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5
서른아홉의 사내가 열아홉의 여고생을, 그것도 식을 올리기도 전에 덜컥 임신까지 시켜서 제 발로 찾아왔다.
홀몸으로 그 애지중지하는 딸을 억척같이 키워온 어머니라면 당장 몽둥이를 들고 내 장딴지를 부러뜨려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뺨을 맞거나 물벼락을 맞는 것쯤은 진작에 각오한 터였다.
아니, 맞아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하며 소희의 집 대문 벨을 눌렀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철문을 열고 나온 소희의 어머니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딸이 선택한 남자라면 비록 나이가 서른아홉일지라도, 일단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어른스러운 아량이 그 고요한 눈빛에서 묻어났다.
"들어오세요. 날이 많이 춥죠?"
그녀의 안내를 받아 조용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방 안은 기묘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소희의 어머니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와 단아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소희가 가진 그 특유의 묘하고 농염한 분위기, 사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고혹적인 눈매는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전자였다. 한 가정을 홀로 책임져온 강인함 뒤에 숨겨진, 여인으로서의 고운 선과 예쁜 미소는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다소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우려낸 따뜻한 차가 찻잔에 채워졌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실, 소희의 어머니 역시 내 첫인상을 마주한 순간부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한참 많았지만, 다부진 체격과 깊고 단단한 눈빛,
그리고 중년의 사내가 풍기는 능숙하고도 거친 매력은 그녀가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이상형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오가는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미세하게 얽혀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인으로서의 떨림을 애써 내색하지 않고, 고요하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 소희와 나이 차이가 상당한데,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그리고…… 우리 소희를 정말 책임질 수 있나요?"
나는 긴장으로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차로 적신 뒤, 숨김없이 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내가 살아온 궤적, 현재의 자산 상태, 그리고 소희와 보냈던 그 미치도록 지독했던 밤들의 기억까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하게 털어놓았다.
장모가 될 여인에게 내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고 싶었기에 내 목소리에는 거친 확신이 묻어났다.
마지막으로 내 고향과 본가, 그리고 학창 시절을 보냈던 작은 시골 마을의 이름과 내 나이를 말하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소희 어머니의 고왔던 얼굴이 핏기를 잃고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찻잔을 들고 있던 그녀의 하얀 손가락바닥이 눈에 띄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사위를 향한 호감과 긴장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던 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거대한 유령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경악과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가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방금 고향이 어디라고 하셨죠? 혹시, 중학교는 그곳에서 나오셨나요?"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질문에 불길한 예감이 척추를 타고 차갑게 솟구쳤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마주 앉은 장모의 얼굴 위로 이십 년 전 내가 등 돌렸던 첫사랑, 은하의 처절했던 마지막 눈빛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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