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비밀연애3
재명아니고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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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전
1. 콜라 잔
그녀가 떠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놀이터 앞을 지나는 일도 줄었고, 나는 다시 평범한 7년 차, 아니 8년 차 과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회사 남자들 사이에는 오래된 농담 같은 순위가 있었다. '결혼하고 싶은 여직원.' 그 순위에서 몇 년째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었다. 기획팀의 그녀.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다. 대신 그녀 주변에는 늘 이상하게 온도가 낮은 공기가 있었다. 남이 흘린 커피를 말없이 닦아두고, 신입이 실수한 보고서를 밤늦게 고쳐놓고도 생색 한 번 내지 않는 사람. 큰 소리로 웃는 걸 본 적이 없었고, 누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네, 해볼게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회식은 두 팀 합동이었다. 고깃집에서 시작해 맥줏집, 노래방까지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 그녀 앞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콜라 잔이 놓여 있었다.
"저 박카스만 마셔도 얼굴 빨개져요."
누군가 한 잔만 하라고 권하자 그녀가 웃으며 한 말이었다. 다들 농담인 줄 알고 웃었지만, 나는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녀의 표정에서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노래방에서도 구석에 앉아 탬버린을 들고, 남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다. 끝까지, 정말 끝까지 있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조용히 먼저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문이 닫히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봤다. 남은 사람들과 술을 한 병 더 비우는 동안에도, 그 콜라 잔이 자꾸 떠올랐다.
2. 편의점
새벽 한 시, 택시를 기다리며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잘 들어가셨어요?'
답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네, 방금 씻고 나왔어요. 과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다음 문장을 쳤다.
'혹시 잠깐 시간 돼요?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집 근처 편의점에서 5분만.'
보내놓고 나서야 술기운이 확 깼다.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나 자신도 몰랐다. 거절하면 그만이고, 거절할 게 뻔했다. 화면을 끄려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과장님 술 많이 드셨죠? 제가 숙취해소 음료 사드릴게요.'
그녀의 동네 편의점은 형광등이 유난히 밝았다. 그녀는 집에서 입던 회색 후드 집업에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나와 있었다. 회사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계산대 옆 진열대에서 숙취해소 음료 하나와 박카스 하나를 집어 들더니, 박카스를 자기 앞에 놓았다.
"이건 제 거예요. 오늘 이거 하나로 버텨볼게요."
나는 웃었다. 우리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할 얘기가 있다고 불러냈으면서 정작 나는 별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것저것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회사 얘기, 그녀가 처음 입사했을 때 얘기, 내가 그녀의 보고서를 몇 번 본 적이 있다는 얘기. 그녀는 박카스를 반쯤 마시고 정말로 볼이 발그레해졌다.
"진짜네요. 박카스."
"그쵸? 저 거짓말 안 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3. 두 번째 노래방
"아까 노래방에서 한 곡도 안 불렀죠?"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많은 데선 부끄러워서 못 부른다고. 편의점 건너편 건물 2층에 코인노래방 간판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럼 딱 세 곡만."
좁은 방에 둘이 앉으니 소파가 유난히 가까웠다. 그녀는 첫 곡을 고르는 데만 한참 걸렸고, 막상 부르기 시작하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런데 가사 한 줄 한 줄을 또박또박 끝까지 부르는 모습이, 회식 자리를 끝까지 지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세 곡은 다섯 곡이 되었고, 노래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그녀가 화면 불빛을 받으며 나를 봤을 때, 나는 또 그 익숙한 충동을 느꼈다. 반년 전 놀이터에서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던 그 순간. 이번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다만 온몸이 굳어 있었다. 입술을 떼었을 때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오늘 너무 예뻐서, 제가 실수했네요."
지금 생각하면 비겁한 말이었다. 실수라고 하면서 동시에 이유를 그녀에게 돌리는 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작게 말했다.
"과장님, 결혼하셨잖아요."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가 사라진 지 오래인 집, 아이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는 아내, 주말마다 각자 다른 방에서 보내는 시간.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왜, 하필 지금, 그녀에게 하고 있는지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들었다. 회식 자리를 지키듯이. 그리고 내 손등을 조심스럽게 한 번 쓰다듬었다.
"많이 외로우셨겠네요."
그날 우리는 노래방 앞에서 헤어졌다. 그녀가 골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번에는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
4. 설렘이라는 착각
월요일 아침,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내 자리 옆을 지나가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가 지나간 뒤 내 책상 위에 박카스 한 병이 놓여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포스트잇도, 메모도 없었다. 나는 그 병을 서랍에 넣어두고 한참 동안 열어보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 우리는 단둘이 만났다. 회사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동네의 작은 파스타집, 평일 저녁의 한산한 영화관, 한강 공원 벤치. 그녀는 여전히 술을 마시지 않았고, 나도 그녀 앞에서는 잘 마시지 않게 됐다. 맨정신으로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이 오히려 더 취하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기혼 남자가, 퇴근 후 약속 하나에 하루 종일 설렜다. 그녀가 고른 식당 메뉴판을 사진으로 보내주면 몇 번이나 들여다봤고, 헤어지고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그날 그녀가 웃었던 순간을 하나씩 되짚었다. 대학 시절 이후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걸 연애라고 불렀다. 그녀도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과장님이랑 있으면, 제가 좀 괜찮은 사람 같아요."
