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여대생이랑 ㅅㅅ한 썰 2편
씨발, 한동안 나는 셀프방황을 했다.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멍멍이처럼 순진했던 것 같다.
막말로 여대생 3학년이 자취방에서 자기 남친과 섹스 좀 했기로서니 무슨 "걸레"냐? 다만
박정아 선배를 선녀처럼 우러러 본 나뭇꾼 21살의 순정으로는 그렇게 느낄 뿐이었다.
난 동네 당구장에서 삼수생 및 장수생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며 살았다.
덕분에 100 치던 나의 다마수를 단기간 150까지 올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동안 집에서 '뉴키즈 온더블록'의 대니우드를 흉내내면 브레이크 댄스도 연습했다.
재수가 좋아 주머니에 몇 만원이라도 생기면 술마시고 친구들과 청량리에 갔다. 당시 청량리에는 빡촌이 있었다.
원래 난 친구들이 그런데 가면 구석탱이에서 가방만 지키는 가방돌이였는데 박정아 선배의 그 사건 이후 내상을 입어
나도 돈 내고 여자를 샀다. 박정아 선배를 생각하며 헐떡대는 창녀들의 봊이에 미친듯이 쑤시고 나면 마음이 조금 풀리곤 했다.
그렇다고 내면의 공허함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며칠 그러고 살다가 하루는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개맞듯 맞으며 된통 혼났다.
- 너 요즘 왜 학교안가는겨? 이 에미가 힘들게 대학 보냈는데 정말 공부 안할겨? 이상한 노래 듣더니 빨갱이가 된겨?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우리 집의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가족의 희망인 내가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박정아 선배도 집으로 몇 번 전화가 왔다. 내가 한동안 학교에서 안보이니 집으로 전화를 한 것 같다.
어차피 오르지도 못할 나무인데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난 스스로 위안을 했다.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식민지 분단 조국의 당당한 청춘 이재철, 넌 기껏 여자에 눈이 어두워서 이리 방탕한 삶을 살 것인가?
조국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밤 하늘의 빛나는 별빛과 같은 너의 청춘을 내던져라.
그동안 읽은 몇가지 저급한 이념 서적들이 내 삶의 태도 변화를 갖고 왔다. 난 원래 잘난체도 좋아하고 소영웅심리도 좀 있는
놈이다. 슬그머니 다시 학교로 나갔다. 진호는 벌써 아무렇지 않은 듯 생활하고 있었다. 걔도 원래 그런 종족이다.
진호보다는 내가 정아선배를 많이 좋아해서 내상이 컸던 것 같다.
- 재철이, 너 무슨일 있었던거야?
정아선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따뜻하게 물었다.
'뻔뻔한 년, 기껏 22살 여대생이 순진한 척 하면서 밤에 자취방에서 남학생과 섹스를 나누다니..'
지금보다는 아무래도 유교탈레반 적이고 보수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마광x가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을 썼다가 음란물 배포 혐의로 재판받던 때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원래 대학은 커도 대학내 운동판 이너써클이 엄청 좁다.
슬쩍 수소문 해봤더니 정아선배의 남자친구는 총학생회 사회부장 이을룡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이을룡 선배! 둘은 썸씽 스페셜한 사이였던 것 같다.
을룡선배는 다른 과지만 정아선배랑 같은 3학년에 둘이 고향도 같았다.
을룡선배도 현역 3학년으로 당시 운동권들은 거의 군입대를 졸업 후로 미뤘다.
총학생회 사회부장이라는게 말이 사회부장이지 사실 모든 시위를 주동하는 위치다. 현장의 사수대장과는 또 달랐다.
당시 각 대학총학생회에는 저학년 중심의 전문 데모꾼들 데모할 때
맨앞에서서 얼굴 가리고 화염병 던지는 이른바 사수대가 있었다.
건국대의 '황소대', 단국대의 '사노라면', 명지대의 '복수대' 등등이 기억나고
남총련(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의 중심인 전남대의 '5월대'와 조선대의 '녹두대'는 아예 전국구 명성을 날렸다.
걔네들은 원정 시위도 잘 참가했다.
우리 학교 역대 총학 사회부장은 전부다 재학 중에 구속되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이을룡 선배 감옥가면 옥바라지 해야하고 섹스도 못할텐데 연인들끼리 그전에 실컷 하는게 무슨 죄랴.
