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2
고스트박
15
540
9
0
09.27 22:21
그날은 퇴근이 평소보다 늦었다.
타설이 끝나지 않았다.
저녁을 넘기고 밤 아홉 시가 가까워졌는데도 펌프카는 돌아가고 있었다. 현장 조명 아래로 콘크리트가 쏟아졌고, 작업자들은 굳은 얼굴로 자기 자리를 지켰다.
나는 몇 번이나 시계를 봤다.
평소에도 시계는 봤다.
언제 끝나나 싶어서.
그날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어제 그녀가 들어온 시간이 몇 시쯤이었더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아홉 시 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열 시쯤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고작 한 번 대화한 여자였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심지어 오늘 들어오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내일이 보통이면 또 들어올게요.’
그게 전부였다.
나는 안전모를 벗어 손에 들었다.
휴대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집에 가야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왔는지.
안 왔는지.
그래서 기다리는 일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처럼 확인하고 싶을 때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사람을 조금 더 오래 생각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현장이 끝난 건 열 시가 가까워서였다.
나는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피곤했다.
그냥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하고 도시락을 사서 먹고 자고 싶었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자 이상하게 정신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별것 아니다.
그냥 컴퓨터 켜보는 거다.
어제 만들었던 방을 오늘도 만드는 것뿐이다.
그녀 때문에 서두르는 건 아니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빨리 운전했다.
그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원룸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하나는 바로 켜졌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늦었다.
나는 작업복도 벗지 않은 채 컴퓨터 전원부터 눌렀다.
부팅되는 동안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게 없었다.
김치통 하나, 생수, 먹다 남은 햄.
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컴퓨터 화면이 켜졌다.
세이클럽에 접속했다.
어제와 같은 이름으로 방을 만들었다.
「평범한 일상 공유」
그리고 기다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5분.
10분.
나는 괜히 인터넷 창을 하나 더 열었다.
뉴스를 봤다.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채팅방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어제와 똑같았다.
그게 조금 싫었다.
마치 내가 어제 밤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라면 대신 햄을 구웠다.
별 차이는 없었다.
프라이팬에 햄을 올려놓고 뒤집는데 접속음이 났다.
나는 바로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
일부러 햄을 한 번 더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보통의하루.
그 닉네임이 떠 있었다.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나는 바로 인사를 치려다가 손을 멈췄다.
너무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몇 초쯤 지나고 썼다.
나: 오늘도 오셨네요
치고 나니 역시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나는 다시 지우고 싶었지만 이미 전송된 뒤였다.
그녀: 방이 있네요.
나: 원래 이 시간에 켜놔요
거짓말이었다.
어제 처음 만든 방이었다.
그녀: 어제 처음 만든 거 아니에요?
나는 웃었다.
들켰다.
나: 기억하시네요
그녀: 어제 처음이라고 하셨잖아요.
나: 그랬나
또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 늦게 끝나셨어요?
나: 네. 타설이 좀 늦었어요
그녀: 타설이 뭐예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
내 일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어제는 건설이라고만 했다.
오늘은 조금 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나: 콘크리트 붓는 거요
그녀: 아.
나: 건물 뼈대 만들 때 콘크리트 치잖아요
그녀: 아 그거.
나: 시작하면 중간에 마음대로 못 끊어요. 그래서 늦어질 때가 있어요
그녀: 추운데 힘들겠네요.
나: 저는 보는 쪽이라 괜찮아요
또 그랬다.
힘들지 않은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왜 이 여자에게 자꾸 괜찮은 척을 할까.
아마 처음에는 잘 보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힘들다고 징징대는 남자처럼 보이기 싫었다.
직장생활도 제법 잘하고 있고, 혼자 경기도 현장에 나와서도 별 탈 없이 지내는 사람.
그런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두 번째 밤이 되자 조금 다른 마음도 생겼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는 게 좋았다.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그 말을 하면 걱정을 구걸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나: 그쪽은요. 오늘도 늦었어요?
그녀: 오늘은 조금 일찍요.
나: 몇 시에 끝났는데요
그녀: 여섯 시 반쯤.
나: 그게 일찍이에요?
그녀: 저한테는요.
나: 무슨 일 하시는데요?
손을 떼고 화면을 봤다.
어제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너무 캐묻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런데 오늘은 물어도 될 것 같았다.
잠시 답이 없었다.
나는 괜히 긴장했다.
혹시 싫은 질문이었나.
그녀: 회사 다녀요.
나는 웃었다.
나: 그건 저도 알아요
그녀: 그 정도만.
나: 비밀이 많으시네
그녀: 아직 두 번째잖아요.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아직 두 번째잖아요.’
그 말은 묘했다.
두 번째밖에 안 됐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세 번째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처럼 들렸다.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다.
나: 그럼 몇 번째쯤 되면 알려줘요
그녀: 글쎄요.
나: 열 번째?
그녀: 너무 많아요.
나: 다섯 번째
그녀: 생각해볼게요.
나는 혼자 웃었다.
햄 타는 냄새가 났다.
그제야 프라이팬이 생각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을 끄고 돌아왔더니 그녀가 써놓았다.
그녀: 또 라면이에요?
나: 오늘은 햄
그녀: 더 안 좋은데요.
나: 밥도 있어요
냉동실에 있던 즉석밥 하나가 생각났다.
사실 아직 데우지도 않았다.
그녀: 김치는요?
나: 있어요
그녀: 그럼 됐네요.
이상한 대화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여자와,
저녁에 뭘 먹는지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는데 김치가 있는지는 알았다.
사는 곳도 모르는데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건 알았다.
얼굴도 모르는데 글을 쓸 때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알았다.
