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천년 3-8
네코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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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전
第8章 당신이 바로……!
안개.
짙은 물안개가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강변을 휘감고 있었다.
-회룡강(廻龍江)!
유황곡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곳을 휘도는 그 강변 일대는 짙은 물안
개로 덮여있었다.
자욱한 물안개 속에는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유령같이 서 있었다.
강 안에 빼곡이 정박해 있는 전함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변에는 수천 개의 천막들이 마치 버섯처럼 둘
러서 있었다.
한데 아직 가시지 않은 어둠과 짙은 물안개를 방패삼아 소리없이 움
직이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저기다! 저 천막이 폭풍잠룡의 거처다!'
은밀하고 기쾌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 인영은
물론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형형한 시선으로 천막 군락의 가운데 자리한 하나의 천막을
주시했다.
유달리 크고 화려한 그 천막의 지붕에는 바람 풍(風)자가 힘차게 쓰
여진 검은 깃발이 새벽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깃발은 바로 폭풍
군도의 지존(至尊)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검한은 오감을 최대한 발휘하여 그 천막을 향해 접근했다.
지금 그는 수만 명의 절정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적진 속을 헤쳐가
고 있었다. 만일 종적이 들킨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이검한이 아무리 강인하다 해도 그는 단신이었다. 혼자서 수만 명의
적을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인간이 아닌 하나같이 상승무예를 지닌 고수들임에랴.
하지만 천만다행이랄까?
폭풍군도의 고수들은 경비병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깊은 새벽잠에 빠
져 있었다.
덕분에 이검한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중앙의 천막으로 접근할 수
가 있었다.
천막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이검한은 소리없이 천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데 그가 막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스읏!
어둠 속에서 섬광 같은 예기가 그의 목전으로 다가왔다.
'빠르다!'
이검한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막 안에서 누군가 기다
리고 있다가 기습을 해온 것이 아닌가?
그 인물이 기습해온 속도는 너무 빨라 이검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
들었다.
하지만 놀라는 사이에도 이검한의 본능은 신쾌한 반응을 일으켰다.
스악!
그가 미처 느낄 틈도 없이 그의 수중에 들린 장검이 허공을 그어갔다
. 복마신검결로 터득한 심검(心劍)이 위기의 순간 발동한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허공에서 서로 다른 섬광이 맹렬히 그어졌다.
그 일초 일초는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초식들이었다.
거의 찰나의 순간 이검한과 보이지 않는 상대는 백여 초를 교환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피차 최고의 경지에 이른 절정고수였기에 쓸데없는 헛손질
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인은 질풍같이 방향을 바꾸며 상대를 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
하지만 어느 쪽도 상대에 일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이검한과 보이지 않는 적의 실력은 가히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
었다. 이대로 초식으로 승부를 내려면 그들은 일만 초 이상을 겨루어
야만 할 것이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삐이이익!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천막 밖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천막 주위로 수많은 파공성이 들려왔다.
순간 이검한은 안색이 일변했다.
'아차!'
그는 호각소리와 날렵한 파공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것이
었다.
'함정(陷穽)이다!'
그의 안색이 낭패함으로 이지러졌다.
함정(陷穽)!
그렇다. 폭풍군도 쪽에서는 오늘 밤 이검한이 자신들의 맹주를 암살
하러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해서 그들은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했다.
그리고 일단 이검한이 맹주의 처소에 잠입하는 순간 수많은 고수들이
일거에 천막을 포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가히 천라지망(天羅地網)이었다. 대라신선이라 해도 빠져 나
갈 수 없는 완벽한 함정.
그때였다.
스팟!
이검한의 정신이 잠시 엇갈리는 순간 그의 어깨쪽에서 섬뜩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대의 병기가 마침내 그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이었다.
이검한은 본능적으로 십팔검을 찔러내 상대의 후속 공격을 막아내며
비틀 물러섰다.
"귀하는 이미 천라지망에 갇혔다. 순순히 투항하라!"
