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제9회
소희가 잠든 깊은 밤, 정우의 휴대폰 화면 위로 낯선 번호가 찍혔다.
낮에 은하의 집 탁자 위에 남겨두고 왔던 번호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거역할 수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지금 당장 나와요. 소희 몰래 혼자 와야 합니다."
그녀가 말한 장소는 도심 외곽의 외딴 한옥 카페였다.
인적이 끊긴 으슥한 밤, 장대비가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그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정우와 은하는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마주 앉았다.
노란 조명 아래 비친 은하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있었지만, 여전히 정우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던 과거의 곱고 고혹적인 선을 품고 있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텐션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했다.
정우는 타들어 가는 입술을 짓씹으며 먼저 침묵을 깼다.
"어머니, 소희와 저를 갈라놓으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십시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미친 짓이라 해도, 저희는 이미 서로에게 중독되어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정우의 당돌하고도 거친 선언에 은하는 실성한 듯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에 맺힌 눈물이 조명빛을 받아 잔인하게 반짝였다.
"중독……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 했나요?"
은하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정우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에서 풍기는 은은한 살내음이 기묘하게 뇌리를 찔렀다.
소희의 몸에서 매일 밤 맡았던, 정우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던 그 지독한 체취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냄새였다.
"정우 씨. 당신이 그렇게 매일 밤 탐닉하고, 배 속에 아이까지 만들었다는 그 소희가 대체 누구인지 알기나 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우의 눈동자가 불길함으로 흔들렸다.
은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피눈물을 삼키며, 20년 동안 홀로 짊어졌던 가혹한 비밀의 빗장을 마침내 풀어헤쳤다.
"내가 20년 전 왜 당신을 버리고 전학을 갔는지 알아?
당신이 무책임하게 지른 그 불장난 때문에 내 배가 불러왔으니까!
당신의 그 창창한 장래를 내 자존심 때문에 망칠 수 없어서 혼자 도망쳐 낳은 아이가 바로 소희야!"
순간 정우의 머리속은 벼락을 맞은듯 했다...콰르릉—!
타이밍을 맞춘 듯 거대한 천둥소리가 카페를 뒤흔들었다.
정우는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사지가 얼어붙었다.
"그게……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은하야……."
경악에 질려 어머니라는 호칭 대신 옛 이름이 튀어나왔다.
은하의 눈에서 기어이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사랑했던 첫사랑이 내 사위로 들어온다기에 미칠 것 같았는데, 그보다 더 끔찍한 게 뭔지 알아?
당신이 미치도록 안고 쾌락을 탐했던 그 아이가…… 바로 당신 핏줄, 당신 친딸이라는 거야!"
순간 정우의 숨통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매일 밤 소희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고 세포가 짜릿해질 때까지 탐했던 그 완벽했던 속궁합, 빗속을 알몸으로 달리며 나누었던 그 기괴한 해방감.
그 모든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잔인한 천륜의 장난이자 추악한 저주였다는 진실이 정우의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지옥의 가장 밑바닥 문이 마침내 완전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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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b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