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0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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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에 입대를 했고, 그 후인 2012년 경에 전역하고 나서 대학교를 다시 복학하자니 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1학년을 끝내긴 했지만 남은 3년의 학업을 어찌해야 할지, 졸업을 하더라도 어떻게 돈을 벌고 먹고 살지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문유네 아버지는 붕어빵 장사로 어찌나 돈을 많이 버셨는지, 전역한 그 사이에 곱창집을 차리셔서 열심히 장사를 하셨다.
전역 후 식사 한 끼 대접 하신다고 하시기에 가서 양념 곱창을 먹었었는데, 꽤 자극적인 매운 맛에, 놀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와, 이건 진짜 홍보만 잘 하시면, 장사 잘 되겠는데요?
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냥 빈말이 아니라, 그 곱창집은 매우 큰 호재를 이루어냈다. 너무 바빠서 그런지 문유가 그 일을 전역 후에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고 손님이 점점 늘어나고, 가게도 점점 바빠졌다.
문유의 여자친구인 혜진이도 하던 일을 관두고 발 벗고 나서서 문유를 돕기 시작했고, 내가 사는 지역의 동네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곱창집의 상호명을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 친구의 학과는 경제학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뭐.. 장사를 하는 것도 경제나 시장성에 관련된 지식을 필요로 하니까 아무래도 잘 연관시켜서 잘 졸업한 듯 했다.
혜진이도 그 가게일을 도우며, 일이 제법 적성에 맞았는지 아니면 문유의 부모님들에게 점수를 따려고 일을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즐거운 모습으로 가게일을 도우며 문유의 가족 구성원으로 조금씩 녹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밀려 들어오는데, 대학교를 복학하여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체육관련 예체능의 특징으로 꼽는 얼차려 문화가 여전히 존재했고, 군대를 제대 했음에도 여전히 계급제 대신 남아있는 칼 같은 선후배 시스템과.. 다른 학과면 몰라도 예체능 체육관련 전공의 1학년을 겪어본 나에게는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졸업을 후를 생각해도 딱히 이 분야에서 하고싶은 것에 대한 갈피가 잡히지도 않았고, 내가 진로에 대하여 방황하던 어느날 우리 집에 아버지와 약주를 한 잔 하시던 아버지의 친구 되시는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노씨야, 니 전역하고 뭐 할 거 없제?"
- "예.. 그렇긴 한데요.."
"거, 경호학과 졸업해가 뭐 할라꼬? 니가 경호업체 차릴 돈이 있는 것도 아이고, 그렇다고 경비짓이나 해묵고 살래? 그 것도 아니믄, 니 아빠한테 말 잘 해놓을 테니까, 내 태국 마사지샵 매니저일 해볼래?"
- "매니저.....일요?"
그렇다, 그 아저씨는 동네에서 태국 마사지 샵과 스포츠 마사지 샵을 운영하시는 분인데 첫 비즈니스를 스포츠 마사지샵으로 시작하면서 태국 마사지 샵을 하나 더 내어 장사를 하시는 아저씨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장은 할 일도 없었고, 그 아저씨의 말을 듣고서 마음 속으로 생각을 먼저 하기 보다는, 몸으로 행동을 먼저 해보고 나중에 생각을 하자.
선 행동, 후 생각을 마음에 깊이 새기자는 의미에서 YES 맨이 되기위한 첫 걸음으로 아저씨가 제공해주신 기회에 감사하며 동의 했다.
일은 생각 했던 것 보다 널널했다. 몇 가지 읊어보자면 손님 응대, 전화와 웹사이트로 예약관리, 출근후와 퇴근전에 잔고 및 금액 확인, 마사지 오일 및 바디워시, 샴푸, 일회용 속옷 등등 모든 비품들의 재고 관리, 호랑이 연고 나 야몽 같은 태국 직수입 물품 판매가 주를 이루는 일이며.
부가적으로는 진상 손님들을 쫓아 보내거나, 안 나갈경우 경찰을 불러 문제 처리하기 등등이 있다.
진상 손님들이 꽤 많아서 스트레스도 꽤 받았었다.
그 외 사용 하고있는 괄샤 도구나 핫 스톤 제품에 하자가 생기면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영수증을 아저씨에게 청구하는 일과 일하시는 직원들 커미션을 계산하여 가까운 은행에 가서 그 아저씨 통장 들고가서 현금으로 그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 회계와 관련된 일도 했다.
전체적으로, 일은 처음이 어렵지 제법 쉬운 편이었다.
일하는 초반에만 어느정도 부족한 부분이나 실수에 대해서 터치를 했었고, 익숙해진 이후로는 거의 내가 사장이 일하는 모든 일을 도 맡아서 했다. 말 그대로인 마사지샵 "매니저" 였으니, 거의 월급 사장 느낌으로 가게를 운영했다.