그때 어둠 속의 상대가 나직하나 위압적인 음성으로 일갈하며 무기를
거두었다.
'이 목소리는!'
헌데 상대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와 동시에,
"당… 당신은!"
어둠 속에서 재차 나직하나 온통 경악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상
대도 비로소 이검한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이었다.
"소저!"
이검한 역시 신음성을 발하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미청년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육 척에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시원시원한 용모인 그 미청년의 수중
에는 도신(刀身)의 폭이 넓은 한 자루 칼이 들려 있었다.
폭풍잠룡 군옥- 아니, 군여옥!
바로 그녀가 아닌가?
여자로 태어났으되 어쩔 수 없이 사내로 자라야만 했던 비운의 여인.
이검한과 군여옥은 잠시 멍하니 선 채 서로를 주시했다.
'폭풍잠룡이 여자였다니!'
이검한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지옥마교(地獄魔敎)에 필적하는 최강의 패세 폭풍군도!
그 폭풍군도의 젋은 맹주 폭풍잠룡이 여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운명의 장난으로 이검한과 군여옥은 이미 서로 몸을 섞은
사이가 아닌가?
엄청난 충격을 받기는 군여옥도 마찬가지였다.
'당… 당신이… 고독전신이었다니……!'
그녀의 입가로도 소리없는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우는 듯 웃는 듯 곤혹한 표정으로 물드는 그녀의 얼굴,
처음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던 호방한 사내,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순결까지 바쳤던 상대,
군여옥의 인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내가 다름아닌 자신
의 숙적인 중원제일인(中原第一人)이라니…
운명의 여신의 짓궂은 장난에 군여옥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
를 심정이었다.
"소… 소저……!"
그때 이검한이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군여옥이 급히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이검한의 말을 저지했
다.
"맹주! 무사하십니까?"
직후 천막 밖에서 우렁우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군여옥은 소리없이 움직여 천막의 찢긴 틈으로 다가가 밖을 보았다.
이검한도 그 뒤로 다가가 밖의 동정을 살폈다.
'최악이로군!'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천막 밖은 이미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폭풍군도의 고수들이 천막 주위를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있
어 실로 입추의 여지조차 없었다.
하나같이 강인한 인상의 무리들,
특히 그들 중 십여 명은 지옥마교의 최강자들인 십대천마(十大天魔)
에 필적하는 고수로 보였다.
이검한이 제 아무리 강해도 십대천마급의 고수 이삼 인이 협공하면
견디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 최강의 고수들은 바로 폭풍사가(暴風四家)의 신임가주들과 최고
원로들이었다.
"설마… 당신이 고독전신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함께 천막 밖을 내다보던 군여옥이 문득 탄식하며 전음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함정은 바로 군여옥 자신이 파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이검한의 정체를 미리 알았다면 이런 필살(必殺)
의 함정은 파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검한과 가까이 몸을 붙이고 선 군여옥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음을 이검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검한을 위해 진심
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검한은 나직한 고수를 발했다.
"후훗! 가히 필살(必殺)의 함정이오. 내가 하늘로 솟는 재주가 없는
한 살아서 빠져나가기는 틀린 듯싶소!"
물론 그것은 전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말은 괜히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기는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이검한이 당했던 위기란 거의 대부분 일 대 일의 승부였다.
그런 경우에 그는 요행이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틀렸다.
십대천막에 필적하는 고수가 자그만치 십여 명이었다.
거기에다 마교백강(魔敎百强) 수준의 강자가 천여 명에 달했으니…
어디 그뿐이랴? 수만 명의 중무장한 강병들은 또 어떠한가?
이검한이 지금보다 몇 배 강해진다 해도 이 엄청난 군세를 돌파하고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이검한은 문득 초탈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후훗! 나 이검한의 인생도 여기가 종점인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여기자 오히려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의 뇌리로 사랑하는 수많은 여인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갔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간의 일이었을 뿐이다.
이검한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도리가 없구려!"
그는 천천히 천막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어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기왕에 죽을 목숨이라면 당신 손에 죽고 싶소. 군… 소저!"