가만히 살펴보니 박정아 선배는 과내 소모임 회장이지만
사실 우리 학교 총학생회 운동권 수뇌부와 어울리며 외곽에 위치한 포지션 같았다. (그들의 조직은 다음 회에 밝히겠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박정아 선배의 해맑은 예쁜 얼굴과 게스 청바지를 입은 모델같은 어여쁜 히프
라인을 보면서 울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더 웃긴 것은 을룡이라는 선배는 그냥 전형적인 농촌 총각처럼 생겼다.
얼굴도 까맣게 그을리고 멋도 안부리는 스타일에 티셔츠도 리어카 3천원짜리 하나 걸치고 다녔다.
그런 을룡선배를 도회적이고 세련된 박정아 선배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참 이념이라는 게 무섭다고도 생각했다.
가끔 과학생회실에 노닥거리고 있으면 을룡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과회장 종학이형이나 임원이 받았다.
"오늘 정문 앞에서 선전투쟁은 해야 하는데 몇명 좀 보내줘요."
일종의 동원령이다. 선전투쟁은 뭐 한마디로 구호를 광고하는 것을 말한다. 나도 그런 식으로 과 임원들과 함께 딸려나갔다.
그렇게 등교시간에 정문앞에서 "학원 자주화 추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곤 했다.
선배들 말로는 재단이 썩었고 비리가 많으니 학생들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진짜 당시 대학문화는 온통 운동권이 차지했다.
노래패도, 풍물패도, 연극패도, 문학패도 심지어 만화동아리도 민중만화인지 뭔지 운동권이 장악했다.
요리가도 운동권, 저리가도 운동권이었다.
미친척 하고 당시 노태우가 총재로 있던 집권여당 민자당 지지하는 학생이 있다면 바로 도륙을 당할 판이었다.
그런 학생들은 죄인처런 숨죽여 지냈다. 아버지가 경찰이나 공기업, 공무원 다니는 애들은 죄다 죄인, 니들은 그냥 닥치고
조용히 공부나 해. 이런거?
나는 을룡선배를 관찰해봤다.
"노태우 정권의 썩은 심장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을룡선배는 그렇게 집회현장에서 임종석이 작사했다는 <결전가>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했다. 평소에 농촌총각 같은 을룡선배는
사투리 써가며 대중 연설도 기가막히게 잘했다. 물론 연설하면 우리과회장 종학선배가 당대 최고였다.
을룡선배는 늘 자주, 민주, 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을룡선배가 말하는 자주 민주 통일이란 결국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연방조국 통일이라는 북한의 3대 대남혁명노선의 교묘한 말장난이라는 것을 그땐 몰랐다.
을룡선배는 시위현장에 나가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다. 평소에는 저학년이라도 자기가 잘 모르면 존댓말을 쓰곤 했는데
시위현장에서는 사람이 일리단으로 변했다. 쭈삣쭈삣거리는 저학년 학생들의 조인트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니들 똑바로 해! 여기 지금 장난하러 온 줄 알아?!!여긴 전쟁터야!"
을룡선배 뿐 아니라 시위를 주동하는 다른 총학 간부들, 재야 운동권 동아리 멤버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심지어 여학생들도 그렇게 긴장과 흥분 상태로 시위에 임했다. 처음에는 사상이 투철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절대 아니었다. 시위 현장에 나가면 봄햇살에 전경들의 검은 헬멧과 군화가 번쩍번쩍거렸다.
그것은 엄청 위압감을 줬다. 마치 와우의 확장팩 불타는 군단 같았다.
화염병 던지다가 잡히면 구속이고 시위하다가 잡혀도 초범들은 훈방조치 되지만
웬만한 학생회 간부들은 집시법으로 처벌 받았다. 그러니 스스로 내면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감정을 과장했던 것 같다.
게다가 백골단의 공포는 또 어떠한가? 와우의 불타는 군단보다 더 무서웠다.
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그들은 돌연 나타나서 사과탄이라는 불리우는 둥근 최루탄을 집어 던졌다.
하늘로 향해 던지면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데 아스팔트 바닥 위로 던졌다. 야구공처럼 통통 거리면서 바운드를 튕기니
거리를 측정하기도 힘들었다. 꽤 먼거리에서까지 통통 거리면서 튀어 오다가 미칠듯이 최루가스를 쏟아내어 지랄탄이라고 불렀다.
난 불발 사과탄 하다 주워다가 집에 보관했는데 친구가 놀러왔다가 신기하다고 훔쳐갔다.
