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한 군대동기 썰 3
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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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7 16:13
당연히 아버지는 엄마를 처음 본 순간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엄마 또한 아버지의 지적인 외모와 능력에 끌릴 수밖에 없었어요.
두 사람은 바람을 피웠고 결국 아버지의 부인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꽤 많은 위자료와 양육권을 주고서 이혼을 했고 우리 엄마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 그 때문에 아버지를 욕할 생각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난 당연히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 아버지가 이혼을 하신 것도 전적으로 아버지 잘못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처가 쪽에서 부자랍시고 신혼 때부터 좀 잔소리가 심했다고 하더라고요.
병원 거래처도 장인쪽에서 다 정해준 것 같았고 그 때문에 당연히 부부 사이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겠죠.
어쨌든 그렇게 첫 번째 부인과 이혼을 하고 두 분이서 매우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비록 위자료를 많이 주기는 했지만 병원은 이제 완전히 성황이었으니까요.
데리고 있는 의사만도 4명 정도였으니까요.
엄마 입장에서는 고아나 다름없는 고졸의 20살짜리 여자애가 어느 날 갑자기 대형 병원장 사모님이 된 거니까 완전 로또를 맞은 거죠.
아버지와는 나이 차이가 15살이나 나는 게 좀 흠이지만 뭐 30살 차이가 나는 경우도 요즘은 드문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아빠와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사실 아빠가 첫부인과 이혼하기 전부터 엄마 뱃속에 내가 있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겨우 21살의 나이에 나를 낳았습니다.
아마 내 친구들 엄마들 중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젊고 예뻤을 겁니다.
어쨌든 두 분의 결혼에 대해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사람은 바로 내 친할머니였어요.
친할머니의 경우에는 당연히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부잣집에 대학까지 나온 며느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고졸에 아무 것도 없는 여자가 나타나서는 소위 말하는 조강지처를 쫓아내고 말았으니까요.
다행히 태어난 애가 남자인 나라서 망정이었지 아마 딸이었다면 엄마는 할머니 등살에 벌써 이혼했을지도 몰라요.
다행히 딸이 아니라 남자애인 내가 태어나자 할머니의 엄마에 대한 미움(?)도 많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형님도 알다시피 그 나이 때의 할머니는 대를 이을 손자라면 꼬박 죽잖아요?
사실 첫번째 며느리와도 그 때문에 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는 아들을 하나 더 낳았으면 하는데 그 때쯤에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에는 부부 관계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뭐 달을 봐야 별을 따지 않겠어요?
엄마에게 있어서 또 다른 다행이었던 점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똑똑했다는 거였어요.
아까도 말했죠.
유치원 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피아노 학원을 보냈는데 의외로 내게 엄청 재능이 있었거든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웬만한 콩쿨에는 다 나가서 거의 다 대상 아니면 1등상을 탔던 것 같아요.
게다가 피아노는 물론이고 공부도 엄청 잘했으니까요.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거든요.
뭐 대충 분위기를 보면 아실 테지만 엄마에게는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자신은 겨우 여상밖에 나오지 않은 고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들이 이렇게 똑똑하니까 엄마에게는 또 다른 꿈이 생긴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 날 SKY대학에 그것도 의대에 보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 때쯤에는 아버지도 딱히 반대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아버지도 약간 그런 컴플렉스가 있었거든요.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서 수술 실력은 엄청 뛰어났어요.
그 때문에 환자들은 항상 넘쳐났는데 정작 의사들 사이에서는 지방대 출신이라고 좀 무시를 당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아들이 자기가 못간 SKY의대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대를 할 의사가 어디 있겠어요?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엄마는 날 데리고 강남의 8학군 쪽으로 이사를 갔어요.
대치동에 20평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날 데리고 소위 말하는 서울 유학을 간 거죠.
아버지는 혼자서 부산에 남아서 병원을 운영해야 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기러기 생활을 하기 시작했어요.
뭐 아버지 입장에서는 매우 적당한 때였을수도 있어요.
엄마가 아무리 미인이라도 해도 그 때쯤에는 30대 중반이었고 결혼생활도 벌써 15년이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아마 한참 전에 권태기가 오지 않았을까 하고 전 추측하고 있어요.
뭐 어떻게 보면 두 분 다 윈윈할 수 있는 상황이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엄마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원하는대로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고 엄마 입장에서는 그렇게 바라던 서울대 의대 아들이 생기는 거였으니까....
아직도 살아계셨던 할머니에게도, 자신이 고졸이라고 무시하는 병원장 사모님들 모임에서도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거죠.
