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썰] 9살 연하 슬기 닮은 미용실녀 (1편)
이번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 썰이다. 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다.
나는 1년에 두세번 정도 미용실을 갈아타곤 한다. 주로 회사나 집 근처의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고르곤 하는데, (프랜차이즈에 가야 커트 앞 뒤로 머리를 감겨준다)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리뷰가 거의 안 쌓여있는 신입이어야 한다. 너무 나이들거나 짬이 찬 디자이너들은 이미 겪을만큼 겪어봐서 그런지 적당히 대충 별 세 개쯤 주고 싶은 결과를 내놓는다. 어리면 어릴수록 난이도 높은 남자 머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래 공들인다. 머리를 자르고 다듬는데에 집중하느라 자기 몸 어디가 손님에게 닿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당연히 예뻐야 하는데, 화려한 스타일은 거른다. 일반화는 아니지만, 화려할수록 언제 어디로 사라질 지 모른다. 마지막으로는 영업용 인스타를 뒤져서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일은 열심히 하는지 본다. 대개 열심히 하는 애들은 하루에도 2~3개씩 게시물이 업로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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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불가피하게 미용실을 갈아타야 했었다. 이사 간 동네는 그리 크지 않아 프랜차이즈 미용실 자체가 적었다. 그래도 다행히 도보 거리에 하나가 있어서 스타일리스트를 보니, 셋 뿐이었다. 일단 원장은 제외하고, 다른 한 명은 남자라 제끼니 자동으로 한 명만 남았는데, 다행히 위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리뷰는 채 10개가 안됐던 것 같고, 예약 시간도 다 비어있었다. 사진을 몇 개 보니 아주 예쁘진 않은데, 얼굴은 레드벨벳 슬기를 바람직하게 닮았었다. 대개 여자들이 말하는 슬기 상은 망하기 마련인데, 이 정도면 성공이었다.
예약한 주말 오후 쯤에 미용실로 갔고, 그녀를 처음 만났다. '슬기' 디자이너는, 실제로는 아주 말랐었다. 키도 160이 될까 싶었고, 헐렁하고 큰 원피스를 입었지만 굴곡이 거의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실물은 사진에 못지 않게 어린 시절 슬기를 빼어닮아 매력이 있었고 앳된 얼굴이 이제 갓 취직한 20대 초반의 느낌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라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며 가운을 입는데, 슬기 디자이너의 그 어린 웃음 뒤로 딥디크인지 샤넬인지 모르겠는 그리 비싸지 않은 레몬향이 은은하지만 분위기를 압도하며 다가왔다. 아마 이 때부터 이 깡마른, 웃음이 치명적이었던 평범하다면 평범한 디자이너에게 스며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상대로 실력이 부족했다. 머리를 감겨주는 것도, 다듬는 것도 서툴렀다. (나중에 슬기 디자이너가 말해줬는데, 원래 남자 두상과 모질이 사람 따라 천차만별이라 난이도 끝판왕이라고 하더라)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녀의 대화 방식과 톤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미용실에서 대화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슬기 디자이너는 나에게 자꾸 뭘 묻지 않았다. 그저, '어제는 날씨가 좋아서 집에서 밖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게 좋았다.' '이 동네는 살던 곳과 꽤 멀어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데 조용해서 맘에 든다.' '오늘 점심에 동파육이란 걸 처음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마치 여고생처럼 일기를 쓰듯 가볍게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었다. '그래요, 어제 선선했어요.' '저도 여기가 익숙하지 않아요.' '그 집은 짬뽕도 맛있는데'처럼 건성으로 대답을 해도, 슬기 디자이너는 언제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어떤 이야기든-
"그쵸, 너무 좋은거 있죠"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레몬처럼 상큼한 곳이었고, 이 30분의 짧은 대화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레몬향, 말 사이사이에 쉼표처럼 들어간 그녀의 순수한 웃음이 어우러져 삐뚤빼뚤하게 잘린 머리와 상관없이 나도 기분이 좋았었다.
"사실 제가 여기 한 달도 안돼서 손님이 없는데,, 저로 골라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 또 와주시면 더 잘 해볼게요..!"
태연한 척 간단한 미소만 건네며 미용실을 나와 집에 돌아왔다. 뿌려준 에센스 향보다 그녀의 레몬향이 더 진하게 남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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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기르지 않는다면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다시 자르곤 하는데, 금세 한 달이 돌아왔다. 그 때도 슬기 디자이너의 자리는 아주 널널했었다. 주말 일정이 있어서 평일 퇴근 후 마지막 타임 쯤으로 예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녁 식사를 하고 가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꼬르륵 거리며 피곤에 찌든 채 잰 걸음으로 미용실에 갔던 것 같다. 작고 좁은 미용실에는 슬기 혼자였다.