더 나아가서 사장 아저씨에게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예를들어 “곧 수능 끝나는데 수험증 들고오면 할인 하주는 스페셜 메뉴 어떨까요?”, “곧 크리스마스인데 크리스마스 패키지 구성으로 프로모션 하는게 어떨까요?”, “신년 벌크 패키지로 10회 끊으면 2회 추가로 받을 수 있는 마사지 패키지 어떨까요?”등등 주요 휴일마다 손님을 끌어올 수 있는 마케팅을 모색하여 사장 아저씨에게 컨펌을 받으며 시행을 했고 제법 효과적으로 손님을 끌어올 수 있었다.
인터넷 글들을 보니 어떤 마사지샵들은 매번 관리가 끝날 때 마다, 매니저가 직접 청소도 하고 샤워실 정리도 하는 형태로 되어있던데, 다행이 내가 일하는 이 곳은 환갑 가까이 되시는 아주머니를 월급으로 고용하여 마사지 룸이 비어있을 때 마다 그 아주머니가 직접 가셔서 스팀 청소기로 오일이나 기름기 없게 깔끔하게 바닥 밀고 치워주셨고, 샤워실도 긴 물밀대로 물기를 배수구로 밀어내고, 떨어진 체모도 치우며 청소 하시며 일을 하셨었다.
좀 친해지고 나서 아주머님께 힘드시지 않으시냐고 여쭤봤더니,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월급은 크진 않아도, 모텔이나 다른 큰 회사, 큰 대학교 청소보다 몇 배는 더 쉽고, 다른 청소 아주머니들과 어디 청소를 덜했니, 어디 청소를 더 했니 하며 싸울 필요가 없다면서 여기서 소 일거리로 일하시는 것을 선호 하셨었다.
하는 말씀으로는 나이 들어서 아들 딸내미들에게 손 벌리기 부끄럽고 미안하다면서 이런 일 이라도 하는게 훨씬 낫다며 여기서 일 하는데 매우 행복하시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나도 일의 강도는 그리 높은 편이진 않았지만, 하루 10시간~12시간 정도 일을 했기에 따로 여가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문유가 버는 만큼 벌지는 못 하지만 문유보다 자유 시간이나 여가 시간이 조금은 있어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 생각하며 즐겁게 일을 했다.
첫 월급으로 아버지에게 용돈도 드리고 새로운 손가방도 사드렸다. 매우 좋아하시며 내가 시작한 경제 활동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며 그 아저씨 아래 일을 배우며 경제 활동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 아주 좋게 생각하신 듯 했다.
마사지 샵 직원들도 나와 그 아주머니 포함해서 총 8명이 있었다. 매니저인 나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그리고 경주에서 스파 테라피 관련 학과 졸업하신 한국인 누나 한 명, 앳 되어보이는 태국 여성 네 명 그리고 거의 스타워즈로 치면 제다이 마스터급으로 아우라가 우직해보이시는 태국 아주머니 한 명까지 해서 총 8명이 북적 북적 일을 했었다. 매니저 직급인 나와, 한국인 마사지하시는 누나, 청소하시는 아주머님 까지 우리 셋은 출퇴근으로 일을 했었다.
사장 아저씨나 내가 없을때는 태국인 마사지사들 중 1명씩 돌아가며 카운터에 앉아서 남은 12시간 에서 14시간 동안 서로 돌아가며 손님을 응대했고, 나머지 인원은 같은 건물 윗층의 큰 원룸같은 대기실에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자며 상주를 하는 방식으로 마사지 샵이 24시간 돌아갔다.
한국은 그 들에게는 해외이니까, 해외에서 숙박도 제공되고 식사도 제공되는 이 일이 매우 큰 메리트가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태국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이 여기서 일 하면 식비도 아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장님의 와이프분이 오셔서 반찬 냉장고에 두시고, 밥도 지어두시고 해서 시간 잠깐 날 때 교대로 밥을 퍼서 세팅된 반찬으로 끼니를 떼웠는데, 사장님의 와이프분이 요리실력이 진짜 대단하신건지 그 곳에 일 할때 먹었던 밥이 그 어디 에서 먹었던 외식보다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출근에 아침식사를 하고, 중간에 안 바쁠때 점심식사 퇴근 직전에 저녁식사 까지 끝내고 퇴근했었다.
내 모친께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모친이 해주신 밥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버지께서 해주신 밥을 먹기도 했는데 간단한 김치 볶음밥 정도.. 아버지도 중국집을 운영하시는지라, 가게를 가서 짜장면이나, 짬뽕으로 배를 채우거나 가게 들르지 않고 집에가면 라면을 끓여먹어야 했어서 그런지 여기서 제공해주시는 집밥같은 식사들은 더욱 더 꿀맛이었다.
관리실은 총 8개로 이루어져있는데, 마사지사가 총 6명인데 반해, 관리실이 8개가 있는게 조금 이상하긴 했었다. '직원이 더 많았었나..?' 마사지사가 6명인데 왜 관리실이 8개나 필요하지? 라는 생각을 초반에 했었는데,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된게 "6명"이 모두 일 하고 있을 때, 먼저 예약한 손님들이 오면 그 손님들을 먼저 방에 대기 시켜놓고 먼저 끝나는 관리사들이나 지정받은 관리사들을 대기시킨 방으로 바로 투입시키는 방법으로 그렇게 빈틈 없이 방을 돌렸다고 했다.
