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친, 나의 어머니

나의 근친, 나의 어머니
먼저, 이 글은 실제 이뤄진 근친 이야기가 아니므로 그런 잡설에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근친이 가능해질 수 있는 조건으로 환경과 성격 2가지를 꼽는다.
환경은 결핍이고 공간이다. 엄마와 아들과의 근친은 아빠(남편)가 없거나, 신체적-재정적으로 기능을 못하거나, 불만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사람일 때 그 가능성이 극대화된다. 완벽한 결핍이다.
아들의 아빠, 엄마의 남편이 사망이나 이혼으로 집에 없고 다른 형제자매도 직장, 유학 등으로 부재할 경우 자유로운 공간이 주어진다. 근친에 필요한 완벽한 공간이다.
성격은 모자간, 남매간에 평소 장난도 치고 애정 표현이 스스럼없는 관계일 때 신체 접촉이 자연스럽고 어느 순간 진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했다가 마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아들이 집요하고 넉살이 좋아도 근친에는 위험하다. 보통은 조금 해 보다 그만둔다. 그러나 집요한 성격들은 뚫릴 때까지 뚫는다. 그럼 엄마는 결국 무너진다. 여자이고 엄마이기 때문에 아들 청을 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나와 우리 어머니는 위의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조건들도 많아 평범한 모자로 남은 관계다. 솔직히 아쉽기는 하다. 한 번 해 봤으면 짜릿했을 텐데...
그러나 못 한 게 결국 잘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건 진리다. 왜? 서로 책임을 질 수 없고, 이뤄질 수가 없는 사이니까 그렇다.
아득히 먼 어린 시절, 나는 얼굴이 예쁜 편이어서 여자 가족들의 뽀뽀 세례를 많이 받으며 자랐다. 그 여자들 중엔 이모도 있고 엄마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난히 엄마의 킷스를 특별하게 받아들였고, 그 맛의 차이를 그 어린 나이에 비교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엄마의 입술은 부드러우면서 감촉이 많이 달랐다. 넓고 깊었다. 향기는 밥 냄새 비슷했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다른 여자들의 킷스는 할 수 없이 대 주는 것이었으되 엄마의 그것은 기다려지는 달콤한 것이었다.
크면서는 엄마가 엄하고 중간에 식모(가정부)가 있어서 손도 별로 안 잡는 사이가 유지됐다. 이것이 사춘기 때는 학교도 도회로 옮겨 더욱 멀어졌다. 엄마가 아버지 욕을 많이 해서 우리 모자는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었으나 그런 성격과 변화들이 절묘하게 그것을 막고 있었다.
지방 대도시에서 자취할 때는 누나가 나의 성 호기심과 성욕 해소(?) 대상이었다. 그러나 누나도 한 성격 하는 여자라 우리 사이에는 멀고 두터운 거리와 벽이 존재했다.
누나의 그곳을 만진 건 내가 중학교 2학년, 그녀가 여고 2학년 때였다. 얇은 옷을 입고 자던 초여름 즈음이었는데, 어느 날 밤 내 손이 누나의 둔덕을 파고 들어갔다. 그 후 더 그 짓을 한 몇 번의 경험을 기억해 보면, 어떤 때는 까슬까슬한 털이 만져지고 어떤 때는 보드라운 살 언덕이 만져졌다.
그날 누나의 보지 속은 윤활유가 발라진 듯 부드럽고 미끄러웠다. 그때 난 왜 미끄러운지를 몰랐다. 그냥 여자의 성기 속은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손에 묻은 그 액체 냄새도 맡아 보지 않았다. 누나가 자지 않고 내 손길을 느끼면서 애액이 나온 것인지 자다가 몽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나는 흥분 속에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 성기 속을 들어간 본 사실에 떨었다. 그러나 바로 또 시도해 볼 생각은 하지 못 했고, 안 했다. 누나는 그만큼 무섭고 성깔이 있는 여자였고, 헤프지 않은 정숙한 숙녀였다.
고3 때 어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학교에 갔다 오니 내가 그토록 원하던 물건을 사서 내 방에 놓아둔 것을 보고 기뻐서 그녀에게 달려가 포옹을 하려고 했었다.
내 딴에는 이제 많이 컸고, 그 정도 도시형(?) 애정 표시는 할 수 있다고 보고 하려던 것이었지만, 엄마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돌렸다. 부끄러움이 몸에 밴 시골 여자라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때 엄마도 나를 하나의 남자로 본다는 걸 알았다.
이런 일 말고도 엄마의 팔이나 다리를 만져 볼 기회는 많았다. 그녀는 기능이 떨어진 부위를 보여 주면서 만져 보라고 할 때가 많았다. 다른 뜻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냥 자기가 그렇게 고생하고 몸의 일부가 고장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알리고 싶었는지, 아니면 ... 아마 그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가 아는가? 아버지보다는 아들이 만져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엄마는 그전이나 그 후나 한결같이 아버지 흉을 보는 데 자제라는 게 없었다. 자나 깨나 "니 앱씨"라거나 "그놈" 하면서 한 맺힌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내가 애교를 잘 피우고 말을 잘 꾸며서 하는 아들이었으면, 여기 게시판에 많이 보이는 것처럼 "엄마는 우리 아들밖에 없어"라고 하며 내 품에 안겼을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둘이만 한 방에서 잘 때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렇게 되기가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얘기는 언제나 낮에, 밤에는 따로 자는 공간에서 이뤄졌다. 술도 나는 마시지 않을 때였다.
우리 어머니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먼 훗날 내가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전에 알고, 엄마랑 술 한잔할 생각을 하는 아들이었다면 상황은 벌써 달라졌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자 근친은 여자에게 잘하는 아들이 잘할 수 있는 사랑의 종류다. 엄마도 여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서로의 몸을 가장 가깝게 붙인 것은 결혼 전이던 20대 중반, 그녀는 50대 초반이었을 때다. 아마 아버지와 싸우고 홧김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 같다.
강남 터미널에서 만나 걸어가는데, 엄마가 팔짱을 꼈다. 난생처음이었다. 다른 모자간에는 별 것 아닌 접촉이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순간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걸어갔다. 엄마의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때 엄마 몸을 가질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온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지금도 가끔 한다.
"엄마, 술 좀 사 가지고 저기 들어가서 잠깐 쉬기도 하고 그동안 못다 한 얘기나 할까?"
저기는 온천 마크가 새겨진 여관(모텔)이다. 엄마는 십중팔구 처음에는 멈칫하다 내가 몇 번 더 가자고 했으면 내 팔에 끌려 들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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