"또 와주셨네요..! 감사해요..!"
예약이 거의 없었어도 고된 하루를 반증하듯 슬기의 머리는 약간 기름져 있었고, 아직 서툰 화장은 조금 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레몬향이었고, 웃음만은 마치 오픈 시간 같았다. 조금이나마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여기는 다들 7시면 손님이 끊겨서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저는 그래도 오늘 예약이 있어서 너무 좋았던거 있죠' '예약 있는 날이 많지 않은데, 이렇게 예약이 있으면 괜히 내 손님 찜해 놓은 것처럼 기다려지는 게 있어서 좋아요' 같은 그녀의 말들이 맴돈다. 상가도 조용한 상가인데, 단 둘 뿐인 미용실은 더욱 고요했다. '사각사각' 머리를 자르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퍼지는 미용실에서는, 그녀의 호흡 소리도 귀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았다.
(당시 머리가 단발 직전 수준으로 길었다) 내 긴 앞머리를 다듬으려는 그녀가 내 뒤에 서서 앞머리를 앞으로 쭉 당겼다. 그녀는 높은 신발은 잘 신지 않는지, 팔을 쭉 뻗어야 했고 내 앉은키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꽤 큰 편이다. '사각사각' 잘리는 앞머리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얇은 미용 가운을 사이에 두고 등에 닿은 그녀의 작은 가슴이 느껴져 화들짝 잠이 깼다. 티를 내지 않은 채로 온 신경을 등에 집중시켰다. 그녀는 루즈 핏의 검정색 셔츠와 긴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등에서 느껴지는 브라가 부드럽게 눌릴 정도로 얇았다. 잘 쳐줘야 꽉 찬 A컵일까 싶은 그녀의 가슴이 작고 부드러운 푸딩처럼 내 등에 얹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기 가슴이 내 등에 닿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앞머리를 다듬는 데에만 온 신경을 다하는 것 같았다. 눈을 편하게 감고 등에 닿은 작지만 부드러운 가슴의 촉감을 즐기려던 찰나, 앞머리를 끝으로 머리가 다 다듬어져 버렸다. 더 자를걸 그랬었다.
그녀는 마무리로 종종 눈썹을 살짝 다듬어주곤 했는데, 옆에서는 각이 잘 안나오는지 내 앞으로 왔다. 등에 힘을 푼 상태라 의자에 걸터앉아 앞으로 다리가 나온 상태였는데, 그녀의 눈썹 칼이 내 눈썹에 닿기 전, 그녀의 다리 사이가 내 무릎에 먼저 닿았다. 이번에도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내 눈썹을 다듬어주기 바빴다. 두 뼘쯤 될까 싶은 거리로 그녀가 내 눈썹을 열심히 관찰하는데, 혹여나 내 호흡이 들키진 않을까 얕게 숨을 쉬었다. 여전히 그 레몬향은 취할 것만 같은 향이었다.
슬기 디자이너가 아직 서툴렀음에도 머리는 잘 감겨주는 것이 좋았다. 항상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두 배는 시간을 쏟는 것 같았다. 편안하게 두피 마사지를 다 즐기고 서서히 올라가는 전동 의자에 앉아 머리를 털어주길 기다리는데, 이번에도 수건이 머리에 닿기 전에 팔뚝에 아까 그 감촉이 느껴졌다. 수건을 터는 그녀의 손이 지난번보다 느리게 느껴진 것은, 굳이 불편하게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양새로 물기를 턴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싶다. 등이 아닌 팔에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닿자, 이번에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잠재우기가 어려웠다. 내 심장이 너무 빠르고 크게 뛰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내 팔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슴 사이로 그녀의 심장도 꽤나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 원초적으로 오래 지속되길 소망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젖은 머리와 수건 사이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보고 싶었다. 빠르게 열 번은 망설였던 것 같다. 지난 날들의 그 경험은 다 허사였던 것인지, 이 어린 아이에게 미친듯이 설레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이 상황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 뼘'
한 뼘 사이였다. 그녀의 눈은 왜인지 나를 보지 못하고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분명 들어올 때 인사했을 때는 없던 홍조가 광대 위로 옅게 스쳐보였다. 이 순간 고민의 스위치를 끄고 그녀의 입술에서 레몬향을 느꼈더라면 우리의 관계가 지금과는 다르게 뒤틀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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