어느 날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늘 남을 먼저 챙기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고, 동시에 어딘가 아팠다. 그녀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아야 하는 상대가, 하필 나라는 사실이.
5. 그녀의 방
비가 오던 날이었다. 한강 공원에서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뛰다 보니, 가장 가까운 지붕이 그녀의 오피스텔이었다.
"우산 갖고 나올게요. 여기서 잠깐만……"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우리는 젖은 채로 현관 앞에 서 있었고, 그녀가 먼저 문을 열어두었다.
그녀의 방은 그녀를 닮아 있었다. 작은 원룸에 먼지 하나 없이 정리된 책상, 창가에 나란히 놓인 화분 세 개, 냉장고 문에 붙은 고향 부모님 사진. 그녀가 수건을 건네주며 웃었다. 나는 그 수건을 받아 들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먼저 닦아주었다.
그다음의 일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다만 여기 다 적지는 않겠다.
하나만 적자면, 나는 그녀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늘 조용히 한발 물러서 있던 사람, 누구에게나 "네, 해볼게요"라고 대답하던 사람. 나는 그 모습만으로 그녀를 멋대로 하나의 틀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날 밤의 그녀는 그 틀 어디에도 맞지 않았다. 망설임이 없었고, 솔직했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건 순종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새벽녘, 창밖의 빗소리가 잦아들 즈음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놀랐죠? 저 그렇게 착한 애 아니에요."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모르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6. 이름 없는 2년
그 후로 2년. 우리 관계에는 끝내 이름이 붙지 않았다.
연애라고 부르기엔 내게 돌아갈 집이 있었고, 불륜이라고 부르기엔 그녀가 단 한 번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애매한 자리를 서로 편리하게 썼다.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 후 그녀의 오피스텔. 문을 열면 늘 같은 화분, 같은 수건 냄새, 같은 박카스가 냉장고 안쪽에 몇 병 들어 있었다. 밤은 매번 뜨거웠고, 나는 그 방에서만큼은 나이도, 직급도, 집에 두고 온 것들도 잊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우리는 철저했다. 회의실에서 눈이 마주쳐도 웃지 않았고, 회식 자리에서는 일부러 멀리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결혼하고 싶은 여직원' 순위 맨 위에 있었다. 남자 동기들이 그녀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순간마다 묘한 우월감과, 그보다 조금 더 큰 죄책감이 같이 올라왔다.
2년째 되던 해 가을, 그녀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휴대폰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저 선 봤어요. 엄마가 하도 보채서."
"……그래서?"
"괜찮은 사람이에요. 지방 공기업 다니고. 저 결혼할 것 같아요."
그녀는 내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나도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건, 그 방에 처음 들어선 날부터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방에서 자고 가지 않았다.
7. 주중의 아내
이듬해 봄, 그녀는 결혼했다. 나는 축의금 봉투를 다른 동료들 것과 섞어 전달했고,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팀마다 돌린 초콜릿 상자를, 나는 한 조각도 먹지 못하고 서랍 속 오래된 박카스 병 옆에 넣어두었다.
남편은 지방 근무를 계속했다. 그녀는 서울에 남았다. 주말부부. 그 단어를 탕비실에서 다른 여직원들과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결혼하고 석 달쯤 지난 수요일 밤, 메시지가 왔다. 2년 동안 수없이 받았던, 그리고 반년 가까이 오지 않던 짧은 한 줄.
'오늘 시간 돼요?'
그녀의 집은 바뀌어 있었다. 원룸 대신 투룸, 창가의 화분은 다섯 개로 늘었고, 냉장고에는 고향 부모님 사진 옆에 웨딩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지 않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았다. 박카스가 아직 그 안에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남편이 내려가 있는 평일, 한 달에 두어 번. 예전처럼 뜨거웠지만, 예전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과장님이랑 있으면 제가 괜찮은 사람 같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그걸 연애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느 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내 등 뒤로 그녀가 말했다.
"우리, 언제까지 이럴까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처음 그녀를 불러냈던 새벽의 편의점을 떠올렸다. 형광등 아래, 박카스 반 병에 볼이 빨개지던 사람. 저 거짓말 안 해요, 라고 말하던 사람.
그 사람을 지금의 이 사람으로 만든 데에, 나는 얼마만큼의 몫이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그 질문을 다음 주 수요일까지 또 미뤄두었다.
| 이 썰의 시리즈 (총 4건) | ||
|---|---|---|
| 번호 | 날짜 | 제목 |
| 1 | 2026.10.14 | 회사에서 비밀연애4 (1) |
| 2 | 2026.10.14 | 현재글 회사에서 비밀연애3 (3) |
| 3 | 2026.10.13 | 회사에서 비밀연애2 (11) |
| 4 | 2026.10.12 | 회사에서 비밀연애1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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