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 5

나의 완벽한 삶이라는 견고한 성채에 작은 균열이 시작되는 듯한, 그러나 그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나를 감싸 안던 따뜻한 온기와 은은한 생활의 향기, 그리고 가족들의 잔잔한 숨소리 속에서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곤 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임원으로서의 무게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고 평화로운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내 옆에는 아내가 정갈하게 정리해둔 신문이 놓여 있었지만, 나는 굳이 펼쳐 들지 않았다. 그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내 보금자리의 고요함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그 순간, 딸아이 민경이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 집의 해사한 미소이자 싱그러운 꽃과도 같은 아이였다. 그녀의 손에는 낯선 검은색 물체, 바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민경이를 바라보았다. 그 카메라가 켜져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신선하게 다가왔을 뿐이었다.
"아빠!" 민경이는 여느 때처럼 조그마한 일에도 깔깔 웃으며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던 그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미소가 환하게 피어 있었다. "아빠, 제가 요즘 유튜브에서 ‘브이로그’라는 걸 봤는데, 제 일상을 찍어서 올려보고 싶어서요! 사람들이 자기 일상을 영상으로 만들어서 올리는 거래요.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카메라를 샀는데, 아빠가 첫 게스트가 되어주시면 안 될까요?"
브이로그. 나는 그 단어가 낯설면서도, 동시에 내 머릿속의 어딘가를 살짝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공부에만 매진했으면 했다. 자식들이 학업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편이었으니, 스스로 영상을 찍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고, 심지어 수익을 얻을 수도 있다는 '브이로그'라는 개념은 나의 견고한 가치관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부모 구실이란, 자식들이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인 지주를 의지하며 바르게 자라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구질구질한 것들이나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지!' 하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민경이의 저 티 없이 맑은 눈빛과 열망 가득한 표정을 마주하자, 나의 **'최고의 아빠'**라는 자부심이 묘한 파동을 일으켰다. 나는 가족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기를 바랐다.
나는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아주 미묘한 '억지웃음'이었다. 내 안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딸의 새로운 시도 사이에서 오는 짧은 혼란 때문이었을까. 혹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기업 임원으로서의 냉철한 판단력과 굳건한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개인적인,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의 즉흥적인 대응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경이의 순수한 열정 앞에서 나의 모든 복잡한 생각들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딸의 작은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우리 집의 해사한 미소이자,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싱그러운 꽃과 같았으니까.
"음… 브이로그라. 하하. 아빠가 이런 걸 잘 찍을지는 모르겠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민경이의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최고의 아빠로서, 나는 언제나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작은 행동 하나가 딸에게 큰 기쁨이 된다면, 기꺼이 그 역할을 다해야 마땅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민경이의 얼굴이 더욱 크게 비치자,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민경이는 카메라를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빠! 그냥 아빠가 누군지 소개만 해주면 돼요! 제가 편집 다 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나는 그 에너지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조금 더 과장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나는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음… 안녕하세요. 저는 손민경 양의 아버지입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순간 내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자부심이 차올랐다. '손민경 양의 아버지'. 이 다섯 글자가 나의 성공적인 삶의 방점을 찍는 듯했다. 나는 최고의 아빠였고, 완벽한 가장이었다. 명문대에 다니는 모범적인 아들 정훈이와 더불어, 반듯하게 잘 자라준 딸 민경이는 나에게 그 어떤 재산보다도 값진 큰 재산이자 축복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의 인생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얼마나 충만했는지를 깨달았다.
"좋아요, 아빠! 딱 좋아요!" 민경이는 카메라를 내 얼굴에서 떼어내며 손뼉을 쳤다. 그녀의 환한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이거 빨리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싶다! 분명 반응 좋을 거예요!" 민경이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 듯 연신 몸을 들썩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한 순수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런 민경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민경이의 브이로그든 뭐든간에 딸내미가 좋아한다면야 말릴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 희숙이 민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경향이 있다 한들, 그것은 딸을 바르게 이끌기 위한 현명함과 깊은 통찰력의 발현이라 여겼기에,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일탈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어느날 저녁, 나는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평화로운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 정훈이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평소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이던 녀석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차분함과는 다른,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실려 있었다. "아빠, 이거 보세요! 민경이가 올린 브이로그가 완전 대박 났어요!" 정훈은 손에 든 스마트폰 화면을 나에게 들이밀며 재잘거렸다.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단 한 번도 나를 걱정시킨 적 없었던 아들이, 이렇게까지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정훈이 보여주는 스마트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에는 딸 민경이의 일상이 담긴 브이로그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인터넷에 자신의 브이로그를 올리기 시작했다는 딸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딸의 순수한 열정 앞에서 **'최고의 아빠'**라는 나의 자부심이 묘한 파동을 일으켰고, 결국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브이로그 첫 게스트가 되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상 속 민경은 여느 때처럼 조그마한 일에도 깔깔 웃으며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던 그 해사한 미소와, 애교 섞인 말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티 없이 맑은 눈빛과 싱그러운 표정은 화면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내 딸이지만 참 예쁘다. 곱게도 생겼네'. 나는 무의식중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화면 속 민경은 여전히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싱그러운 꽃'과 같았다. 동영상 내용은 별다른 특별함이 없었다 . 그저 일상생활의 소소한 모습들과, 학생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회사 생활의 단편들이 평범하게 이어졌다. 그런데도 영상 하단에 표시된 조회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아 있었다. 이제 막 신설된 유튜브 채널이었고, 구독자 수도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첫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무래도 민경이 얼굴 때문에 조회수가 터진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봐도 민경이는 이쁘니 말이다.' 딸에게서 나는 언제나 순수함과 밝은 에너지를 느꼈고, 그런 민경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녀의 티 없는 웃음소리는 우리 집안에 울려 퍼지는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였으며, 그녀의 존재 자체로 나는 완벽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렇듯 나의 딸 민경은 그 어떤 재산보다도 값진 큰 재산이자 축복이었으니.
정훈은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쑥스러워하는 민경을 재촉했다. "야, 이거 엄마한테도 보여드려야지!" 민경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민경이는 오빠말도 아주 순종적으로 잘 따랐다.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아내 희숙은 민경이의 브이로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희숙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물기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민경을 똑바로 응시했다. "민경아, 너는 아직 학생이야. 이런 영상 올리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게 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봤니?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볼지, 우리 가문의 명예는 어떻게 될지 말이야." 그녀의 눈빛은 강렬했고, 그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희숙의 현명함과 깊은 통찰력은 분명 가정을 지탱하는 기둥이었지만, 딸에게 향하는 그 엄격함은 때로는 지나쳐 보였다.
나는 그런 희숙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나는 아내의 엄격함이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고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 아이들이 사회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자라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의 작은 실수에도 좀처럼 너그러움을 보이지 않고, 민경의 모든 선택에 날카로운 질문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숙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더 이상 유튜브니 뭐니 그런 것 따위 하지 마라" 그녀는 민경에게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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