 전역과 여자 친구의 졸업 및
취업이 엇갈리면서 다시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기를 맞아야 했다.
“자주 내려올게...”
여자 친구는 고향에 자주 내려올 것임을 약속하면서 수원으로 떠났고, 나는 3학년이
지만 새로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도 빨리 대학 2년을 마치고, 여자 친구처럼 S자
로 시작하는 대기업에 취직하리라 다짐하면서....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도 여자 친구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군인
일 때처럼 어느 특정 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면 생각보다는 자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사회생활에 힘들어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와의 미래를 꿈 꿀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빨리 시간이 흘러서 내가 취업을 하길 바랐고, 그건 나 역시 바라던
바였다. 조금만 버티면... 평생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기에 충실한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간은 군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렀고, 내가 전역을 한 지도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어느 겨울 날...이었지 싶다.
오랜 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TV를 보기 위해서 여러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예능, 뉴스, 영화 채널 등 그저 흥미로운 장면이 보일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아니, 여자가 있었다.
족히 3년은 됐을 것이었다. 병/신 같던 왕고가 매력적이라며 극찬을 했던 예쁜 아줌마
가 TV 화면에 나오고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왕고는 따먹고 싶다고 했었다.
헛...허..허.
그 왕고 새끼를 생각하니, 이유모를 헛웃음이 나왔다. 취향이라는 것이 존중이라지만,
새파랗고 젊은 여자들이 천지인데... 저런 아줌마가 무엇이라고... 옛 왕고를 생각하면서
그 예쁜 아줌마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한동안 시청했는데...
한 가지는 나도 인정할 수 밖 에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여유를 가지고 가만히 지켜
보니까, 나름 외모도 괜찮았지만, 목소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발음도 명확하고 정확
했기에 눈만 감고 들으면 마치 성우인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TV 속에 나오는 그녀는 역시나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다.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또한 무슨 내용인지, 전부 기억이 나긴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밝힐 수는 없다.
왜 그럴까?
그 예쁜 아줌마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가 TV 화면을 보고
소리를 지르셨다.
“어머머머머... 또 나왔네.... 또 나왔어!”
또 나왔네? 또 나왔어?
설마 어머니가 아는 사람인가? 지금 TV에 나오는 그 예쁜 아줌마가?
어머니는 황급히 소파에 자리를 잡으시고, 나에게 볼륨을 올릴 것을 재촉하셨다. 그리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와 함께 더불어 양손은 감격의 박수로 춤을 췄다.
“영민아... 너 정말 누군지 몰라? 기억 안나?”
아무것도 몰라서 어리둥절한 나에게 어머니가 오히려 그 예쁜 아줌마의 존재를 묻는다.
몰라요... 몰라. 저 아줌마가 누군데?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니 이모잖아... 이모. 기억 안나?”
아니.... 저 예쁜 아줌마가 내 이모라고????????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내 이모라고?????
그렇게 오래 전, 나는 처음으로 TV를 통해서 이모를 알았다.
아니, 인지했다.
그건 그렇고,
씨.발 왕고 새끼.... 그럼 그때 나한테 패 드립 친 거야?
이 개/새끼가...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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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Comments
전개가 좋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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