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소개팅_07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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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0 10:28
어 펭귄오빠 아니에요?
늦게 온 후배는
특유의 데굴데굴 구르는 억양으로 물었다.
네, 펭귄 아닙니다.
와 ㅋㅋㅋ 펭귄오빠다! 아닌척하는것도 똑같다!
대학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친한 후배가 있었다.
후배라고 부르기도 웃긴, 서로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괴롭히는 사이였다.
대학 때는 여자친구가 내내 있었으니 주변에서도 딱히 엮으려 하지 않았고, 여자친구도 이 친구를 그닥 경계하지 않았다.
아니 그때 펭귄오빠 완전 닭살이었다니까요.
나는 둘만 학교다니는 줄 알았어.
부부인줄 알았지.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 시절 추억들을 가지고 친구들은 나를 그야말로 신나게 놀렸다.
헤어졌을 무렵에는 눈치만 보던 놈들이 이만치 시간이 지나니 아주 물 만난듯 그때 일들을 풀기 시작했고, 나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게 웃어넘겼다.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했다. 마녀였다.
나는 퇴근해서 드라마보다 잘려고 ㅎㅎ 대학친구들 만난댔나? 술많이먹지말고 조심히들어가!^^
원래는 1차만 함께 있다가 마녀를 만나러 갈까 하던 참이었다. 또 며칠 동안 꽤 못 봐서 한 번 깜짝으로 집에나 가볼까 싶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시끌벅적함이 좋았다.
마녀와 단둘이서는 할 수 없는 이런 유쾌하고 가벼운 자리가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나비는 술자리에서 다른 여자 후배들을 놀리고, 썰을 풀고, 같이 욕을 해 주면서 테이블 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있었다. 생동감이 넘쳤다. 즐거운 인생이란 저런 사람을 말하나보다 싶었다.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서 답장을 보냈다.
그래! 별로 안마셨어 애들 시끄러워 죽겠다 ㅋㅋ 잘자~
2차 갈사람! 너는 일찍 가야된댔지? 나비는 2차 된댔고, 펭귄이는??
갑시다, 2차!
2차에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고, 간신히 집에 들어갔는데 메시지가 와 있었다.
펭귄오빠 ㅋㅋ 잘 들어갔어요? 오늘 오랜만에보니까 잼남ㅋㅋㅋ 그동안 연락 한번을 안하대요?
아, 그랬지.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일 년은 여자 꼴도 보기 싫었고, 회사 들어가고 나서는 사람 꼴도 보기 싫었으니까.
오빠 이번주 토요일에 뭐해요? 나좀 놀아주삼ㅋㅋ 요즘 일도 안바빠서 심심해죽겠어요! 강남으로 오면 안돼요?
귀찮게 하네 강남까지 ㅋㅋㅋ 알았어.
둘이서 보는 약속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낙을 해 버렸다.
토요일 오후 두시,
강남은 미어터질 듯 난리였다.
우리는 인파에 휩쓸려 막연하게 신논현 즈음까지 걷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카페로, 코인노래방으로, 닭갈비 집으로 넘어다니며 간만에 시끄럽게 놀았다.
나비는 지치지도 않고 눈을 반짝거리며 놀라고, 웃고, 감탄했다. 나비 옆에 있으면 그저 그런 하루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 같았다.
어느 새 한밤중,
그나마 조금 조용해진 이자카야에서 나비가 말했다.
오빠, 오늘 고마워요.
어, 고마워해야지.
아 진짜 ㅋㅋㅋ 그래도 진짜 고마워요.
근데 뭐가?
저 요즘 좀 우울했어가지고...
나비네 남자친구가 유학을 간다고 했다.
앞길을 막을 생각은 없어서 그러라고는 했는데,
자기가 기다려 주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싫다고, 매번 자기는 조강지처마냥 받아줘야 되냐고, 그거 투정 좀 부리는 게 큰 잘못이냐고 말하며 잔을 들이켰다.
