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만] 1. 매일 여기까지만 이라는 팀장님

본 글은, 100%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글 임을 알립니다.
***
"여기까지만 할까요?"
야근이 매일 매일 이어지는 중소기업에서의 삶은 이렇게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나마 유일한 낙이라면 다른 팀들처럼 크어어 하는 아저씨들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팀에는 팀장님이 계신다는 거다. 그리고 그 팀장님이 저렇게 말하는데 아니라고 고개 흔들 직원이 나오기가 당연히 힘들겠지.
"팀장님... 어제도 여기까지 랬잖아요."
"나 주간보고 작성해야 된단 말야... 같이가자... "
"...... 마대리님?"
파티션 너머의 대리님을 불러봤지만 사실 알고 있다. 대리님이 무슨 철인도 아니고... 매일 육아로 저렇게 다크서클이 목까지 내려와 있는 사람을 붙잡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오대리, 나 아까 진짜 죽을 뻔했어. 아까 봤어? 아까 나 목 막 90도 넘어가게 꺽이면서 자는거 봤어?"
마대리가 과장해서 점심시간에 정말 앉자마자 무슨 미라처럼 목 꺾여서 잠든걸 무용담 마냥 자랑하기 시작했고 난 저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끝날지 알기 때문에 그냥 미리 대답해 버렸다.
"....... 제가 하겠습니다."
"고마워. 으어어 ~ 이놈의 회사 때려치든지. 그래도 난 내꺼랑, 최차장꺼는 마무리 했거든? 조부장님이 출장건은 알아서 처리한댔으니까 오대리는 취합하던 것만 마저 정리하면 될거야."
중얼중얼 거리며 짐을 싸는 마대리님을 보며 이미 어느새 가지도 않을 출장지를 써두고는 고생하려며 등 두번 두드리고 미리 도망가버린 차장님 두분과 부장님 한분의 자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문득 팀장님의 얼굴과 마주쳤다.
'아아.. 젠장 누가 저걸 40대 얼굴로 보겠냐고....'
팀장님은 팀 내 유일한 여자다. 그것도 40대 젊은 나이에 마케팅 팀의 팀장을 꿰찬 당찬 여자다. 처음 들어와서 회식자리에는 팀장님이 참석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부장 차장님들의 말은 익히 들었다. 젊은 년이 독이 올랐다는 둥, 나라가 망하려고 여자만 뽑으면 돈을 준다는 둥... 여성 기업이 뭔데 그걸 해야되냐는 둥...... 그리고 결국 대화는 팀장의 외모 얘기로 넘어갔다. 저질스러운 대화가 오갔고, 어색해 보이기 싫었던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주는 술만 꾸역 꾸역 목에 넣었고 결국 기절해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동의했던 이야기는 바로.
'아무리 봐도 40대로 안 보인다는 거지.'
동그란 눈에 강아지 상 얼굴. 목선까지 오는 단발에 검은 머리. 그리고 일할 때에는 반묶음을 하고, 코밑으로 언제나 쭈욱 흘러 내려와 있어서 저게 패션인지 아닌지 구분 안 가는 안경. 게다가 이 험악한 전쟁터에서 언제나 헤실헤실 웃는 표정 까지 무엇하나 팀장의 위엄이나 40대 아줌마로 보이진 않으니까 말이다.
"네.. 제가 남을 게요."
"좋아!!!! 마대리 퇴근 잘하고~"
"네~ 팀장님도 오대리 맨날 야근만 시키지 말고 술이라도 멕여가면서 시키십쇼. 야근까지 잡고 있을려면 여자도 좀 소개시켜주시고요."
"아? 하하하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내일봐!"
"네~ 내일 뵙겠습니다~"
마대리가 가방을 매고는 터덜터덜 지나가며 귓속말로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마..; 라고 중얼거리며 떠나가고 결국 나도 풀썩 하고 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틱- 틱-
뒤쪽의 현장팀 등이 두개 다 꺼지고 경영부문 등만이 남아서 등대처럼 반짝이는 꼴이 꼭 왕따라도 당하는 양 서러워서 허어.. 하고 길게 한숨을 뿜너 내었다.