'그래서, 관리사를 6명으로 고정시켜서 돌리는구나..'
지금 기억하는 기억으로는 바쁜 날에는 직원들 월급 떼고 하루에 90만원에서 160만원 정도 (메뉴에 따라 다름) 순수 이익이 생겼고, 월세에 세금 다 빼면 월 천만원 후반대로 돈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월 천만원 이하로 들어오는 달은 조금 변칙적이지만 직원들이 아무 말 없이 관두거나 또는 옆에 새로운 마사지샵이 생기거나 하는 때이다.
그래도 좋았던게, 새로운 마사지샵이 생기면 그 나마 안 바빴으니까 너무 좋았는데 그게 짧으면 2주, 길면 한 달을 안 가더라.. 새로나오는 관리 샵들이 운영을 븅신같이 하는건지 아니면, 마사지사들이 실력이 별로인지 모르겠지만 최대 1달 내에 다시 손님이 몰리게 되었었다.
내가 일했던 태국 마사지샵은 음란행위나, 핸드잡 행위로 샵의 물을 흐리는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손장난으로 손님을 몰고 다니거나 손님을 뺏는 행위를 하는 직원들은 바로 퇴출시켰다.
마사지 실력이 나쁘지 않은 관리사 라서 경고만 하고, 계속 남겨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 보통 직원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지거나 관두고 다른 샵에서 일을 하는 경우 많았다. 그 쪽에 가서 또 손장난 치면서 돈을 작정하고 벌고 있겠지..
아무튼 이런 마사지샵의 기본적인 룰 때문에, 오로지 마사지 실력 만으로 건전하게 일을 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오래 남아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자국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고있다.
한국어 실력이 조금 있었던 태국 아가씨와 얘길 나눠봤었는데, 태국은 길게 음식점 경력직 "매니저" 라는 직급으로 하루 일을 하면 겨우 23,000원 정도의 돈을 버는데 여기서 마사지를 한 시간 하면 손님 한 명당 2~4만원은 가져갈 수 있어서 한국에 와서 일을 한다고 했었다.
하루 꼬박 일을 하고 23,000원이라니.. 태국이나 그 외 우리보다 낮은 개발 도상국에 있는 국가의 사람들이 왜, 대한민국에 와서 힘든일을 하며 돈을 벌까 생각했었는데 어느정도는 이해가 갔다.
일을 하다보니 바빠지다 안 바쁘지다가를 반복하였고, 시간은 그 만큼 빨리 갔다. 월급도 내가 그 때 당시 처음에는 월 250만원씩 주셨는데, 일이 점점 빨라지고 아저씨가 샵에 안 와도 될정도로 일을 배우면서 270만원을 쥐어주셨다. 쉬는 날은 매주 일요일을 쉬거나, 격주로 일요일, 월요일 이틀 쉬었다.
일요일이나 월요일이 비면 누가 가게를 보냐고? 그 날이 바로 사장 아저씨가 취미 삼아 사장이 되어 일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스포츠 마사지샵에 둔 매니저도 있어서 거기와 여기를 돌아가며 관리하는데 샵이 두개면.. 적어도 사장한테 순수하게 돌아가는 돈은 최소 천팔백에서 이천만원정도 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장사가 잘 되는 비결은.. 잘 모르겠는데, 아저씨의 마사지 실력도 충분히 좋았지만 마사지사 직원들을 가르치는 실력도 제법 좋았었고 인성 좋고 성실한 직원을 고르는 안목도 제법 뛰어나서, 보통 고용한 태국인 직원이나 외국인 직원은 굉장히 오래 근속하다가 가는 경우가 많았다.
4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사장 아저씨가 날 불러서 소주 한 잔을 서로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노씨야, 니도 이제 좀 여기 마사지 일 살짝 배워야 안되겠나?"
- "마사지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지금 일하는 마사지사 언니들 다 일 들어갈 때, 예약 없는 손님 들어오면 그 때 니가 받을 정도로만 배워야지."
- "음 생각좀 해볼게요. 배우면 좋을거 같긴 한데."
"저 언니야들 한테는 얘기하지마라, 저 언니야들은 마사지 가격에서 5대 5 떼주고, 저기 제일 나이 많은 태국 언니는 6대 4씩 떼주는데, 니가 이거 배워가 손님 받으면 8씩 가져가라. 대신에 관리사가 꽉 찼을때만 손님 받고."
- "예? 그러시면 아저씨는 남는게 어디있어요..?"
"마사지 샵 운영이라는게 실력도 중요한데, 그 순간에 손님을 받는것도 중요하고 그 다음 손님이 올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너 보고 마사지를 배우라고 하는기라, 넌 뭐... 일 잘하니까 마사지도 좀 치지 않겠나 싶다. 내가 사람은 잘 보잖아, 맞제?"
- "음... 뭔지 모르겠지만 복잡한 것은 알겠네요."
