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길에서 있었던 강렬한 사건 이후, 내 머릿속은 온통 베서니 생각뿐이었다. 서른둘 먹도록 비정규직 데스크 알바나 하고 있는 내 인생에, 금발의 미국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자신감을 줬다. 난 내가 뭔가 특별한 남자가 된 줄 알았다.

다음 주 월요일, 학원에서 마주친 베서니는 아무렇지 않게 "Hi, 민준!" 하고 윙크를 날렸다. 그 비밀스러운 신호에 난 또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금요일, 기다리던 카톡이 왔다. "오늘 밤 우리 집으로 올래? 9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당연히 "갈게"라고 답장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복사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다가 뭔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 학원 박 부장이었다. 나이는 쉰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 나오고 머리 까진 아저씨. 와이셔츠 단추는 늘 배 때문에 위태롭고, 쩐내 비슷한 아재 냄새를 풍기는, 내가 제일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 박 부장이 베서니를 상담실로 부르더니 문을 닫는 게 아닌가. '수업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나 보지.'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30분이 지나도록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나온 베서니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블라우스 아랫단이 묘하게 구겨져 있었다. 뒤따라 나온 박 부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내 옆을 지나갔다. 순간 역겨운 기분이 확 치밀었지만, '설마... 아니겠지. 저런 배 나온 아저씨랑? 미국 여자들은 그냥 격의 없이 지내서 그런 걸 거야.'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세뇌했다.

그날 저녁, 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샤워도 두 번이나 하고, 제일 아끼는 속옷을 입고, 9시 정각에 맞춰 베서니의 오피스텔 초인종을 눌렀다. 드디어 오늘, 그 골목길의 아쉬움을 풀고 제대로 그녀를 정복하는 날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온 베서니는 편안한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왔어?"라며 자연스럽게 나를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집 안 공기가 이상했다. 분명히 담배 냄새인데, 내가 아는 그런 담배 냄새가 아니라 훨씬 독하고 묵직한, 시가(cigar) 냄새 같은 게 배어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내가 사 온 와인 옆에, 이미 반쯤 비워진 양주병과 지저분한 유리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내 표정이 굳어지는 걸 봤는지 베서니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 미안. 치우는 걸 깜빡했네. 친구가 잠깐 들렀었어."

친구. 그 단어에서 나는 박 부장의 느끼한 얼굴을 떠올렸다. 애써 무시하며 내가 사 온 와인을 건넸다. 우린 어색하게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내가 슬쩍 분위기를 잡으려고 걔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베서니의 폰이 울렸다.

"잠깐만."

그녀는 폰을 확인하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발신자 이름은 'Mr. Park'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베서니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저 잘 들어왔어요. 네? 아하하, 부장님도 참. 오늘 너무 좋았어요. 네, 네. 다음 주에도 시간 비워놓을게요. 끊어요~"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우리 어디까지 했지?"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박 부장이야?"

"응. 왜?"
베서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 친하게 전화를 받아? 그리고 아까 친구가 왔다 갔다며. 그 친구가 박 부장이었어?"

내 추궁에 베서니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은 마치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는 어른의 그것과 같았다.

"민준, 화났어? 이건 그냥... 비즈니스 같은 거야. 박 부장님이 내 비자 문제도 도와주고, 학원에서 내 스케줄도 편하게 짜주거든. 나도 그 대가를 치르는 거고. 서로 돕고사는 거잖아, 안 그래?"

비즈니스. 대가. 그 단어들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내가 느꼈던 특별함, 로맨스라고 착각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값싼 거래로 전락했다. 그 골목길에서의 뜨거움마저도, 어쩌면 그녀에게는 수많은 '거래' 중 하나였을 뿐이었을까.

"그럼... 나는 뭔데? 나랑 있었던 건 뭔데?"

내 처절한 물음에, 베서니는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눈에는 동정심 따윈 없었다.

"넌 다르지. 넌... 재밌잖아. 귀엽고. 박 부장님 같은 사람들은 날 필요로 하지만, 넌 날 원하잖아. 그 차이, 알겠어?"

그녀는 나를 원한다고 했지만, 그 말은 나에게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참해졌다. 박 부장은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 있는 중년 남성이었고, 나는 그저 그녀의 유흥을 채워주는 '재미있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수치심과 분어,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온몸이 떨렸다. 당장 이 집을 박차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그 '원한다'는 말이, 비록 그것이 값싼 동정일지라도, 나를 붙잡았다.

베서니는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나를 침실로 이끌었다.

"자, 이제 일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재밌게 놀자. 응?"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박 부장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 방에서, 나를 비즈니스 파트너와 유흥 상대로 나누는 그 여자에게 안겼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에게 '재미있는 남자'가 되었다. 가끔씩 그녀가 비즈니스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