그는 싱긋 웃으며 군여옥을 올려다 보았다.
"자, 어서 내 목을 치시오! 당신의 수하들이 난입하여 나를 욕보이기
전에!"
그는 마음의 작정을 한 듯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군여옥의 커다란 봉목에 일순 물결 같은 파문이 일었다.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은 여러 차례 흔들리며 변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빛은 한 가지 결심으로 물들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 상공!"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이어 그녀는 천천히 이검한을 향해 다가섰다.
"말씀하시오, 군소저!"
이검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여옥은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망설임 끝에 겨우 용기를 얻어 가늘게 떨려나오는 그녀의 음성에 이
검한은 흠칫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천만뜻밖의 질문이었
기 때문이다.
이검한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군여옥이 그 같은 질문을 하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쉽게 대답할 만한 성질의 질문이 아니오!"
그의 음성은 신중하고도 진지했다.
순간 군여옥의 짙은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단 말씀인가요?"
그렇게 되묻는 그녀의 음성 또한 비맞은 참새의 깃털마냥 떨리고 있
었다.
이검한은 침중한 안색을 지었다.
"그런 뜻이 아니오. 단지, 사랑이란 감정은 한 마디 말로 정의를 내
릴 수가 없는……!"
말을 하던 그는 다시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르르…
눈물! 군여옥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것이다
.
사내의 복장은 했으되 타고난 드높은 기품과 미모를 감출 수 없는 여
인…
강인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던 그녀가 지금 이검한의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이검한은 가슴 뭉클한 무엇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하오, 군소저!"
바르르…
이검한의 말을 듣는 순간 군여옥의 몸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심한 떨림을 보였다.
하지만 심한 감정의 격동은 이내 어떤 안도감과 함께 그녀로 하여금
그윽한 미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되었어요. 상공!"
군여옥은 비개인 후의 햇살처럼 맑고 투명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그 한 마디가 제게 용기를 주었어요!"
퍽!
말과 함께 그녀는 이검한이 미처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들고 있던
칼로 자신의 복부를 세차게 찔렸다.
"소저!"
이검한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의 동시에 앉아 있던 이검한의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확 끼얹어졌
다.
쿵!
따당……!
직후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군여옥은 칼을 떨구며 힘없이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그런 그녀의 복부는 삽시에 피로 범벅되었다.
이검한은 아연실색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다급히 달려들어 군여옥의 복부 상처를 지혈했다.
너무도 갑작스레 벌어진 예기치 못한 사태에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
하지만 군여옥은 그런 이검한을 올려다 보며 창백한 안색으로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니까요."
그녀는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물든 이검한의 눈을 주시하며 그윽한 눈
빛을 지었다.
"당신이 이 사지(死地)를 빠져나가려면 저를 인질로 삼을 수밖에 없
어요."
그 말에 이검한은 흠칫했다. 비로소 그는 군여옥의 의도를 안 것이었
다.
"저의 수하들을 속이려면 이 정도의 중상은… 입어야 하는 것 아니겠
어요?"
그 말을 끝으로 군여옥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나친 출혈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소저……!"
이검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격한 감동의 파도가 그의 가슴 깊
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사랑스럽다!'
그는 진심으로 군여옥에 대한 애정이 뭉클 솟구침을 느꼈다.
'그렇다. 군소저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결심한 순간 그는 기절한 군여옥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났다.
이어 그는 천막의 한 귀퉁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퍽!
그가 칼을 한 번 휘두르자 천막의 한 귀퉁이가 그대로 뜯겨나갔다.
"헉! 저럴 수가……!"
"맹주님이 사로잡히셨다!"
직후 엄청난 경악성과 격동이 천막 밖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맹주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웬 낯선
청년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이… 이놈! 맹주님을 내려놔라!"
"육시를 할 놈! 살려보내지 않겠다!"
분노의 욕설과 함께 노기등등한 외침이 일시에 이검한의 귓전을 멍멍
하게 만들었다. 수만 쌍의 분노한 눈길들이 일제히 이검한에게 쇄도
해왔다.