그런 게 쌓이는 게 재미있었다.
나는 문득 사진을 보고 싶었다.
어떤 얼굴인지 궁금했다.
예쁠까.
내 취향일까.
처음 방을 만들었던 목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진 있어요?
그 말을 쓰려다가 멈췄다.
커서가 깜빡였다.
나는 문장을 지웠다.
아직 두 번째잖아요.
조금 전에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맞았다.
아직 두 번째였다.
급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이상한 건,
급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채팅에서 만난 여자와 대화가 조금 통한다 싶으면 나이를 물었을 거고, 어디 사는지 물었을 거고, 사진을 보자고 했을 것이다.
그게 다음 단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고 싶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사라질까 봐.
내가 다른 남자들과 똑같아 보일까 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괜찮아서.
나: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녀: 평범했어요.
나: 닉값 하셨네
그녀: 닉값이 뭐예요?
나는 웃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다들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나: 이름대로 살았다고요
그녀: 보통이었다는 뜻?
나: 네
그녀: 그럼 좋은 거죠.
나: 평범한 게 좋아요?
잠시 답이 없었다.
그녀: 네. 요즘은요.
나: 왜요
그녀: 별일 없는 게 좋잖아요.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별일 없는 게 좋잖아요.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그만뒀다.
어제도 그랬다.
한 발 더 들어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한 발을 멈췄다.
그게 배려였는지 계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정말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나: 그건 맞네요
그녀: 그쪽은요?
나: 뭐가요
그녀: 평범한 게 좋아요?
나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평범한 게 싫었던 것 같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고,
경기도 현장에 나와 일하고,
월급 받고,
주말이면 술을 마시고,
친구 결혼식에 가고.
그렇게 살다가 나이를 먹는 게 싫었다.
그래서 피터팬이라는 닉네임을 썼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여자 앞에서는 안정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나는 참 모순된 인간이었다.
나: 모르겠어요
그녀: 평범한 일상 공유 방장님이 모르시면 어떡해요.
처음으로 그녀가 나를 놀렸다.
나는 웃었다.
나: 제목은 그냥 지은 거라니까요
그녀: 저는 마음에 들어서 들어온 건데.
손이 멈췄다.
나: 제목이요?
그녀: 네.
나: 왜요
그녀: 그냥 평범한 얘기 하고 싶어서요.
나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평범한 얘기.
나는 사실 평범한 얘기를 하려고 방을 만든 게 아니었다.
여자를 만나려고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제목을 믿고 들어왔다.
그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나: 그럼 잘 들어오셨네요
그녀: 그런 것 같아요.
그날 우리는 한 시간을 더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고,
이상형도 아니고,
연애 이야기도 아니었다.
버스를 타면 어느 자리에 앉는지,
아침에 알람을 몇 번 끄는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고를 때 뭘 고르는지,
겨울이 좋은지 여름이 좋은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빨리 갔다.
밤 열두 시가 가까워졌다.
그녀: 이제 자야겠어요.
나는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나: 네. 출근해야죠
그녀: 그쪽도요.
나: 저는 조금 더 있다가요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나가면 나도 잘 생각이었다.
그녀: 방 계속 켜둘 거예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혹시 다른 여자가 들어올까 봐 묻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썼다.
나: 왜요?
그녀: 그냥요.
그녀가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냥.
나는 그 말 뒤에 무슨 뜻이 있는지 자꾸 찾게 됐다.
나: 오늘은 끌게요
그녀: 왜요
나: 방장도 자야죠
그녀: ㅋㅋ
두 번째 웃음이었다.
나: 또 웃으셨네
그녀: 그거 세고 있어요?
나는 뜨끔했다.
나: 아니요
거짓말이었다.
그녀: 세는 것 같은데.
나: 두 번
그녀: 세고 있었네.
나는 모니터를 보며 웃었다.
나: 잘 자요
쓰고 나서 멈췄다.
너무 친근한가.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보냈다.
잠시 뒤 답이 왔다.
그녀: 네. 피터팬도요.
처음이었다.
그녀가 내 닉네임을 불렀다.
피터팬.
채팅창에 늘 떠 있는 이름인데도 그녀가 직접 쓰자 다른 말처럼 보였다.
나: 내일 봐요
나는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또 내가 먼저 내일을 말했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괜히 화면을 보지 않는 척 밥그릇을 치웠다.
접속 종료음이 나기 직전,
한 줄이 올라왔다.
그녀: 내일이 보통이면요.
그리고 그녀가 나갔다.
나는 빈 채팅창을 바라봤다.
어제는 그녀가 나간 뒤에도 방을 한동안 켜두었다.
혹시 다른 여자가 들어올 수도 있었으니까.
그게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그날은 달랐다.
나는 바로 방을 닫았다.
「평범한 일상 공유」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내일 그녀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여자와 대화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두 번째였으니까.
| 이 썰의 시리즈 (총 6건) | ||
|---|---|---|
| 번호 | 날짜 | 제목 |
| 1 | 2026.09.27 | 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7 (11) |
| 2 | 2026.09.27 | 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6 (7) |
| 3 | 2026.09.27 | 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5 (6) |
| 4 | 2026.09.27 | 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4 (9) |
| 5 | 2026.09.27 | 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3 (12) |
| 6 | 2026.09.27 | 현재글 평범했던 유부녀 길들인 이야기 2 (15) |
블루메딕 후기작성시 10,000포인트 증정
Comments

윤지
붉은노을에
거부기와토끼
우주적미아리
박은언덕
대추도
나이젤
은신티모
아체
돌뭉치
김아무무무
이런죈장
모찌잼잼
아베르
엔트리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