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모녀 6

날카로운 양주의 추억은 그 뒤로 몇 년의 여파를 남겼다.
누군가는 양주만큼 깔끔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소주와 맥주를 더했던 나의 양주에
대한 첫 경험은 지옥문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이었다. 그 후로 몇 년 간 양주
를 마실 기회가 있음에도 쳐다보지 않았다.
일종의 양주에 대한 트라우마를 줬던 그 날,
화장실에서 쓰러졌던 나는 약 대여섯 시간동안 정신을 재차 잃었다. 후에 두 모녀에게
들었는데, 응급실에 가야하나 싶을 정도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고, 잠깐잠깐 정신
이 들었을 때에도 전혀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은영이 집에 저녁식사를 초대를 받고, 거의 24시간 정도 지났을 때,
난 힘겹게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었다. 두 모녀가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지만,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더불어 구역질이 심해서 온전한
내 정신은 아니었다.
괜찮니?
은영이 어머니의 걱정스런 말이 들려왔다. 대답할 힘도 없어서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정상은 아니었다. 은영이 어머니가 나에게 다가
와 내 팔 한쪽을 잡으면서 부축을 했다.
좀 더 쉬지 그러니?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고 싶은 것도 내 몸 하나 눕기 편한 곳에서 하고
싶었다. 더욱이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어렵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은영이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은영아... 이리 와서 부축 좀 해.
나를 부축하고 있던 은영이 어머니가 그녀의 딸을 불렀다. 그리고 나의 다른 팔 하나를
은영이가 붙잡았다. 두 모녀가 나를 부축했고, 우리는 힘겹게 집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성인 남성을 부축했던 두 모녀가 고생했다는 것, 그리고 택시를 잡아탔다는 것 등이 중간
중간 생각났을 뿐, 내가 정신을 완전히 차렸을 때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하룻밤을 통으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였다.
내 옷 차림은 그대로였다. 은영이 집에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을 때 갔던 그 모습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서야 내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소지품도 침대 곁에 널 부러져 있었다.
집에 잘 들어갔어? 몸은 괜찮지?
휴대폰에는 은영이의 문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문의 메시지, 그건 은영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몸이 걱정된다는 것과 술을
억지로 먹인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으며, 언제든지 집에 놀러오라는 내용이 있었다.
두 모녀에게 걱정말라는 문자를 공통적으로 남겼다. 물론, 장문의 문자를 남긴 은영이
어머니에게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 번 찾아뵙겠다는 일종의 예의상, 형식적인
내용을 포함시켰다.
몸이 꿉꿉했다. 그래서 샤워를 하려고 오랫동안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 술을 마시고 처음에 정신을 잃었던 때가 떠올랐다. 누군가 나에게 물을
주기도 했고, 내 소중한 그곳을 만진 것 같았는데... 꿈이었는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속옷은 그대로 입고 있었다. 속옷 안에 내 물건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론, 달라진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꿈같았던 일이 사실이라면 설마 은영이가? 하지만, 그럴 친구는 아니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을 놓고,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고통스러운 순간에 기분 좋은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그 꿈 상대가 은영이 어머니였다면, 잠시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내 물건이 어느새 천장을 향해 고개를 쑤욱 내밀었다.
은영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런 망상을 하면 안 되었지만,
내 피는 가운데로 급속하게 쏠리고 있었다. 그리고 참지 못한 나는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맞으며 정말 시원하게 수음을 시작했다.
은영이 어머니의 속살... 부드러운 감촉, 아 먹고 싶다.
샤워기의 물줄기를 이겨낼 정도로 뜨거운 정액이 쏘아졌다.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순간이었지만 두 다리가 부르르 떨리며 힘이 빠질 정도였다.
욕망을 흐르는 물줄기에 쏟아 부었고, 그제야 난 제정신이 들었다.
일종의 현자타임, 은영이를 생각하면, 그녀의 어머니를 대상으로 자위를 했다는 사실이
미안했고, 또 일종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임에도 왜 난 그 짓을 했을까?
은영아... 미안해.
들을 사람도 없었지만, 홀로 중얼거렸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은영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람.
은영이 어머니를 떠올리며 처음 자위를 한 그 날, 난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은영이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은영이 집에서 숙취로 고생을 한 후,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은영이와 만나는 날에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대신에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술을 좋아하는 은영이도 술을 마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직도 울렁거리는 거야?
거의 한 달간 술병만 보더라도 속이 울렁거렸다.
일종의 ptsd처럼, 술병만 보더라도 구토 끼가 느껴지면서 속이 좋지 않았다. 은영이는
이대로 평생 술을 못 마시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했지만, 그때만큼은 평생 술을 마시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강제로 금주를 하면서 이뤄졌던 은영이와의 만남은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술을 조금이라도 마셨을 때의 분위기가 좀 더 재밌게 느껴졌고, 약간 몽롱한
기운으로 그녀와 몸을 섞을 때가 흥분감이 좋았다.
그렇지만 금주가 꼭 나쁜 것도 아니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가기 좋았고, 그만큼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잠자리 같은 경우도 결국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하는 것이
더 나았다.