그런 그들의 기세에 이검한은 절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닥… 쳐랏!"
하지만 이검한은 복마사자후(伏魔獅子吼)를 실어 한 소리 폭갈을 내
질렀다.
우르릉…
순간 그의 일갈에 십 리 사방이 들썩였으며 천막과 강에 잇대어진 전
함들이 세차게 흔들거렸다.
폭풍군도의 하급 무사들은 그 충격에 안색이 하얗게 변해 신형을 휘
청였다.
절정고수들 또한 안색이 일변했다.
그만큼 이검한이 복마사자후로 지른 일갈은 위력적이었다.
이검한은 일거에 장내의 소란을 멈추게 한 후 장검으로 안고 있던 군
여옥의 목을 겨누었다.
"그렇다. 본인이 바로 이검한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귀군도의
맹주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인들을 향해 당당하고 위압적인 어조로 외쳤다.
"보다시피 귀군도의 맹주는 본인의 수중에 있다. 만일 그대들이 본인
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방해한다면 이 자의 목숨은 없다!"
그는 짐짓 위협적인 어조로 경고했다.
"그런 네놈 역시 갈가리 찢겨 죽는다는 걸 모르겠느냐?"
그때 이검한의 옆에서 앙칼진 여인의 교갈이 들려왔다.
이검한은 흠칫하며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백살마고!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남편 흑수교룡의 부축을 받고 선 채 이검한을
노려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후덕한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검한의
정체도 모르고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겠지!"
이검한은 짐짓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해서 본인은 귀하들에게 협상을 요구하는 바이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중인들은 감히 경거망동치 못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일제히 이검한을
주시했다.
이검한은 그런 그들을 향해 잘라 말했다.
"본좌를 유황곡의 경계까지 가도록 보장해 준다면 귀군도의 맹주를
해치지 않겠소!"
그 말에 백살마고가 앙칼진 음성으로 반박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
그녀는 불신과 경계의 빛이 가득한 눈으로 이검한을 노려 보았다.
"네놈이 유황곡으로 숨어들어가면서 소주님도 함께 납치해가면 우리
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꼴이 아니겠느냐?"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귀하들의 자유요!"
이검한은 침중한 어조로 잘라 말한 뒤 입을 닫아 버렸다.
잠시 중인들 사이에는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흑수교룡이 침통한 음성으로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좋다. 잠시 시간을 다오! 협의를 해봐야겠으니……!"
이어 그는 폭풍삼가(暴風三家)의 신임가주들과 원로들을 한쪽으로 모
이게 했다.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은 서로 무엇인가 전음으로 말을 주
고 받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검한 역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초조해졌다
. 그들의 결정 여하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다행히 폭풍군도의 원로들은 이검한이 바라는 대로 결론을
내렸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이검한!"
흑수교룡이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어 그는 중인들을 돌아보며 손을 저어 보였다.
사삭……!
순간 이검한을 에워싼 포위망의 일각이 물결같이 갈라지며 통로가 생
겨났다.
이검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하셨쇼, 여러분!"
그는 중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슥!
그는 즉시 군여옥을 안은 채 뚫려진 포위망의 틈으로 몸을 날렸다.
폭풍군도의 수하들은 자신들의 앞을 통과하는 이검한을 주시하며 분
로와 살기로 이를 갈았다.
"바득… 이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다!"
"네놈이 갈곳은 지옥뿐이다."
그들은 노기로 떨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감히 원로들의 결정을 어기고 이검한의 앞을 방해
하지는 못했다.
화락!
이검한은 안도의 표정으로 질풍같이 폭풍군도의 진영을 빠져 나왔다.
삽시에 그는 회룡강변의 험한 단애 위까지 이르렀다.
콰아… 우르르릉!
회룡탄(廻龍灘)이라 불리는 그 단애 아래로는 회룡강의 거친 격랑이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포효하고 있었다.
그 단애를 따라 달리면 순식간에 유황곡에 이를 것이다.