다행히 난 성적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강남의 명문고등학교에 힘들이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강남에 가서야 난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고향인 부산시에서는 내가 쭉 전교 1등이었지만 거긴, 씨발, 천재들이 바글바글거리는 완전 전쟁터였어요.
당시 우리 반에는 겨우 고1인데도 미적분을 암산으로 푸는 놈도 있었고 타임지를 단어 하나 찾지 않고서 완독하는 미친 놈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 때 미적분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타임지도 그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영이 녀석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듣고만 있었다.)
결국 난 대치동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학원과 집, 학교만을 왔다갔다 하면서 하루 24시간 내내 공부만 했어요.
잠도 하루에 겨우 3, 4시간 정도만 잤던 것 같아요.
심지어 엄마는 어디서 이상한 집중력강화제까지 구해와서는 나에게 먹였어요.
일종의 각성제 효과도 있었는지 뭐 그 약을 먹으면 잠도 잘 오지 않았어요.
뭐 그 때문에 성적은 확실히 올랐죠.
지방 출신의 내가 강남에서 날다긴다 하는 애들과 같이 경쟁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됐으니까....
예전처럼 전교 1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전교 10등에서 20등 사이에는 들었거든요.
뭐 그것도 엄마 눈에는 별로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지만요.
뭐, 그렇게 필사적으로 공부만 하는 바람에 성적은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난 진짜로 감옥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더 비참했어요.
형님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루에 잠만 겨우 4시간을 자면서 나머지 20시간 내내 공부만 하는 생활을 말이에요.
심지어 난 밥을 먹을 때도 똥을 쌀 때에도 책을 보고 있어야 했어요.
강남에서 가끔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을 하는 초등학생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 말이 맞았다. 만일 나였다면 1주일도 못 가서 미쳐버렸거나 자살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세삼 이 새끼가 존경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을 끝났을 때 내 성적은 전교 20등 정도였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호형?씨발, 부산에서는 나름 전교 1등이었는데 강남에 와서는 진짜 하루종일 공부만 했는데도 겨우 20등 밖에 못하다니 말이에요.
그것도 거의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학업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말이에요.
맞아요, 그 때쯤 전 진짜 미칠 것만 같았어요.
차라리 성적이 전교 3등 안이었거나 아예 3, 40등 밖으로 떨어졌으면 정신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았을 거예요.
전교 3등 안이었으면 아, 그래도 내가 꽤 천재였구나, 생각하면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했을 거예요.
그리고 아예 40등 밖으로 떨어졌다면 내가 범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해서든 엄마를 설득해서 부산으로 내려갔을 거에요.
그런데, 씨발, 딱 20등이었어요.
제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한편 엄마도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더 필사적이 됐어요.
겨울방학이 되서도 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기는커녕 강남의 그 아파트에 남아서 최고가의 입시학원에 다녀야 했어요.
진짜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더 미칠 것 같았어요.
학교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모의고사가 있었지만 겨울방학의 입시학원은 진짜 1주일에 1번씩 시험을 봤고 심지어 토, 일요일도 없었어요.
아니 오히려 주말이면 특강이라고 하면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강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2주일 정도 학원을 다니고 나자 난 진짜로 미칠 것 같았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공부를 할 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성적은 더 떨어지고, 그럼 엄마는 나에게 또 화를 내고 그럼 그 때문에 스트레스는 더욱 더 증가하고....
한 마디로 빈곤의 악순환이었어요.
두 번째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날 저녁 - 물론 등수는 더 떨어졌어요. - 엄마는 그걸 보더니 나에게 한 마디로 안 했어요.
그냥 저녁으로 김밥만 하나 건네주고서 다시 학원으로 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어요.
그 날은 야간수업도 있는 날이었거든요.
보통 때라면 학원의 교실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예습이나 복습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난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김밥을 들고서 교실이 아니라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그냥 이제 끝내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옥상으로 향하는 철제 문은 열려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학원 교사들이 주로 옥상에 와서 담배를 피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뭐 그 때까지만 해도 나처럼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미친 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때가 저녁 6시쯤이어서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어요.
난 주홍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면서 이 정도면 마지막으로 보기에 그렇게 나쁜 경치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 옥상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커다란 물탱크 옆의 그림자 속에서 누가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나는 게 보였어요.
그건 놀랍게도 최 효만이었어요.
“그건 또 누군데?”
효만이는 내가 고등학교에 와서 사귄 유일한 친구였어요.
효만이는 나와 공통점이 엄청 많았거든요.