나는 물론, 은영이 역시 체력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 관계를
맺다보니까 서로의 체력을 온전하게 사랑 행위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같은 밤을 보내도
한 번이라도 더 할 수 있었고, 같은 한 번이라도 좀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길게 이야기 했지만, 간단히 우리는 쉽게 지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은영이는 나와 섹스를 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친구이기에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이제 섹스 자체를 즐겼다.
아예 만남과 동시에 모텔로 직행하는 일이 잦았다.
우리는 과연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섹스를 했는데,
젊은 날의 열정, 정열을 서로의 몸에 바쳤고,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섹스에 목말라 했다.
먹고 섹스하고, 자고 섹스하고, 또 먹고 섹스하고, 또 자고 섹스를 했다.
다양한 자세로, 다양한 방식으로, 심지어 야동을 함께 보면서 그대로 따라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전혀 지겨워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몸을 더욱 더 갈구했다.
은영이와의 섹스가 잦아질수록, 그녀는 조금씩 변해갔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내가 그녀의 남친이었고, 연인이었다.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내 손을 놓지 않았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남 횟수가 늘어났다.
아니, 만남 횟수를 세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짧더라도 거의 매일같이 만나다시피
했으니까. 오늘부터 1일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나는 우리가 드디어 연인이 되
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은영이는 완전히 내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은영이는 여전히 나와 생각이 달랐다.
술에 대한 공포증이 사라져서 조심스럽게 한 잔을 시작 할 무렵,
은영이는 오랜만에 이뤄진 나의 고백에 다시 한 번 거절의 뜻을 보였다.
친구잖아... 아직은...
그녀의 대답에 난 꽤 큰 실망을 했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친구라면서 아예 선을 긋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녀에게서 나에 대한 미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은영이의 대답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실망을 했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저 은영이를 보고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아픈 과거도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치유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미 치유가 됐을지도, 그저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을 지도 몰랐다.
비록 나와는 친구 관계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갈수록 은영이는 대담해졌다. 카페나 술집에 자리 잡을 때, 남들이 오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으면, 그녀의 여린 손을 내 바지 주머니에 넣어 내 물건을
주물럭거리기 일쑤였다.
그냥 네 고추가 참 좋아서...
미소만큼은 순진무구했지만, 은영이의 행동은 그러지 못했다.
은영이의 극적인 변화를 처음으로 느꼈던 날이 떠오른다. 1-2층으로 이뤄진
대형카페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이 날은 평일이었고, 심지어 오픈과 동시에 갔기 때문에 손님이 전무했다.
은영이와 나는 전망이 좋은 2층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잠시 동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네.
카페의 넓은 2층에는 은영이와 나뿐이었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은영이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을 했다.
빨고 싶어.
어? 여기서?
당황한 나는 가만히 있었고, 은영이가 상체를 숙이면서 내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팬티 밖으로 내 고추를 꺼낸 후, 곧바로 입안으로 삼켜버린다.
나는 어쩔 주 몰랐다. 분명 기분은 좋았지만, 이성적으로는 주위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없다지만, 분명 CCTV가 존재할 것인데, 은영이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올라오면 어떡하지라는 내 걱정과 달리 은영이는 미친 듯이 빨았고,
또 핥았으며, 부드러운 손으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나와 달리 은영이는 정말 대범했다.
그녀는 정말 정성껏 나를 자극했으면, 스스로의 욕구를 채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불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나 귀를 쫑긋거릴 뿐이었다.
CCTV가 있는데...
은영이에게 짧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1층의 직원들은 우리의 이 은밀한 관계를 보고 있을 지도 몰랐다. 내 상식으로는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은영이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점점 물이 밀려옴이 느껴졌다. 참기 힘들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은영이의 머리를 두 손
으로 쥐어 잡았다. 은영이는 나의 이런 행동에 적극적으로 빨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흡입력은 내 고추를 뿌리 채 뽑아내겠다는 의지를 가질 만큼 강력했다.
정말 그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악..
나도 모르게 약간의 소리를 질렀고, 이내 분출이 이뤄졌다.
은영이는 그것을 그대로 다 받아 마시고 있었다.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인지,
쭉 쭉 빨아 마셨고, 난 몇 차례나 욕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휴지로 닦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은영이는 내 욕망의 흔적을 핥았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했을 때, 숙였던 상체를 들며 나를 향해 웃어 보인다. 그녀의 입 주위는
번들거렸고, 난 그녀에게 휴지 몇 장을 건네며 말했다.
CCTV 있다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짜릿하잖아.
은영이의 짜릿한 행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에 유행했던 비디오방이나 DVD방
에서 관계를 맺는 것은 기본이었고, 사람이 흔치 않았던 공원 등에서 내 고추를 자극
시키는 것 역시 일상이었다. 심지어 심야 버스 뒷좌석에서 내 고추를 빨기도 했다.
또한 밀폐 된 술집 공간에서는 술을 마시고 내 몸에 올라타기 일쑤였다.