한데 이검한이 막 회룡탄 위에 이르렀을 때였다.
"죽… 어랏!"
돌연 살기 가득한 한소리 폭갈이 회룡탄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쐐애애액!
그와 함께 단애 아래에서 한 가닥 찬연한 섬광이 휙 떠올라 이검한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마치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급습이었다.
더구나 이검한의 신경은 온통 후면의 폭풍군도의 고수들에게만 집중
되어 있던 터였다. 그 때문에 그는 돌연히 가해진 급습에 대비할 틈
이 없었다.
스앗!
흠칫함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장검이 저절로 반응하며 기습해온 무
기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이검한의 방어는 여지없이 꿰뚫려 버리고 말았
다.
퍽!
"크윽!"
그는 가슴에 이는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거렸
다.
보라! 한 자루 반투명하고도 얇은 단도(短刀)가 그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한 것이 아닌가?
그 반투명한 비수는 은은한 남광을 발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독한 극
독이 묻혀져 있는 듯했다.
물론 무형독강을 연마한 이검한에게는 그 칼에 발려진 극독은 아무런
해가 되지 못했다.
단지 늑골 사이를 뚫고 들어온 단도가 그의 폐의 일부를 벤 것이 큰
타격이 되었을 뿐이었다.
쿵!
직후 이검한은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이다 끝내 한쪽 무릎을 끓고 말
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안고 있던 군여옥을 놓치지 않았다.
그 급작스러운 사태에 경악한 것은 이검한 뿐만이 아니었다.
이검한의 진로를 지켜보고 있던 폭풍군도의 고수들도 아연함을 금치
못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듯 경악과 의
혹의 눈빛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크크! 네놈은 살아서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경악으로 술렁거리는 중인들의 귓전으로 한 소리 음산한 일갈이 들려
왔다.
스슥!
이어 회룡탄 아래에서 하나의 인영이 훌쩍 날아올랐다.
일신에 타는 듯 붉은 혈의(血衣)를 걸친 중년인인 그자는 이검한이
회룡강 쪽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절벽 뒤에 은신하고 있다가 기
습한 것이었다.
"부도주!"
"혈해왕야! 무슨 짓이오?"
순간 폭풍군도의 진영에서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혈해왕야 군유강!
그렇다. 폭풍잠룡 군여옥의 숙부인 그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검한은 혈해왕야와 군여옥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한눈에 그자가 폭풍천왕 못지 않은 고수자임을 알아 보
았다.
하물며 그자신은 지금 혈해왕야 군유강이 어검술로 던진 독비(毒匕)
에 가슴이 꿰뚫리는 중상을 입지 않았는가?
"멈춰랏! 이 자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이검한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참담한 고통을 억누르며 버럭 고함을 내
질렀다. 이제 이검한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군여옥밖에 달리
없었다.
폭풍군도의 다른 제자들이라면 군여옥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코 경
거망동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검한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흐흐흐! 비참한 꼬락서니로구나. 고독전신! 그러고도 중원제일인(中
原第一人)이냐?"
이검한의 앞에 내려선 혈해왕야 군유강은 음산한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자의 비웃음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이검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
혔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군여옥의 희생을 헛되
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어쨌든 살아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군자(君子)의 복수는 삼 년도 늦지 않은 법! 언제고 본인이 오늘의
치욕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검한은 이를 부득 갈며 군유강을 주시했다.
"글쎄? 과연 내게 그런 날이 있을까?"
하지만 군유강은 허리춤에서 한 가지 기형무기를 꺼내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자가 꺼내는 무기는 얇고 탄력있는 강철판으로 만든 일종의 채찍이
었다. 길이는 다섯 자 가량인 그것은 아주 유연하고 탄력이 있어 마
치 독사의 이빨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불그레한 핏빛으로 물든 강편(剛鞭)은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가슴이
절로 섬뜩해졌다.
이검한은 핏빛 강편을 쥔 군유강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냉갈했다.
"그대들 맹주의 목숨은 돌보지 않을 참이냐?"