"나중에 니도 다 깨닫게 된다. 니도 나중에 떠날 거라는 것도 알고, 여기에서만 쿡 박히는 것도 정신건강에 안 좋다."
- "지금, 관둬도 되요?"
"아가리 닥치고, 월급도 지금보다 더 쳐가 300까지 올리 줄테니까, 니가 알아서 계산해가 플라스 알파로 커미션 가져가. 그 대신에 직원 언니야들 빠질 때 마다, 내가 몇일 몇시 누가 온다 카면서 니한테 문자 보내면 니가 사람 뽑고 면접도 보고 새로운 신입이들 올 때마다 니가 교육 시키면 된다."
- "예? 마사지 1도 모르는 제가요?"
"태국에서 마사지 몇 번 받아봤다며? 그래도 못하고 잘하고 하는 정도는 구분 할 줄 알거 아이가? 지금보다 일 쬐메 더 추가되는거니까 걱정은 말고 어떤 사람 받아야 하는지 팁은 알려줄테니까 쫄리지도 말고."
-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사내 새끼가 목소리가 그래 작아서 어디 쓰겠노?!"
- "예!!"
월급 300...지금 생각하면 말이 300만원이지, 2012년 당시의 월급 300은 내 나이대의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제법 큰 액수 였다.
그 당시 최저임금이 4580원 정도 했었는데, 이 당시 최저임금으로 일했던 것으로 계산을 했다면 대충 어림짐작으로 주휴수당 까지 매겼을 때 월 150~200만원 밖에 못 벌었을 텐데, 그 당시 300을 버는 방법은 내 나이대에서는 공장에서 몸을 혹사 시키며 밤낮 바뀌는 2교대로 일을 해야 하거나, 경력좀 있는 전문직이어야 가능했었다.
혹여나 나중에 갈 대학교 등록금 비용도 충당 가능할 것이고, 대학교를 졸업 할 진로가 아니더라도 내가 결정 할 다른 방향성을 생각 해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일의 강도도 몸쓰는 일들에 비교하면 그리 큰 편이 아니니 일 할때 스트레스도 적은 편이고 하니 마사지를 시작도 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마사지라는게 나에게 적성에 맞을 수 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지금 생각했을 때, 어떻게 보면 내가 그 아저씨 친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후한 협상을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곳에서 이런식으로 월급이 오르는 경우가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한 일이고, 그 때 당시 내 생각에 내가 그 나이대에 또래들에 비해 비현실 적인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긴 했었던 것 같다.
대학교 동기들과 가끔 만나서 술 한잔 할때면, 그 일들을 자기한테 주면 안되냐고 할 정도로 부러워 했었으니까.
어쨌든 이미 결정을 해서 아저씨는 나에게 마사지의 기본부터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사장 아저씨의 거처에 있는 프린터기로 뽑아온 인체 골격계와 근육계 해부도를 들고와서는 겉을 감싸고 있는 큰 근육과 작은 근육들, 뼈들을 외우도록 공부 시켰고, 그 공부가 끝나면 좀더 세세한 겉근육 속에 있는 조그만 잔근육들 까지 나에게 암기 시켰다.
암기를 하다보니, 이젠 해부도를 보지 않고도 근육계 까지는 아니지만, 골격계와 큰 근육들 까지는 세세하게 그릴 수 있었다. 이론이 어느정도 지식이 밑 바탕이 되었을때, 사장 아저씨는 나에게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샵에서 일 하고 있는 대부분의 마사지사들이 몸이 굳어있고 뻐근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날 그날 마다 가장 큰 통증을 호소하시는 마사지 사 직원을 불러서 나를 연습 시켰다.
첫 달은 하루에 직원들을 3명씩 돌려가며 한 명당, 1시간에서 2시간씩 마사지를 해주며 오일 없이 하는 전통 태국식 마사지를 익혔다.
몸을 들어올려 돌리면서 스트레칭 시키고 발로 꼭 꼭 다리를 눌러가며 하는 동작을 세세히 하나씩 익혔다.
마사지를 익히다보니 어느정도 익숙해지게 되었고, 사장 아저씨가 항상 "언니들" 이라고 부르는 여성 마사지사 직원들의 팁들을 귀로 듣고 터득하며 그 들의 테크닉들도 조금씩 흡수하며 마사지를 배웠다.
그렇게 관리사 애들, 누나, 아줌마, 청소부 아주머니와 사장님 와이프 까지 붙잡아가며 그 들의 몸을 만지며 마사지를 하다보니 평소에 잘 말도 안 걸던 사람들이 나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할 말, 못 할 말을 꺼내며 평소보다 더 서로에 대한 결속력이 생기고 더 친밀해지고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아무리 누군가의 마사지 기술이나 테크닉이 좋다고 하여도, 그 기술과 테크닉이 내 체격에 맞지 앉는 동작 이거나 불편한 동작이면 효과가 그 만큼 반감 된다는 사실을 둘째 달에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에 마사지 키워드에 관련된 영상들을 모두 보며 마사지 기술을 내 체격에 맞게 조금씩 변형시켜 나만의 테크닉으로 만들어갔다.