시위를 주도하는 박정아 선배의 애인인 을룡선배가 진짜 말퓨리온 처럼 멋있고 위대해 보엿다.
인문대에서 우리 과가 워낙 운동권이 강세인지라 을룡선배는 자주 과학생회실에 놀러왔다.
우리과 회장인 종학이 형에게 상당히 공손했다. 종학이형은 일개(?) 과 학회장이지만 군대를 다녀온 고학번에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총학생회장도 종학이형을 떠받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서술하겠지만 종학이형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거물이었다.
학기 초인데다 학교 주변에 자취나 하숙하는 학생들이 제법 많아서 밤이면 술자리가 끊이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한곡조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뽑곤 했다. 운동권들이라서 그런지 절대 가요를 부르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이선희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목이 근질근질했다.
기껏해야 <아침이슬>이나 <광야에서> <솔아솔아 푸른 솔아>류의 노래나 김민기의 <친구>
안치환, 노찾사의 노래들 그 외에는 대부분 데모곡이었다.
종학이형은 무슨 '인민의 별'인가 하는 뭔가 노래를 불렀다. 옆에 어떤 선배가 농담으로 "종학이형은 완전 인민군이야," 라고
수근거렸다. 사실 종학이형의 별명은 '빨치산'이었다. 그 형은 예전에 통일선봉대인가 뭔가 간부로 국토횡당하는데 참가했고
백골단 한명 잡아다가 개패듯 패 입원시켰다는 전설도 있었다. 통일선봉대를 '20세기 빨치산'이라고 불렀다.
김종학 - 박정아- 최을룡 이런 선배들이 이른바 NL 민족해방계열이라는 것을 그즈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과는 NL 학생 운동권이 장악하고 있던 자주 인문대의 최선봉이었다
난 NL이 뭔지 PD가 뭔지도 몰랐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1학년에 운동권 중에 두각을 나타내던 나도 엉겹결에 NL로 분류되었다. NL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라는 것을 그때는 개뿔도 몰랐는데 말이다.
우리 과에는 과특성상 여자가 졸라 많았다. 이른바 '여소남대' 현상이었다.
90년 민자당 3당 통합하기 전까지 국회 정당 비율이 '여소야대'라고 해서 그렇게 빗댄것 같다.
나는 키도 크고 마스크가 크게 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는지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물론 남자가 부족하니 "거품인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땐 여대생들이 머리에 똥만 들었는지 데모하고 다니는 남학생들이 오히려 더 인기가 많았다. 집회와 시위에
매번 참석안하면 "소부르주아 근성을 가진 이기적인 놈"으로 몰리고 그랬다.
이상하게 재수할 때 학원 여자 재수생들은 그렇게 예뻤는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니
과 여학생들이 대부분 안여돼나 안여멸이 많았다.
그나마 다른 과에는 좀 예쁜 애들이 있었고 인근 전문대에는 전국의 팔도미녀들이 다 모인것 같았다.
세상은 불공평했고 난 풍요속의 빈곤을 느꼈다. 내가 제대로 연애했으면 그런 운동판에 휩싸이지 않았을 수 있다.
총학생회에서 등록금 투쟁 이른바 '등투'를 한다고 해서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많이 했다. 단과대 앞에 조금만 공간이 있는데
학생들은 거기를 민주광장이라고 불렀다. 매번 그 자리에다 확성기에 데모곡을 크게 틀어놓아 강의시간에 엄청 방해가 되었지만
당시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는 운동권 학생들의 기세가 워낙 의기양양해서 아무도 태클을 걸지 못했다.
우리과 1학년은 독문과와 같이 교양수업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교양교수가 소신(?)발언을 했다.
"아, 수업시간에 저 노래가 뭡니까? 진짜 방해가 되네요. 학자추? 정말 우리 학교 재단에 비리가 그렇게 많은건가요? 전 모르겠는데요."
원래 50대인 그 교수님은 학생들은 설득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창 강의시간에 확성기에서 방송이 나오니 짜증을 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독문과에 어떤 놈이 벌떡 일어났다.
"교수님, 지금 그 발언 취소해주십시요" 걘 데모판에서 자주 보고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성은 모르고 이름은 양우라는 친구인데
독문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나같은 새끼운동권이었다. 난 평소에도 그 녀석이 플래카드를 들고 인문대 앞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원래 찌질이들은 찌질이를 서로 알아보듯 운동권은 운동권을 서로 알아본다.
강의실이 갑자기 쥐죽은 듯 싸늘해졌다. 교수님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난 취소 못한다고 맞섰다.