"오대리~ 한숨쉬지마아~ 마대리 말대로 이따가 술 사줄게~ 딱 30분만 하고가자."
"네에~ 이거 오늘 안에 해야하는거죠?"
"그럼 좋지~"
고개도 들지 않고 파티션 뒤에서 모니터를 쳐다보며 말하는 팀장님은 둘째 치고 일단 쓰던 보고서나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저 취합 자료를 분석하고 마무리를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둘이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잠깐 이어지다가. 곧 흐음. 흐음 하는 팀장님의 기묘한 감탄사와 함께 곧 띠롱- 하는 특유의 메신저 음이 울렸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하고는 메신저 알람이 올라왔다.
'어휴.. 벌써 야근한지 40분이 넘었어? 이건 뭐야? 웬 대화창...'
< 보고서 끝났나요? >
< 네. 이제 막 끝냈습니다. >
<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오대리 뭐 먹고 싶어요? ㅇㅅㅇ? >
< 아.. 저는 괜찮습니다.>
< 내가 안괜찮아요~ 요 앞에 삼겹살집 어때? 굽는거 말고 구워주는집! >
< 좋죠! >
'아..... 퇴근하려고 했는데....'
무심코 삼겹살 생각에 좋다고 타이핑 쳐버린 스스로의 손가락에 분노하는 것도 찰라, 곧 드르륵 하는 의자 미는 소리와 함께 팀장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으아아- 하는 기지개 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쳐다본 모습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하늘로 올린 모습의 팀장님이 보였다. 왜 항상 오피스룩이냐는 질문에 '내가 어려보여서..' 라고 쑥스럽게 대답하던 팀장님은 쭉 두 손을 위로 뻗어준 덕택에 몸에 달라붙은 화이트 셔츠에 살짝 비치는 이너, 그리고 그 이너를 따라서 드러난 브라의 레이스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와......C? D? 와.... 아휴..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작은 키 탓인지 가슴께 까지만 보이는 팀장님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팀장님이 베시시 웃으며 가자!!! 하고 소리지르고 나서야 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컴퓨터를 끄고 주섬 주섬 정리해서 가방도 챙기는데 어느새 외투까지 걸치고 온 팀장님이 드륵- 하고는 바로 옆 차장님 자리의 의자를 꺼내 앉아서 뒤로 쭈욱 기대며 말했다.
"너무 힘들어~ 진짜로 이직해야겠어~"
나는 힐끗 다리가 다 비치는 스타킹을 신은 다리선을 아래부터 따라가던 시선이 문득 검은색 H 치마 속으로 향하려는 찰라 급히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
"그 얘기 하시는 분들은 다들 안 가시던데요."
"아하하하핳! 맞어 맞어, 다들 그냥 하는 말이야, 진짜 갈 사람은 아무말 안하다가 휙 하고 가버리더라~"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어. 내 남친."
"아 남자친.... 에? "
"뭐?"
"예?"
"뭐!"
"아뇨.. 아니... "
"아하하하하핳. 장난이야 장난~ 뭐야 나 싱글인거 몰랐어?"
"어..... 네....."
"아유... 그냥 매일 회사 집 회사 집 주말에는 내리 잠만 자고 눈뜨면 밤이고 밤이고 하니까 뭐 연애를 할 틈이 있나...."
"맞죠."
"응. 그래서 사실 아까 마대리가 여자 소개해 주라고 했지만 내가 그건 못해줘! 대신 술 사줄게 술!"
두 손을 파닥파닥 거리며 바바리 코트 사이로 훤히 드러나는 가슴 골을 비치는 팀장님을 슬쩍 한번 더 쳐다본 나는 마지막으로 왠지 오늘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이어폰까지 가방에 잘 챙기고는 팀장님께 말했다.
"가시죠! 쏘맥 앞으로!"
"좋아~"
그리고 나는 그날 여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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