남치니는요, 매-번 그래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건 아니지, 무슨 옷을 입어도 왜 그렇게 입어, 어딜 가자고 해도 거길 왜가..
아니 그러면 나를 왜 만나는 거지? 잘려고 만나나? 오빠도 남자니까 말해봐요. 잘려고 만나는 거에요?
나는 잔뜩 코너에 몰려서 어영부영 이름도 모를 그 남자를 변호했다. 그렇지만 내가 들어도 나비가 좀 딱하긴 했고, 그런 인물이 나비와 처음에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도 의문이었다.
긴 성토가 끝나고, 택시를 잡으러 밖으로 나오는 길에, 나비는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 했다. 좀 취해 있었다.
아 추워, 손시려!
나비가 진저리를 치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적잖이 당황했다. 왜 내 주머니에..?
아 따뜻하네. 오빠 잠시 신세 좀 질게요~
그렇게 한참 손을 잡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나비는 겨울은 너무 춥고 빨리 봄이 됐으면 좋겠다며 재잘거렸다. 귀여웠다. 택시가 늦게 잡혔으면 좋겠다, 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혼란스러웠다.
나비와는 오늘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밥을 먹고 술을 마신것뿐이었다. 스킨십도 나비 성격상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할까. 속도 없이 흔들린 것 때문일까. 바람을 피는 것도 아닌데. 아, 어쩌면 이것도 바람을 피는 건가?
나비는 그 뒤로 한두번 더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따금씩 강남에서 만나 쓰잘데없이 놀았다. 통통 튀는 여자애와 번잡한 강남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노는 건 힘들고 지쳤지만, 재미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밤, 한밤중에 전화가 울렸다. 나비였다.
오빠, 흐엉.
뭐야 너, 울어? 뭔데?
어엏으흥ㅇ엉ㅇ ㅠㅠㅠㅠ
뭐야 뭔데? 어딘데?
영등포여ㅠㅠㅠ흑더유ㅠ유ㅠㅠㅠ나좀데리러오면안돼요?후아ㅜㅠㅇ러ㅡㅠㅠㅠ
대뜸 울기부터 하는 통에, 그런 주제에 데리러 오라고 정확하게 요구하는 통에 사정도 모르고 차를 끌고 타임스퀘어로 갔다.
문닫은 점포 앞에 주저앉아 훌쩍거리는 나비를 온 시민들의 눈길을 받으며 간신히 차에 구겨 넣었다.
아니 미친놈아, 길거리에서 뭐해...
흐어어어혀ㅑ뉴듀ㅠㅜㅜㅜ
너 집 어디야. 좀있으면 지하철도 끊기는데...
으허어어ㅓ!!ㅠㅠㅠㅠㅠ
울림통도 크다.
집이고 뭐고 일단 진정은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우리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물을 꿀꺽꿀꺽 500잔으로 두 잔을 마시고,
한참 심호흡을 하고 코를 들이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와 크게 싸우고
못해먹겠다고, 헤어지자고, 유학가서 니 시키는대로 잘하는 여자 만나라고 소리소리를 쳤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그 와중에도 멀거니 뚱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게 더 싫어서 술집을 박차고 나와 한참 걷다가 신세가 서러워서 길거리에 주저앉아 우는데 아무한테나 전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그러고 연락도 없는거야?
네. 연락 안할거에요.
그럼 어떡할거야. 그냥 집으로 갈거야? 안만나고?
그냥 갈거에요 ㅠㅠ퓨ㅠㅜㅡ
차 안에서 나비는 울어서 걸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고마워요. 담에 제가 밥살게요.
어어, 그래. 푹 자.
나비를 들여보내고, 갑자기 마녀가 생각났다.
마녀는 한 번도 나한테 헤어지자고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도 없었다.
내가 잘해야겠다. 이번주는 시간 괜찮다고 했으니까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일주일 반만에 만난 마녀는 밥을 먹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 이제 우리 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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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반성했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때의 모습과
길게 쓴답시고 써도 별 차이 없는 분량을 반성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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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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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eis |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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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eis |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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