하지만 군유강은 음소를 흘리며 냉랭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 어린 것은 이미 본맹의 맹주라고 할 수 없다!"
"뭐라고?"
"무슨 망발이시오? 부도주!"
이검한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군유강의 뒤에서 벼락같은 노갈이
터져 나왔다.
백살마고와 흑수교룡이 분노를 금치 못하며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군유강은 그들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형형한 눈빛으로 장내
를 쓸어 보며 일갈했다.
"여러분들은 잊으셨소? 그 옛날 폭풍천신(暴風天神) 조사께서 남기신
본 군도의 제일율법이 무엇인지를?"
그자의 일갈에 갑자기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동시에 풍마쌍려의 얼굴에는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군유강은 중인들의 그런 반응에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바로 강자존(强者存)!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가장
존귀해질 수 있다는 율법이었소!"
그자의 위압적인 웅변은 장내를 휩쓸었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본인의 조카이며 현맹주인 군옥(君玉)은 적에
게 사로 잡히는 몸이 되었소!"
중인들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조금씩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군유강은 그런 그들의 동요를 더욱 부추기기 위해 열띤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이것은 본맹의 수치이며 또한 폭풍제일율법(暴風第一律法)의 모독이
오!"
그자는 장내를 둘러보며 거침없이 선언했다.
"해서 본좌는 감히 선언하는 바, 군옥은 더 이상 본맹의 맹주도 아니
며 치욕스러운 목숨을 부지할 이유가 없소!"
그 같은 자의 선언에 장내는 일거에 들끓는 남비처럼 시끄러워졌다.
군옥에 대한 동정과 손상된 폭풍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반론이 군중들
사이를 힙쓴 것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검한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안좋다!'
그는 눈 앞에 선 혈해왕야 군유강이란 자가 지극히 위험한 야심가임
을 깨달은 것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친조카라도 서슴없이
살해할 수 있는…
그리고 과연 그런 그의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군유강은 야심만만한 두 눈에 무서운 섬광을 폭사하며 이검한을 노려
보았다.
"폭풍일맥의 존엄을 손상시켰으니 네놈은 죽어야만 한다!"
쩌러러렁!
살기등등한 외침과 함께 그자의 수중에 들린 착혈강마편이 사나운 금
속성을 일으켰다.
그러자 사위는 일순, 온통 시뻘건 편영(鞭影)에 휩싸였다. 마치 독사
의 이빨같이 날카로운 강편의 날이 수십 군데에서 이검한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이검한은 흠칫했다. 그로서도 그 중 어떤 것이 진짜 착혈강마편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슥!
하지만 그의 장검은 본능적으로 허공의 일점을 베어갔다.
퍼억!
다음순간 둔탁한 소성이 일며 수천 수백 개의 편영들이 일시에 사라
져 버렸다.
중인들은 경악의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검한은 군여옥을 안은 채 쓰러질 듯 신형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의 왼쪽 가슴에는 착혈강마편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그런 이검한의 앞에 있는 군유강도 고통에 이지러진 얼굴로 서 있었
다. 그자는 옆구리가 갈라진 채 피를 꾸역꾸역 쏟고 있었다.
이검한이 본능적으로 후려진 일검이 그자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었다.
"빌어… 먹을……!"
이검한은 입술을 씰룩이며 신형을 휘청거렸다.
따당!
그의 손에서 장검이 요란한 금속성을 내며 떨어졌다.
동시에 이검한의 몸은 고목처럼 뒤로 벌렁 넘어갔다.
한데 이검한의 바로 뒤는 까마득한 회룡탄의 절벽이 아닌가?
"안돼!"
"아가씨!"
흑수교룡과 백살마고가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며 회룡탄을 덮쳐왔다.
하지만 그들 두 노부부가 단애 끝으로 달려 왔을 때, 이미 이검한과
군여옥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콰르르…
다만 거친 회룡탄의 격랑만이 단애 아래로 허옇게 부서지고 있을 뿐,
"아가씨……!"
