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케이스의 오해
용가리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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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1 15:59
퇴근 시간, 2호선 지하철은 정체불명의 인간 미어캣들로 가득했다. 나는 겨우 손잡이를 잡고 버티다가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넋을 놓고 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화면에 뜬 알림이 낯설다. "여보, 나 모텔 앞이야. 빨리 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내 폰이 아니다. 내 손에 들린 건 앙증맞은 핑크색 케이스를 한 타인의 스마트폰이었다. 바로 그때, 옆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그 폰, 제 건데요."
고개를 돌리니, 정장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연집누(年長女)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다행히도 내 검정 케이스의 폰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폰을 바꿔 들고 있는 터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정신이 없었네요."
폰을 바꾸려는 순간, 그녀가 내 폰 화면을 가리키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근데... 이 알림은 뭐죠? '야, 너 오늘 여친이랑 모텔 간다며? 나는 찜질방 갈게.'"
나는 그제야 내 폰에 도착한 절친의 장난 문자를 확인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이건! 친구가 장난친 거예요. 진짜 여친 없어요! 아니, 여친이 있다 해도 모텔은..."
말이 꼬였다.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내게 자신의 폰 화면을 보여줬다. 거기엔 방금 내가 본 그 '모텔 앞' 문자가 있었다.
"이것도 내 후배가 장난으로 보낸 거예요. 오늘이 제 퇴사 날인데, '마지막으로 모텔 가서 술이나 먹자'는 식의 농담이었나 봐요. 저도 지금 한창 난감했던 참이에요."
뜻밖의 동지애가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장난 문자를 바라보며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전철은 어느새 한강 진입로를 지나고 있었다. 어두운 강물 위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아름다웠다.
"혹시... 저랑 한강에서 맥주 한잔 하실래요? 모텔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더 좋을 거예요."
내가 용기 내어 건넨 말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퇴사 축하해주는 거예요. 당신이 쏘는 걸로."
우리는 합정역에서 내려 편의점에서 맥주와 치킨을 사들고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쌀쌀한 가을 바람이 불었지만, 그녀의 미소는 따뜻했다. 우리는 서로의 직장 생활, 취미, 그리고 오늘 있었던 황당한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녀는 내가 맥주 캔을 열 때 거품이 튀자 소매로 닦아줬고, 나는 그녀가 치킨을 먹다 흘린 소스를 휴지로 닦아줬다.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 폰 바꿔 든 게 인연이었네요. 그 문자가 아니었으면 한강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녀가 강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쵸. 모텔 앞이 아니라 한강 앞이었으면 더 로맨틱했을 텐데."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돌리며 장난스럽게 내 팔꿈치를 툭 쳤다. 그 순간,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로의 폰은 이미 돌려줬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녀의 이름은 '연지'였다. 폰 화면에 저장된 '연지♥'라는 이름이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지하철에서 만난 작은 오해가, 모텔이 아닌 한강의 밤하늘 아래에서 아름다운 시작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핑크색 케이스를 가진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 내 폰으로 장난 문자를 보내지 않았지만, 우리는 매일 밤늦게까지 한강 공원을 거닐었다.
모텔보다 훨씬 따뜻한, 그 가을밤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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