효만이는 충청도 애였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졸부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효만이만은 명문대에 보내려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 애 엄마가 강남으로 위장전입을 온 거였죠.
하지만 나와는 달리 효만이 엄마는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극성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효만이 말로는 자기 공부보다는 유명 백화점의 명품점에 쇼핑을 다니거나 남자를 만나러 다니는 데 더 시간을 쓰고 있다고....
효만이 녀석은 순간 깜짝 놀라더니 그게 나라는 것을 알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도 여기 쉬러 왔냐고 물어보았어요.
뭐 여기서 뛰어내리려고 올라왔다고는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응....그냥 답답해서 바람이나 좀 쐬려고....그런데 넌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라고 물어 보았어요.
그런데 그게 내 구원의 동아줄이 될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물었더니 그 녀석이 “야, 재미 있는 거 보여줄 테니까 다른 애들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마.” 라고 하면서 날 자기가 조금 전에 숨어(?) 있었던 물탱크 그림자 속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허슬러(HUSTLER) 잡지를 내게 보여주었어요.
“뭐? 포....포르노 잡지 말이야?”
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수없이 많은 포르노 콘텐츠를 찾아 볼 수 있지만 인터넷이 없던 그 당시인 1990년대만 해도 포르노 콘텐츠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르노 비디오테이프가 세운상가 같은 곳에서 유통이 되긴 했지만 성인들도 그걸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평범한 남자 고교생들에게는 수영복 차림의 여자들이 나오는 선데이서울(국산성인잡지)만 구할 수 있어도 다행인 시절이었던 것이다.)
우습겠지만 그 때가 내가 처음으로 여자의 젖꼭지나 보지, 그리고 남녀의 성교 사진을 본 때였어요.
당연히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그리고 자위라는 것도 그 때 처음으로 효만이 녀석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난 자살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저녁식사 시간 내내 효만이가 준 허슬러 잡지를 보면서 처음으로 딸딸이라는 것을 쳤어요.
한 시간 동안 무려 3번이나 말이에요.
그리고는 효만이에게 사정사정해서, 또 용돈으로 받은 5만원까지 주고서, 그 잡지를 샀어요.
그렇게 해서 난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방법을 찾게 됐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문제가 생겼어요.
“왜? 설마 그것도 엄마에게 들킨 거야?”
뭐, 비슷해요. 어차피 결국에는 들켰으니까....
형님 생각에는 제 문제가 뭐였을 것 같아요?
“글쎄?”
우린 방 2개짜리 강남의 2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돈을 잘 벌긴 했지만 강남에서 아파트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둘만 사는데 굳이 큰 평수를 구할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집은 작았어요.
20평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실평수는 15, 6평 정도 밖에 안 됐을 거에요.
방 2개, 거실 하나, 욕조가 딸려 있는 화장실 하나, 싱크대가 있는 작은 부엌이 하나 있는 구조였어요.
원래 부산에서 살 때도 우리 세 가족 뿐이었으니까 엄마는 집에서 상당히 편하게 옷을 입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나와 단 둘이 살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진짜로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엄마는 가슴이 매우 컸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하는 것을 굉장히 불편해 했어요.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브라를 하지 않은 채 노브라로 다녔어요.
평소의 옷차림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노브라에 헐렁한 원피스 차림이거나 티셔츠에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는 핫팬츠를 주로 입었어요.
한참 더울 여름이면 아예 하의는 팬티 하나만 입고서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좀 크고 헐렁한 티셔츠 하나만 몸에 걸치고 돌아다닐 때도 많았어요.
난 지금도 그렇게 큰 편이 아니지만 고 1때는 키가 겨우 160정도 밖에 안 됐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 눈에는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만 보이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진짜로 날 남자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거긴 화장실 및 욕실이 하나 뿐이었는데 내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아무런 거림낌 없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서 팬티를 끌어내리고서 오줌을 싼다거나, 샤워를 하고 난 후 완전히 알몸으로 거실에 나와서 엄마 방으로 들어간다거나 하고 있었어요.
물론 나도 그 때까지는 그런 엄마의 행동을 당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날 남자로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한 번도 엄마를 한 명의 여자로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때서야 난 이 얘기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희미하게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허슬러 잡지 속의 수많은 야한 사진들을 보고 나자 엄마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엄마가 샤워를 한 후 알몸으로 밖으로 나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눈가로 계속해서 힐끗힐끗 엄마를 훔쳐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때서야 난 엄마가 한 명의 여자로서 얼마나 매혹적이고 섹시한 여자인지 100% 이해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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