백살마고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회룡탄을 뒤흔들었다.
과연 이검한과 군여옥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과연……?
* * *
운중마부(雲中魔府)!
운중산(雲中山) 깊은 곳에 자리한 지옥마교의 총단,
안개 자욱한 밤이 지나고 뿌연 햇빛 속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운중마부의 깊은곳에는 탁자를 마주한 채 오인(五人)의 인물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심각하고 침중해 보였다. 밤새 격렬한 논쟁
을 벌인 듯 오 인 모두 피로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마교소종사 운중악을 비롯하여 천수마야 백리공, 그리고 심마(心魔),
비마(飛魔), 번뇌마(煩腦魔) 등의 마교삼태상(魔敎三太相)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여간 노신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고독전신 이공자가 그처럼
파렴치한 짓을 했다니……!"
오 인 중 유일한 여자인 번뇌마가 탄식하며 말했다. 비록 늙었으나
지혜로운 그녀의 눈가에는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운중악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번뇌태상께서는 제자와 백리소저가 거짓 증언을 하여 이검한을
모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네!"
번뇌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깊이 생각하여 얻은
자신의 추론을 중인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볼 수가 있지 않겠어요? 누군가 본교와 이공자
를 이간질하려 이공자로 역용한 자를 시켜 그같은 만행을 저지르게
하는 방법 말이에요!"
순간 그녀의 말에 중인들의 눈가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번뇌마는 과연 지옥마교의 꾀주머니답게 다른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경우까지 추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추론은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네!"
마교삼태상의 첫째인 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은 우리 지옥마교와 이검한의 추종 세력이 사실상 양분된
상태일세. 만일 우리와 이검한 진영이 불화를 일으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삼매?"
그는 번뇌마를 주시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번뇌마는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대략 삼 개의 세력이 이득을 보겠지요!"
"삼 개의 세력이나 된단 말인가?"
듣고 있던 비마(飛魔)가 미간을 모으며 끼어들었다.
번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현재 무림에는 본교와 이공자 진영 외에도 능히 대륙을 제패할 수
있는 세력이 세 개 정도 존재한다고 봐요!"
그녀의 말에 중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심마는 침중한 안색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
하고 물었다.
"그 중 첫째는 물론 복건성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폭풍군도(暴風群島
)일 것이고 그럼 다른 두 개 세력은 어디어디인가?"
"자부(紫府)와 혈맹(血盟)이에요!"
번뇌마는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극히 침중하고 신중한
어조였다.
"자부(紫府)와 혈맹(血盟)!"
중인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자부(紫府)!
그에 대해서는 중인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도(魔道)에 지옥마교(地獄魔敎)가 있듯이 백도(白道)에는 자부(紫
府)라는 신비문파가 있었다.
세외(世外)에서 노닐며 신선지도(神仙之道)의 수련에 전념하고 있다
는 신비문파 자부문(紫府門)의 실정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지 자부문의 문주가 천지육강(天地六强)의 일 인인 자부노조(紫府
老祖)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놀라운 것은 그자부노조가 자부일파(紫府一派)의 최강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부의 인간들은 세상의 명리를 초월한 고인들이었다.
누구도 번거로운 자부문주의 자리를 원치 않았다.
결국 자부문주란 원해서 얻는 자리가 아니라 남이 떠맡겨 어쩔 수 없
이 앉는 자리인 것이다.
그 때문에 자연히 자부문주의 자리는 자부일파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없는 인간에게 배당 되곤 했다.
또한 자부노조라는 별호도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상징적으로 자부문주를 일컬어 자부노조라 부를 뿐이었다.
그같은 이유로 자부노조는 자부문의 최강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항렬 중에서도 가장 약한 자일 수도 있었다.
가히 하늘 밖의 하늘[天外天]과도 같은 신비문파가 바로 자부일맥(紫
府一脈)이었다.
그자부일맥이라면 능히 지옥마교에 맞서 천하패권을 다툴 수도 있었
다.