효과는 컸다. 어차피 '근육' 을 이완시키는게 목적이기 때문에 동작이 어떻든 간에 뼈를 건드리지 않고, 피부, 신경계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끔 잘 꼭 꼭 눌러 마사지 하면 손님들의 불만이나 컴플레인 걸리는 것 없이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첫 달은 연습에 포커스를 두고, 두달 차에는 손님을 받았다. 내 생에 내 지명으로 첫 단골손님이 생겼고, 사장 아저씨도 나에게 마사지를 받아보더니 실력이 있다면서 나머지 발 마사지와, 오일 마사지 그리고 바디스크럽 까지 교육 시켜주었다.
오일과 바디스크럽을 배울때는 태국식 전통 마사지와는 다르게 당연한 얘기지만, 탈의를 한 알몸 상태로 일회용 팬티나 작은 타월로 음부와 엉덩이 골만 가린 채로 한국인 누나, 태국 아가씨들과 아줌마들을 돌려가며 벗겨놓고 교육을 받았어야 했었다.
익숙하지 않은 느낌의 애인이 아닌 낯선 타인 여성의 벗은 알몸을 봤을 때 생기는 긴장감으로 인한 발기 현상 때문에 초반에 상당한 고생을 했었다. 사장은 오일 마사지와 바디스크럽을 가르칠 때 매번 내 바지에 텐트를 칠때마다, 사장 아저씨는,
"노씨 이 새키, 이래 뵈도 남자네~ 인! (직원이름) 노씨 점마 니 알몸보고 꼬추 커졌다! 봐라!" 라고 소리를 치며 개 쪽을 주는 바람에, 오일 마사지 연습을 할 때는 집중력이 떨어져 상당히 괴로웠다.
거기다 마사지를 받는 직원들은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얼굴을 들어 발기 된 내 아랫도리를 구경하며, 사장 아저씨의 장난에,
"오~ 매니저님 거긴 작을 줄 알았는데 진짜 남자야~" 라며 더 크게 반응을 하며 받아쳐주는 바람에 매번 오일마사지와 바디스크럽 연습을 할 때마다 내 멘탈은 가루가 되어 날아 갔다.
2주 동안은 바쁘지 않은 마사지사 직원들에게 예약이 없는 시간에 옷을 벗어 달라 부탁하여 관리실에 눕혀 오일 마사지 연습을 했고, 쉬는 날에도 연희가 날 보러 올라올 때 마다, 사장님에게 부탁하여 관리실을 빌려 그녀를 스크럽하고 오일 마사지를 해주곤 했다. 마사지는 배우는 첫 단계가 어렵지 기본 마사지를 배우고 나서 손 끝에 근육, 인대, 뼈가 쉽게 구분되기 시작하면 그 후에는 새로운 형식의 마사지를 배우는건 매우 쉬웠다.
적어도 어느 부위를 누르면 어디가 근육이고, 어디가 뼈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는 속도가 더 가속화 되었다.
이제 나도 매니저로서 마사지샵에서 제공하는 모든 마사지 메뉴들을 소화해낼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새로운 직원이 올 때 마다 교육이 가능해질 정도로 숙련이 되었고, 직원들끼리 기술교환도 하고 서로 마사지를 해주며 몸도 풀어주고 하는 친밀감있는 사이가 되었다.
마사지를 하려면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상체를 터치하며 영업을 할 수 있는 '피부관리사' 를 취득하라는 사장의 조언을 듣고, 이 분야에서 조금이라도 더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국가 자격증인 피부관리사를 국비지원을 받아 취득 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사장은 태국 마사지샵은 거의 신경 쓸 필요 없이 기존에 관리 하시던 스포츠 마사지샵 운영에 집중했고, 나를 보조 할 새로운 카운터 관리를 해줄 여자 매니저를 고용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월급 사장으로서 매장을 꾸렸다.
그 뒤, 사장은 스포츠 마사지샵, 태국 마사지샵에 이어, 스파겸 피부관리샵까지 하나 더 차리게 되었다. 돈을 참 잘 굴릴줄 아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피부관리샵에 가서 오픈빨로 몰려오는 손님들 때문에 찾아가서 자주 도와주곤 했다.
6개월이 지나서 마사지샵이 더 성황을 이루었는지 사장은 직원들 저렴한 헐랭이 마사지 직원복은 버리고 좀 더 가격있는 생활 쑤타이 복으로 바꿔주고, 인테리어도 좀 더 뜯어 고쳐서 훨씬 더 있어보이는 샵으로 탈 바꿈 하고 거기에 인테리어와 직원 유니폼에 맞춰 마사지 가격도 럭셔리한 분위기에 맞추어 인상시켰다.
인테리어를 중시하는 돈좀 있는 손님들과 분위기 좋은 마사지샵 방문을 좋아하는 커플들 손님들도 많이 늘어서, 매상도 훨씬 더 뛰게 되었다. 어느덧 8개월 정도 꾸준히 일 하게 되다보니, 내가 영상을 보며 연구한 마사지 테크닉을 좋아하는 단골도 여러명 생겼다.