아마 지금처럼 전자기기가 더 발달 된 시대였다면, 온갖 사진과 영상이 찍혔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때도 누군가에게 목격되거나 찍혔을 지도...
이러한 기행을 이어가던 은영이가 정말 정말 좋아했던 섹스 장소는 극장이었다.
심야 시간의 극장은 관객들이 많지 않았다. 또한 조조할인을 했던 아침도 그러했다.
은영이는 관객이 많지 않은 시간에 극장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장 뒷좌석에서 대놓고 나와 관계를 맺었다.
어둡고 침침한 극장 내부, 빵빵한 사운드 앞에서 은영이는 자신의 욕구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거의 전라에 가깝게 옷을 벗기도 했고, 신음은 참지도 않고 내뱉었다.
처음에는 나 역시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은영이는 짜릿한 섹스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모든 잡생각이 없어지면서 행복의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은영이를 기다려야만 했으니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극장에서의 관계는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비록 다른 곳에서의 짜릿한 관계는 타인의 눈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극장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은영이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난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의 관계를 대놓고
목격하는 사람들까지 확인해야 했다. 물론, 그들 중 몇은 극장 밖으로 나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나 역시 은영이와의 섹스가 너무나 좋았다.
짜릿한 공간에서의 관계도 만족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내 기준에서 선을 넘었던
은영이와의 섹스는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우리를 한 쌍의 짐승처럼 보던 타인의 시선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더라도 취향은 존중하지만, 은영이의 요구는 과했다.
아무리 젊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녀는 섹스에 미친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내 몸을 요구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거 하려고 나 만나는 거야?
흔히 여자들이 한다는 질문,
난 섹스에 미쳐있던 은영이에게 물었고, 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네 몸이 좋아.
반쯤 농담으로 한 질문이었지만, 잠깐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 몸이 좋다는 말, 몸이라는 한 글자만 빠지면 이제 은영이는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몸만 미친 듯이 섞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에 조금씩
내가 스며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마 다음에 고백을 할 때, 그녀는 거절할 수 없으리라.
그녀의 마음까지 가질 날이 가까워짐이 느껴졌다.
섹스에 미친 은영이었지만, 그녀의 마음도 변화가 보였다.
첫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는 진정으로 나에게 안기기를....
누군가는 나를 두고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을,
왜 바보 같은 짓을 하냐고 물을 테지만, 그 때의 나는 은영이에게 진심이었다.
진심, 정말 순수한 내 진심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전부였고, 그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조차 스스로 속일 수 있음을 몰랐던 시기였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은영이와 나는 큰 문제없이 관계를 발전시켰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가까워지는 과정, 목적지는 가까웠고, 첫 눈이 내리기 전에
우리의 관계가 명확하게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는 이용의 잊혀 진 계절이 흘러나왔다.
이 날, 오랜만에 은영이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았다.
저녁식사 초대 후 안부 문자를 보낸 뒤로 그녀와의 직접적인 연락은 처음이었다.
사실 좋아하는 여자의 어머니와 자주 연락하는 것도 어색한 일일 것이다.
잘 지냈니?
미래에 장모가 될 수도 있는 여자였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또한 안부 전화를 하지 않아서 죄송하다는 형식적인
말도 덧붙였다.
다름 아니라... 내가 할 말이 좀 있는데... 오늘 우리 집에 올 수 있을까?
은영이 어머니는 처음 연락했던 그 날처럼,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집으로 찾아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심지어 당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은영이와 나의 관계는 현재로서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묻기 위해서 집으로 당장 오늘 찾아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은영이 어머니는 은영이와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이유라고 생각
했지만, 어제도 만난 은영이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근심도 찾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
은영이 어머니의 목소리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약간의 떨림과 누가 들어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더불어 그녀의 부탁이라는 말에 나는 거절 할
명분조차 없었다. 아니, 애초에 거절할 생각도 아니었지만,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황이라
괜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마워... 있다 봐. 아참, 은영이에게는 비밀이야.
이번 만남도 은영이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렇다면 은영이 어머니가 나를 찾는 건, 은영이 문제
가 확실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은영이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은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그 언니 생일이라... 언니 집에서 파티 할 거야.
은영이의 목소리는 매우 밝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말이 기억이 났다.
친한 언니의 생일 파티를 하기에, 그 날만큼은 나를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 말라는 농담도 했었는데, 그 날이 오늘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은영이는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은영이 집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혼자 있다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은영이 어머니는 그녀의 딸인 은영이 몰래 나를 만나는
것이니까, 은영이가 집에 없는 건 당연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은영이 어머니와의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크게 불편해 할 문제도 아니었지만, 이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필 약속 시간도 저녁 7시였다.
은영이에게 친한 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약속대로 그녀의 어머니와 만남을 한다고 알리지 않았다. 사실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말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은영이 어머니와의 약속이었다.
또한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은영이 어머니와의 만남 이후에 그 사실을 은영이에게 알려
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오는 찝찝함.
그때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당연히 알 수도 없었다.
허나, 두 사람은 피를 나눈 모녀임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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