자부(紫府)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중인들의 안색이 일변한 것에는
그 같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혈맹(血盟)!
그것이 최근 지옥마교의 감시망에 탐지된 세력이었다.
바로 몇 달 전 이검한과 지옥마교의 연합군에 궤멸된 혈황부(血皇府)
의 잔당들이다.
혈황(血皇) 영호진은 사십 년의 세월 동안 천하에 자신의 뿌리를 심
어 왔다. 그 결과 혈황 자신은 죽었으나 그의 뿌리들은 건재한 채 암
암리에 세력의 확산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혈맹(血盟)의 지존은 뜻밖에도 여자였다.
-혈영여제(血影女帝)!
그녀는 그 같은 별호로 불렸다.
하지만 그 외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그녀가 혈황이 남긴 지옥혈경(地獄血經)을 연마하여 이미 혈황
영호성에 못지 않은 강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이 일은 신중히 다루어져야만 해요!"
번뇌마는 좌중을 둘러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일 이것이 그들 삼파 중 누군가의 모략이라면 우리가 이검한을 적
으로 돌리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심마와 비마는 수긍이 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운중악의 눈꼬리는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그는 낭패함을 느꼈다.
그는 약혼녀 백리예향을 믿었다. 따라서 이검한이 자신을 범하려 했
다는 백리예향의 말도 물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선뜻 이검한에 대한 어떤 조처를 취할 수는 없었
다.
자신들 지옥마교와 함께 무림을 이끄는 양축이 되는 이검한을 적으로
돌릴 것인가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의 여부는 무척 중
대한 일이었다.
그래서 운중악은 그 중대사의 결정을 논하기 위해 마교삼태상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번뇌마의 예리한 분석에 의해 결국 이검한을 적으로 돌리자는
것을 유보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지 않은가?
낭패한 표정이 된 것은 천수마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옥마교의 세력을 동원하여 이검한을 응징하는 것이 천수마야의 지
상 목표였다.
한데 그 목표가 지금 허무하게 와해되려는 순간에 와 있지 않은가?
천수마야는 낭패함을 금치 못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때 누군가 이가놈의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증언해 줄 수만 있
다면 형세가 역전될 텐데……!'
그는 안타까움으로 발을 구르며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한데 그런 그의 염원이 통한 것일까?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워낙 화급한 일인지라……!"
침중한 음성과 함께 문득 한 명의 장한이 실내로 들어섰다.
-청룡신마(靑龍神魔)!
그 인물은 마교 수호사신장(水護四神將)의 일인이었다. 동시에 지옥
마교의 총관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슨 일입니까? 총관?"
운중악은 청룡신마의 갑작스런 등장에 검미를 찌푸리며 문쪽을 돌아
보았다.
청룡신마는 운중악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소종사를 긴히 뵙고자 찾아온 여인들이 있습니다. 급히 만나 보셔야
하겠습니다!"
"그런데요?"
운중악은 청룡신마의 대답을 재촉했다.
중인들 역시 의아한 빛으로 시선을 청룡신마에게 모았다.
청룡신마는 말을 계속했다.
"두 여자는 자신들을 능욕한 음적을 본교가 대신 제거해 달라고 합니
다. 그녀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음적이 고부간인 그녀들을 함께 능요
했고… 그때 충격으로 시어미되는 여자 쪽은 실성했다고 합니다."
"저런 쳐죽일 놈이 있나……!"
"그래, 그 음적의 이름이 무엇이랍디까?"
순간 중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 그것이……!"
청룡신마는 그 물음에 왠지 곤혹한 표정으로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천수마야가 침중한 어조로 재촉했다.
"그 천인공노할 음적이 누구요? 총관!"
그는 형형한 눈을 번득이며 청룡신마를 주시했다.
그의 뇌리로 순간적으로 어떤 예감이 번쩍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감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그 음적의 이름은… 이검한이랍니다!"
청룡신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 그럴 수가……!"
"아… 아니… 이공자가……!"
다음순간 좌중엔 온통 경악과 분노의 격랑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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