맞은편 바 스타일의 주점을 운영하시는 정씨 누나, 노래방 도우미 일을 밤새 뛰고서 평일 매일 첫 시간에 나에게 마사지 받으러 오시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시는 이름 모를 주점 아가씨, 한 달에 네 번씩 목욕탕 갔다 가게에 방문하시는 중, 고등학생 아이가 셋이나 있으신 황씨 이모...등 등 정말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들이 우리 가게를 들렀다.
정말 내가 했던 모든 일과 비교한다면 마사지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손으로 잡은 근육을 서서히 이완시킴으로서 생기는 상대방의 만족감을 통한 희열과 뿌듯함과, 나를 찾는 단골이 많아질 수록 보이는 내 노력의 결과물들 까지.. 봉급도 기존의 기본급 300 + @로 벌 수 있어서 월 400에서 운이 좋으면 500넘게 돈을 비축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었다.
일도 충분히 익숙해지고 나니 손도 빨라지고, 마음이 여유로워 지면서 빈 시간을 이용해 영어실력을 높히는 데에 몰두했다. 지난번 에피소드인 2010년 5월의 에피소드에서 첫 해외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영어를 배워두면 나중에는 무조건 쓸모있을 것이라는 생각 했었다는 것이다.
서구권이나 영어권인 오세아니아 같은 날씨 좋고 공기 좋은 나라에 가서 생활하며 여행을 해보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했었고 해서 틈 날때마다 단어를 외우고 그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혼잣말로 중얼 중얼 거리며 반복적으로 공부했다.
혼자 독학만으로는 무리가 있어서 시원스쿨이라는 인터넷 강의를 끊어 샵 카운터에 빈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이어폰을 한 쪽 귀에 꽂아 강의를 듣고, 막히면 또 돌려듣고 반복해서 듣고를 반복하며 몇 개월씩을 공부 했었다.
가끔 서구권의 외국인 예약전화도 들어와서 영어로 예약전화도 받고 손님이 왔을 때 영어로 응대를 했는데, 그 때 영어로 그 들과 문제 없이 소통이 가능했을 때의 짜릿한 기분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가 없었다.
일이 순탄한 듯이 잘 흘러가는 듯 했지만, 대한민국을 살고있는 시민인 이상 단점은 있었다. 대한민국 법상 눈이 멀지 않은자가 시술하는 한글로 '안마'로 명칭하는 마사지 행위를 시각장애인이 아닌 자가 한다면 모두 '불법' 이라는 것이다.
근 1년 일을 하며 가게가 성황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단골손님들도 점 점 많아지고, 가게에 생기가 점점 생김으로서 느껴지는 희열감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경쟁 업체인지 아니면 배알 꼴리는 누군가가 신고했는지 몰라도, 오지도 않던 맹인 단체가 와서 가게 일을 훼방 놓기 시작했다.
경찰과 시청 직원이 함께 와서 일 하던 마사지사들 모두 한 번씩 벌금을 먹였고, 나는 '피부관리사' 라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 있어서 겨우 벌금은 면했지만 경고를 먹었다.
잘 나가던 내 애착과 고증이 생겨버린 이 태국 마사지샵도 3개월의 영업정지를 먹어 버렸다. 이게 말이 3개월이지 이 기간이면, 단골 손님의 절반 이상을 잃는 사실상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기간이었다.
나에게는 처음 있었던 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물밀듯이 들어와 뇌에 가열시키며 과부하를 주었다. 하지만 사장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늘상 있는 일이라며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며 되려 나를 위로 해주었다. 위로를 해 주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말이다. 사장 아저씨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침 사람도 부족하고 고용 할 마땅한 사람도 없었는데, 잘됐네!"
사장 아저씨는 직원들을 나누어 스포츠 마사지샵과 스파샵 으로 나누어 대거 이동시켜 투입시켰고,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는 사장이 3달치 월급에 가까운 휴가비를 주며 3개월만 쉬다가 오면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면서 두둑이 돈 봉투를 챙겨주셨다.
사실 난생 태어나서 이런 사장은 처음 봤다. 지금도 사장 아저씨 이후로 이렇게 좋은 사장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저 내 아버지의 친구라서 나에게만 잘 해주는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사장 아저씨는 이제 니가 하고싶은 것을 하라며 청춘이어야 할 청년을 너무 오래 잡아 두었다며 한달 월급 + 커미션에 해당하는 500만원이 든 봉투를 꼭 쥐어주셨고, 1년치 해당하는 퇴직금도 은행 계좌로 쏴 주셨다.
마음 같아선 더 일을 하고싶었지만, 나는 일을 하는 것 보다 여행과 경험에 더 목말라 있었다. 여기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연희와 교제하며 한 달에 데이트를 4회 하던 것을 1-2회로 줄여가며 일에 집중을 했었어서, 신경을 못쓴 연희에게 좀 더 신경을 썼다.
