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천년 3-5
네코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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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09:13
第5章 침묵(沈黙)의 일족(一族)
폭풍잠룡은 오만하고도 당당한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숙부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내 관심은 고독전신이란 자가 제발 허
명(虛名)을 얻은 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런 그의 모습에 풍마쌍려는 서로를 주시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었다.
'휴……!'
'소주는 저 자신감 때문에 언제고 큰 곤욕을 치르게 되리라!'
그들은 못내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탄식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린 주인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폭풍잠룡 군옥의 생모는 군옥을 난산 끝에 낳고 죽었다.
하지만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폭풍천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때문에 군옥은 폭풍천왕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런 그가 유아독존의 성격으로 키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누구의 충고도 군옥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에게 영향을 줄 수 있
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의 부친 폭풍천왕이었다.
하지만 그 폭풍천왕마저 죽고 없는 지금 군옥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군옥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흥! 오늘밤이 가기 전에 고독전신이란 자의 상판을 볼 수 있겠군!"
그 말에 풍마쌍려는 동시에 흠칫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소주?"
"설마 이가놈이 소주를 시해하려 진중으로 잠입한단 말인가요?"
백살마고의 자애롭기만 하던 두 눈에서 무서운 한광이 번져나왔다.
지금까지 그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로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
상이었다. 그것은 병아리를 지키려는 어미 닭의 눈초리라 할 수 있었
다.
군옥은 싸늘하게 냉소하며 말했다.
"현재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자가 나를 암살하려 들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은은한 기대의 빛마저 감돌고 있었다.
"현재 벽력당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예요. 그들이 함락되는 것
은 시간문제일 뿐, 그렇다고 단시일 내 외부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
어요. 이런 때 고독전신이란 자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예요!"
그의 놀랍도록 영민한 두뇌는 이미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있는 듯했
다.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풍마쌍려는 안색이 급변했다.
"소주를 암살해서 본 군도의 진영을 와해시키려는……!"
그들은 사색이 되어 군옥을 주시했다.
그러나 군옥은 여전히 싸늘한 냉소를 머금은 채 오연하게 고개를 끄
덕여 보일 뿐이었다.
백살마고는 무서운 한망을 폭사하며 말했다.
"흥! 그놈이 행여 소주의 주위에 얼씬거리기만 하면 이 할미가 머리
를 터뜨려버릴 것입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으스스한 살기 어린 음성으로 다짐했다
.
군옥은 여전히 태연하고 오연한 표정이었다.
"그자가 나를 찾아오려면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어디가
서 목욕이나 해야겠어요!"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
"기다리십시오, 가주!"
흑수교룡은 질겁하며 황급히 폭풍잠룡의 뒤를 쫓으려 했다.
"멈춰요! 이 주책맞은 영감탱이야!"
하지만 백살마고가 급히 외치며 흑수교룡을 저지시켰다.
"소주께서 말씀하신 것 못 들었어요? 목욕을 하신다잖아요?"
그녀는 눈을 흘기며 싸늘하게 힐책했다.
"흠흠! 그러셨지!"
흑수교룡은 그녀의 말에 찔끔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헌데 왜 폭풍잠룡 군옥이 목욕하러 간다는 말에 남자인 흑수교룡이
쩔쩔매는 것일까?
"소주의 경호는 내가 맡을 테니 영감은 진중으로 돌아가 고독전신이
라는 놈을 맞을 준비나 해요!"
백살마고는 멋쩍은 듯 서 있는 흑수교룡을 향해 재차 차가운 음성으
로 소리쳤다.
이어 그녀는 군옥이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뚱뚱한 체격과는
달리 날렵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이었다.
"그것 참……!"
흑수교룡은 민망한 듯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폭풍군도의 진영이 있는 곳
으로 사라졌다.
한데 흑수교룡이 사라진 직후였다.
"흐흐흐! 이거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아닌가?"
문득 한줄기 음산한 웃음이 어둠 속을 울렸다.
스읏!
동시에 하나의 붉은 인영이 소리없이 장내에 나타났다.
일신에 타는 듯 붉은 적포를 걸친 중년인으로 제법 수려한 용모를 지
니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지나치게 희고 눈매가 가늘어 냉혹하고 음침한 인상을
물씬 풍기는 자였다.
어딘가 모르게 폭풍잠룡 군옥과 흡사한 듯한 용모를 지닌 그자는 한
손에 부채를 든 채 천천히 젓고 있었다.
"풍마쌍려 두 늙은이가 합공하면 설사 군유명이라도 무사하지 못한다
. 하지만 두 늙은이가 떨어져 있으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지!"
그자는 어둠 속에서 음험한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대체 그자는 누구길래 풍마쌍려에 대해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적포중년인은 문득 허공에 대고 말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 사랑(四郞)?"
"흐흐흐… 물론이오, 부도주!"
그러자 돌연 허공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워지는 밤하늘에 놀랍게도 한 명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전신을 새까만 천으로 휘감은 그자는 두 눈에 나무판을 잘라 만든 묘
한 안경을 쓰고 있었다. 또한 허리춤에는 길고 짧은 한쌍의 칼을 찌
르고 있었다.
일견하여 왜국(倭國)의 자객인 인자(忍者)의 모습이었다.
그자의 검은 무복 안쪽으로 쇠사슬로 짠 갑옷이 언뜻 드러나 보였다.
사내의 신형은 허공에서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설마 그자가 허공을 떠다닐 수 있는 부유술이라도 지녔단 말인가?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자의 발치로 아주 가는 철사(鐵絲)가 가로질러
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사내는 바로 그 거미줄 같은 철사를 밟고 허공에 떠 있는 것
이었다.