그러자 양우라는 놈이 "내가 재단비리를 보여드리겠다" 며 돌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씩씩 거리면서 어디서 자료를
몇장 들고와서 교단앞으로 나가 교수님 얼굴에 자료를 들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의없네! 저런 싹바가지 없는 새끼..갓 20살 1학년 학생이 50대 교수님에게..'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침착한 것은 교수님이었다. 돋수 높은 안경으로 한참을 요모조모 들여다보더니 일갈했다.
"아, 이건 총학생회의 일방적인 주장이잖아요!"
헐! 그랬다. 양우가 들고 온 것은 기껏 총학생회 학술부에서 만든 자료 A4 몇장이었다.
잠시 당황한 양우가 "교수님은 오늘 발언을 책임지셔야 할 것"이라고 노려보면서 강의실 밖으로 아예 가방을 들고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드르륵 의자 소리가 들리며 또 한 놈이 따라 나갔다. 따라나간 애도 새끼운동권이었다.
마치 영화 <친구>에서 선생님 한테 개긴 유오성이 밖으로 나가니 장동건이 따라 나가던 장면과 비슷했다.
교수님은 그걸 보고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 그 교수님은 서둘러 강의를 마치며 한마디 했다.
"학생들의 정의로운 마음을 알겠는데 지금 여러분은 너무 편향적입니다.
난 여러분들이 우리 사회의 공정한 빛과 소금이 되었으면 합니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강의실을 나가면서 하신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땐 왜그렇게 다들 철이없었는지. ㅜㅜ
그러나 과학생회실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또 달라졌다. 난 다시 민족해방의 투사가 되었다. 당시 학회실 캐비넷에는 살상무기인 화염병이 버젓히 있었다. 그리고 각종 민족해방관련 사회과학 서적이 널려있었다.
"노태우 파쇼정권 타도"는 응당 우리가 지녀야 할 교양이자 청년학도의 책무였다.
분단된 조국 미제의 식민지 학생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그냥 그렇게 멋도 모르고 운동권 문화에 심취해가고 매몰돼 갔다.
한번은 등투 집회를 마치고 강의실로 돌아오는데 4학년 어떤 여자 선배가 나한테 다가왔다.
두꺼운 안경을 쓴 공부벌레 같은 여자였다.
난 인사를 했다. 평소에 나한테 잘해준 선배다. CCC 인가.. 학내 기독교 학생회 모임인가 뭔가에서 간부하던 선배였다.
- 재철이, 어디갔다 오니?
- 네, 민주광장에서 등록금 투쟁 집회 했잖아요.
난 자랑스럽게 말했다. 치하의 말씀을 해줄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그 CCC 선배가 입을 열었다.
- 재철이는 지금 저기 저 사람들이 단순히 등록금 때문에 집회를 하는것 같아?
- 아닌가요? 그리고 지금 학원 자주화 투쟁기간이잖아요?
난 의아해서 반문했다.
- 재철아, 내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은 지금 등록금을 위한 투쟁을 하는게 아니야.
- 네? 그럼요?
그 누나는 뭔가 얘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말없이 날 바라보더니 경상대 풀밭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상하게 여운이 남았다.
난 그 4학년 누나가 작년에 인문대의 운동권 정파 후보들에 맞서 비운동권 학생회장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러고 보면 보통 학생은 아니었다. 난 훗날 복학하고 운동권들의 핵심자료 일명 '내부 지도문건'을 본 적이 있다.
<등록금 투쟁은 단순히 등록금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총체적 저항의 일환으로서
전투적 총학생회를 양성하며 우리 대학생들의 저항의식과 투쟁야성을 기르기 위함인 것이다.>
뭐 이런 내용? 난 허탈했다. 결국 등록금을 적게 인상해도 투쟁하고 많이 인상해도 투쟁했을 거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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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운동권 여대생이랑 ㅅㅅ한 썰 2편 (야설 | 은꼴사 | 놀이터 | 썰 게시판 - 핫썰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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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썰의 시리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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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015.12.19 | 운동권 여대생이랑 ㅅㅅ한 썰 5편 (1) |
2 | 2015.11.26 | 운동권 여대생이랑 ㅅㅅ한 썰 4편 |
3 | 2015.11.26 | 운동권 여대생이랑 ㅅㅅ한 썰 3편 (1) |
4 | 2015.11.21 | 현재글 운동권 여대생이랑 ㅅㅅ한 썰 2편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