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회사 (1)
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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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전
2010년대 초반, 스물셋.
나는 그토록 원하던 전역했다.
당시 유행했던 것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말하는 대로 된다' 같은 자기계발서 류의 문구들이었다.
온 세상이 그런 말들로 도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역을 앞둔 100일 전부터 내 머릿속은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가득 찼다.
제대하면 돈도 엄청나게 벌고, 클럽이든 거리든 여자들을 다 후리고 다닐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만 했다.
물론 근거있는 자신감이었다.
부끄럽지만 내 얼굴은 연애를 쉬지 않을 정도로 나쁘지 않았고, 키는 원래 컸다. 상병 초때 여친이 바람나서 헤어진 뒤로는 독기가 올랐다.
그날부터 PX는 끊고 프로틴만 쳐먹으며 운동까지 죽어라 했으니 하드웨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바로 독립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했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엄청나게 철이 들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도 어느정도 믿어주고 방을 하나 구해 주셨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독립하고 나서 친구에게 롤이라는 게임을 배우고 나서는 인생이 완전히 꼬였다.
반년 가까이 방구석에서 피시방을 전전하며 백수 짓을 했다.
티어는 다이아까지 올릴 수 있었지만, 현실은 점점 시궁창이되어갔다.
슬슬 통장 잔고 바닥을 치고, 두 끼를 계란 넣은 라면으로 연명할 때쯤 되어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돈이 있어야 돼.”
알바 구인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세상에 별의별 알바가 다 있었다.
하지만 한 달 내내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해도 그 당시 시세로는 150만 원도 주는 곳이 드물었다.
"에이, 그래도 내가 낸데."
특급전사 군필, 그리고 이 피지컬로 이런 최저시급 알바를 할 순 없었다.
스크롤을 내리다보니 솔깃한 공고 하나가 화면에 박혔다.
[초보 환영 / 고수익] 금융 TM 부서 사원 모집
근무 조건: 주 5일, 09:00 ~ 17:00 (자율근무 가능)
급여 조건: 기본급 + 각종 수당 + 인센티브 + 대기업 복지 (평균 300~400만 원, 상위권 월 1,000만 원 이상 가능)
교육 혜택: 한달 교육 기간 중 교육비 지급!
특이사항: 영업 경험 없는 초보 대환영. 열정만 있으면 됨.
평균 300? 잘 벌면 1,000만 원?
상방이 뚫려 있다고?
이걸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그 당시 300이면, 대기업 들어갔다고 집안의 자랑이던 사촌 형의 신입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열정하면 원래 임현욱 바로 나였다.
고민할 시간도 아까워 곧바로 이력서를 작성해 면접 날짜를 잡았다.
[오후에 바로 면접 가능하시죠? 편한 복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린 실장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무슨 9시 뉴스 아나운서처럼 나긋나긋하고 친절했다.
난 당장 샤워를 하고, 전역 기념으로 부모님이 맞춰주셨던 정장을 꺼내 입고 면접 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빌딩 안의 회사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다들 귀에 헤드셋을 끼고 쉴 새 없이 전화를 해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떨떨하게 데스크에 서 있는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면접실.
안에는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현욱 씨 맞죠?”
“네, 안녕하십니까.”
“씩씩해서 좋네요. 곧 지점장님 오시니까 앉아 계세요.”
실장이라는 여자의 눈웃음부터가 장난이 없었다.
반쯤 휘어지며 웃는게 괜히 가슴이 살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게임만 하느라 여자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으셨고요?”
“네, 그렇습니다.”
“어머, 말투가 너무 딱딱하시네요. 군인 같아요.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반년쯤 됐는데, 이게 편합니다.”
“하긴, 듬직하긴 하네요.”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내 어깨와 몸을 슥 훑어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50대 남자인 지점장이 들어왔고, 본격적인 형식의 면접이 진행됐다.
“편하게 자기소개 해주세요.”
“안녕하십니까! 군대에서도 특급전사였고, 체력도 좋고, 특히 열정이 가득해서 뭐든 열심히 잘 팔아보겠습니다!”
“역시… 이래서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제맛이라니까. 박 실장?”
“그러네요. 신입사원답게 패기가 넘쳐서 아주 좋아요.”
“감사합니다!”
지점장이 흡족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현욱 씨는 공고 보고 어떤 일인지 대충 알고 왔어요? 우리 회사가 보험 쪽인 건 알죠?”
“네! 영업이라고 들었습니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겠습니다!”
“아, 우리가 보험 영업은 맞는데 발바닥에 땀날 일은 없고… 그 TM이라고 해서, 텔레마케팅 들어봤어요? 그중에서도 아웃바운드인데……”
알고 보니 무슨 회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작정 지원했던 셈이다.
대면으로 직접 만나러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 앉아 전화로 고객을 설득하고 계약을 체결한 뒤 그 건수에 따라 돈을 받는 구조였다.
다행인 건, 그 방식의 차이만 빼면 공고에 적힌 대로 300~1,000만 원씩 벌어가는 직원들이 수두룩하다는 거였다. 개인이 한 만큼 고스란히 가져가는 능력제 사업자라고 했다.
“잘 몰랐지만, 악바리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좋네. 근데 여기가 조금 뭐랄까, 남자가 거의 없어서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첫 직장이라고 했나요?”
“예, 사회생활은 처음이지만 자신 있습니다.”
“박 실장님, 요새 분위기 올릴 만한 실이 몇 실이지?”
“저희 3실입니다.”
“아… 3실…”
지점장의 얼굴에 잠깐 동안 미묘한 안쓰러움과 묘한 웃음이 스쳤다. 그러곤 나를 향해 물었다.
“여자가 열 명이 넘어도, 여초 회사 잘 다닐 수 있어요?”
“예, 그렇습니다!”
땀내와 찌든 짬내만 진동하던 군대 고추밭에서도 2년을 꿋꿋이 버텼는데, 분내나는 여초 직장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나 싶었다.
“자신 있다는 거죠?”
“네! 친한 누나들도 많고 여동생들도 많아서 대화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뭐든 다 잘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고… 그럼 내일 당장 출근 가능해요?”
“네, 그렇습니다!”
“축하해요. 내일 뵙죠.”
지점장이 껄껄 웃으며 악수를 내밀었다. 그러곤 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고는 면접실을 나갔다.
박 실장도 픽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전 박미영 실장이에요. 현욱 씨는 아마 한 달 교육받고 우리 3실로 배정될 거예요. 미리 잘 부탁해요.”
“네, 실장님.”
“아까 뭐든 다 잘할 수 있다고 했죠? 진짜… 뭐든?”
마지막에 던진 그 한마디가 어딘가 서늘하면서도 음흉하게 들렸다.
“네, 뭐든 잘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력서 한 장 들고 보험사 TM 부서에 입성했다.
3실의 유일한 청일점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
전역할 때 내가 다짐했던 돈과 여자 중 반은 확실히 성공할거라는 사실을.
물론 돈은 아니었다.
이름은 만약을 위해 가명으로 바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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