연희도 해야하는 일이 있어서, 자주는 못 만났고 평소 주에 1회 하던 만큼 데이트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연희를 보지 못하는 날은 영어 공부에 좀 더 집중했다. 지문을 읽으며 문제를 푸는 형태에 집중하기 보다 머릿속에 생각한 것을 빠르게 영어로 뱉어내는 연습을 했었다.
태국 마사지샵에서 일을 하면서 저축도 많이 해서, 생활이 여유로웠다. 샵에서 일을 하면서 놀지 못 했던 것과, 하지 못 했던 것을 하려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 우선적으로 원하는 목표를 얻기위해 포커스를 맞췄다.
살짝 껄끄럽지만, 어느정도 소통되는 영어 스피킹 실력과, 메뉴판 설명을 읽으면 어떤 방식의 조리방법으로 조리가 되는지, 어떤 음식 재료가 들어가는지 정도는 기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간단한 영어 리딩 실력 그리고 내가 상대방에게 길을 묻고나서 해주는 설명을 알아들을 정도의 리스닝, 내 이름과 출신 내가 병이 걸릴 경우 병적 증상을 적을 수 있을 정도의 라이팅 실력 정도 까지 얻기 위해 나름 고심하며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사장 아저씨가 스파샵이나 스포츠 마사지샵이 바쁠 때 마다 나를 불렀는데, 그럴 때 마다 손님 한 두명씩 쳐내고서 다시 돌아와서 공부를 지속하며 충분히 원하는 실력을 증진시켰다.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영어를 배우고 충분한 실력을 쌓다보니, 영어권 국가로 가서 긴 기간동안 내 심장을 뛰게하는 무언가를 하고싶었다. 그래서 영어권 국가를 여행하기 좋은 곳이 어디가 좋을지 이곳 저곳 검색을 해봤었다.
캐나다는 너무 춥고, 영국과 아일랜드는 섬나라에 비가 그렇게 많이 온다고 하고, 미국은 총기 소지가 가능한 국가이기 때문에 사실상 치안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반면 호주라는 나라는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은 꽤 괜찮은 기후의 영어권 나라였다.
그 옆나라인 뉴질랜드도 살짝 비슷했지만 우리 나라 옆 일본처럼 호주 옆에 위치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지진과 자연재해가 많이 난다고 하더라. 막상 나라를 마음속으로 결정하니, 갑자기 연희가 생각이 났다. 연희를 두고 가기엔 마음에 많이 걸렸다.
그녀는 2년 넘게 내가 군복무를 마칠 때 까지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려주었고 (혜진 & 문유가 말해준 오피셜) 겨우 군복무를 끝내고 만나서 1년 조금 넘게 연애를 지속했지만, 나란 놈은 연희 생각은 안중에 없고 또 다시 장기간의 이별을 만들어내려고 하는지.. 나도 내가 매우 이기적인 남자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년의 복무 시간동안 커리어 하나 없는 나를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고, 가장 하고 싶은게 생겼는데 그게 바로 호주로의 유학이었다. 연희가 말린다면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줄 생각으로 그녀와 만나는 날 저녁을 먹고 지금은 길거리에서 보기 힘든 엔젤리너스 커피에 들러 커피를 마시거 있는 기분 좋아보이는 연희의 표정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연희야 내가 할말이 있는데."
"무슨얘기? 해봐~"
- "나 호주를 좀 갔다와야 할 것 같아. 약간 길게.."
"....."
연희는 말을 하지 않았다. 힘이 빠진 듯 허공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에 숨막힐 정도로 답답한 적막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몇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연희가 말을 하지 않기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같이 가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이건 너한테 있어서 이기적인 생각이겠지.. 하지만 같이 가준다고 말해준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
또 다시 나와 연희 사이에 적막한 침묵이 흘렀다 말을 꺼내지 않는 그 긴 시간 동안 카페의 배경음악이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라도 켜진 것 처럼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 갔다와.. 얼마나 있다가 올건데?"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연희는 무표정하게 있다가 참지 못해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카페에서 '엉엉' 소리를 내다 못해 거의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 할 정도로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로 내 앞에 앉아 울었다. 카페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모두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울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다녀와..."
내 성격을 잘 아는 연희는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녀오라는 빈말을 하고서 아무말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포옹을 해주었고 또 다시 펑펑 우는 소리가 카페에 울려퍼졌다.
그 날은 매우 미안한 기분이 무겁게 마음을 떠나지 않은채 계속 머리와 마음에 머물렀다.
그 후 영어로 무슨 공부를 할까 고민했었는데 눈에 확 띄는 관련 코스가 있었다. 디플로마 학위의 리메디얼 마사지 테라피.. 디플로마면 국내에서는 전문대 학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더군다나 졸업을 하고나면, 개인으로 공공과 민간 의료보험과 협업 가능한 대처의료 마사지 라이센스를 배급해주는데 이걸로 의료관련 손님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한국의 경우 현재 기준으로는 물리치료쪽을 나와야만 사람 몸을 터치할 수 있고, 거기다가 특정 병원이나 한의원의 원장 밑에서만 일할 수 있는 체계로 되어있다.
개인적으로 '안마'라는 단어로 비롯되는 회복 및 치유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맹인' 이라고 등록된 장애인만이 이 대한민국 땅에서 마사지가 가능한 것이다. 눈 뜬 사람이 마사지, 안마를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물론 도수치료나 추나요법이라는 이름으로 마사지 행위와 병행을 하긴 하지만 이 또한 물리치료사 코스를 배운 사람이 개인 영업을 하는 것이 불법이다. 그 말인 즉슨 무조건 의사, 한의사 밑에서만 일 할 수 있다.
반면에 호주에서는 이 모든게 눈뜬 사람들에게 허락이 되어있고, 그냥 집에 있는 방 한칸을 관리실로 사용하여 개인 영업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다.
바로 캠브리지에서 시행하는 아이엘츠 (IELTS) 아카데믹을 공부하여 서울로 올라가 시험을 보았고 평균 6.0의 점수를 취득하여 (만점은 9.0) 학교를 빠르게 학생비자 신청과 함께 등록했고, 3개월 뒤 입학을 해야 했기에 2개월 뒤에 뜨는 비행기 티켓을 과감하게 끊었다.
연희는 이후 나와 만날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 너무 미안했지만 미리 호주에 가서 니가 와서 곁에 있을 자리 알아보겠다며 계속 위로했지만 내 위로가 잘 안 먹히는 듯, 계속해서 울었다.
나는 연희가 자취하는 방에 살고있는 룸메이트인 혜진이에게 부탁을 하여 깨끗한 호텔급 모텔의 달방을 얻어다가 그리로 보냈다.
그 후 나는 연희와 2달을 같이 동거하며 감정적인 위로 보다 육체적인 위로를 통한 봉사로, 그녀의 보지에 입을 떨구지 않은 채 내내 목을 축이며 마시며, 내 앞니 1개 반 보다 더 길어지고 더 커져버린 그녀의 연분홍색 젖꼭지를 입에 가득 물어 혀를 굴렸다.
자지를 그녀의 보지에 깊숙히 꽂은채로 그녀의 머릿속에 슬픈 생각이 모두 사라져버릴 때 까지, 그녀의 감성과 감정이 새하얗게 비워져 메말라질 때 까지 미친듯이 섹스를 했다.
연희가 출근하기 전, 그녀가 퇴근 후, 그녀가 쉬는 날 밥먹는 시간과 데이트 하는 시간까지 아껴서 그녀에게 피임약을 먹여가며 생리를 늦춰가면서 까지 연신 방아질과 입질 손장난을 하며 그녀의 몸에 있는 수분을 뽑아내며 밤을 지새웠다.
그녀가 일하러 갔을때, 플랫메이트라는 호주 사이트에서 쉐어하는 방을 구했다. 남녀 혼성 타운하우스 느낌의 집이긴 했지만, 약간 도심과 떨어진 외곽지역 이긴 하지만, 리메디얼 코스를 운영하는 마사지 학교 앞에까지 내려주는 트램 노선 주변에 있는 집이었기에 마음에 들었고, 거기다 독방으로 혼자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메리트가 느껴졌다. 1주일에 그 당시 한국돈으로 17만원 정도 했었는데, 도심에서 사는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편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지역은 멜번으로 정했다. 너무 더운 사막지역은 내 성격에 맞지 않고 시드니는 한인이 너무 많아서 그 마저도 싫었고.. 브리즈번과 골드코스트도 마찬가지였고 애들레이드는 인프라가 너무 부족한 지역이었다. 그 나마 멜번이 인프라도 적합하고 다른 지역에 비교해 많이 덥지 않았어서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가 지역결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내가 출국하는 날에 연희는 연차를 쓰고 나를 마중나와 주었고, 그녀는 내 앞에서 평소보다 더 예쁜 모습으로 차려입은 채,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 가서, 절대 다른.. 여자 만나면 안돼... 그...."
목이 메었는지 말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는지 말 끝을 흐렸고, 나는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포옹을 하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내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나도 눈에 습기가 가득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천공항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고 출국장에 들어갔다. 연희를 두고 간다는 생각에, 면세 쇼핑을 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가 혼잡해지기 시작해서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을 했고, 10시간 30분의 장거리 비행에 몸을 실은채 내 여정을 시작했다.
결정은 나를 위해 하고 내 미래도 내가 책임져야 했기에 결정에 큰 후회는 없었다. 단지 마음이 많이 불편했고, 연희에게 큰 죄를 짓는 느낌이 컸다는 점...
그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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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날짜 | 제목 |
1 | 2023.09.07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8 完 (80) |
2 | 2023.09.07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7 (53) |
3 | 2023.09.07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6 (44) |
4 | 2023.09.07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5 (49) |
5 | 2023.09.07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4 (57) |
6 | 2023.09.07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3 (49) |
7 | 2023.09.06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2 (60) |
8 | 2023.09.06 |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1 (71) |
9 | 2023.09.05 | 현재글 세 번째 에피소드, 호주 유학 백인 썰 0 프롤로그 (42) |
Comments
처음부터 정주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