실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적포중년인은 다시 허공에 떠 있는 사내를 향해 음험한 음성으로 물
었다.
"어떤가? 할 수 있겠는가?"
"흐흐… 본좌의 실력을 못 믿어서 그러시오?"
왜국 인자 복장의 사내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그 말에 적포중년인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왜국 최고의 온미쯔[隱密宗]인 이가(伊架) 흑풍조(黑風祖)의 실력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흐흐… 과찬의 말씀이시오. 천초사랑(天草四郞) 일생일대의 영광으
로 알겠소!"
사내는 서툰 한어(漢語)로 말하며 음산하게 웃었다.
"귀도의 어린 주군의 목숨은 이 천초사랑(天草四郞)이 확실히 맡았소
. 대신 부도주께서도 약속을 지켜주시오!"
그자는 자만에 찬 오연한 어조로 말했다.
부도주!
그렇다면 바로 이 적포장한이 혈해왕야(血海王爺) 군유강이란 말인가
?
그렇다. 그자가 바로 폭풍군도의 야심가 군유강이었다.
왜국 인자 천초사랑의 말에 혈해왕야 군유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
다.
"물론이지. 여부가 있겠나?"
"부도주를 믿겠소. 신풍검조(神風劍祖)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오!
"
스읏!
말과 함께 천초사랑은 연기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로 스며드는 듯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
다.
스스스!
동시에 군유강 주위로 검은 인영들이 유령같이 스며나와 천초사랑이
사라진 곳으로 날아갔다.
하나같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자들인데 그자들은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혹독한 수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동영(東瀛) 은밀종(隱密宗)!
흔히 인자(忍者)라 불리는 왜국의 자객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척박한 왜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무리들
이었다. 정식 무공은 연마하지 않았지만 그 지닌바 살인수법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상상을 불허하는 인내심이 은밀종이 된 자의 기본 조건이었다.
그들이 인자(忍者)라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필요하다면 인분이 가득한 뒷간통에 잠겨 며칠이라도 견디어 내는 자
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지상 최강의 살육자들이 지금 이곳 벽력당 주위에 나타난 것이었다.
혈해왕야 군유강은 자신의 주위에서 마치 유령처럼 사라져 가는 인자
들의 무리를 주시하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서운 자들이로군! 나의 이목에도 걸려들지를 않다니!'
그자는 절로 섬뜩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절정에 이른 그의 내공으로도 주위에 이가조의 인자
들이 잠복해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자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군유강의 목은 동체에서 분리되
었으리라.
'흐흐… 네놈들은 사냥개다. 모름지기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솥에
삶아지는 신세가 되는 것이지!'
그러나 군유강은 이내 음산한 웃음을 머금었다.
'네놈들에게 떼어줄 남해의 패권이었다면 아예 네놈들을 불러들이지
도 않았을 것이다!'
그자는 내심 중얼거리며 두 눈에 강렬한 살광을 폭사했다.
'일이 끝나는 즉시 천초사랑은 물론 신풍검조(神風劍祖)란 늙은이도
나 군유강의 손에 제거될 것이다. 남해의 패권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부상 신풍검막(神風劍幕)은 제거해야 하니!'
그자는 히죽 웃으며 손에 든 부채를 흔들었다.
일대효웅 혈해왕야 군유강!
과연 그자의 교활한 머릿속에 든 계책은 무엇이란 말인가?
* * *
콰아아아!
어둠 속에 마치 흰 천을 걸어놓은 듯한 폭포가 기세좋게 쏟아지고 있
었다.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어둠 속으로 부서져 내리는 물줄기.
그것은 일대장관이었다.
폭포수 아래에는 하나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어둠 속에서 경쾌한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
폭포수로 이루어진 연못 속에 한 명의 인물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폭풍잠룡 군옥!
바로 그였다. 그는 지금 목까지 물 속에 담근 채 몸을 닦고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는 옷을 입은 채 몸을 닦고 있지 않은가?
물기 젖은 희고 맑은 피부의 얼굴. 옷 위로 몸을 문지르는 손이 백옥
같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휴우……!"
문득 폭풍잠룡 군옥은 길게 탄식성을 발했다.
그와 함께 그의 수려한 검미가 가볍게 모아졌다.
'나는 영원히 옷을 벗고 목욕을 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심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왜 옷을 벗지 못한단 말인가?
그의 신체에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군옥은 탄식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과연 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폭포가 내려다 보이는 하나의 바위 위에는 한 명의 여인이 말없이 폭
포쪽을 지켜보며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엾은 소주!'
그녀는 옷을 입은 채 목욕을 하고 있는 군옥을 내려다보며 침통한 표
정으로 탄식했다.
백살마고!
바로 풍마쌍려 중의 한 사람인 그녀였다.
그녀는 폭포 아래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어린 주인을 경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새끼 독수리가 노는 것을 지키는 어미 독
수리같아 보였다.
그녀의 눈은 군옥을 향하고 있으나 이목은 사방을 감지하고 있었다.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 외로움 속에 살
아가야 하시다니!'
백살마고는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군옥을 주시하며 한숨을 내쉬었
다.
번쩍!
돌연 그녀의 가는 눈가에 섬광이 번득였다. 그녀의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귓전으로 미약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웬 놈일까?'
백살마고는 긴장된 눈빛으로 소리없이 일어섰다. 오랜만에 목욕을 즐
기고 있는 소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아무런 경호성도 발하
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였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 하나의 인영이 소리없이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저놈이로군!'
백살마고는 두 눈을 번득 빛냈다.
'어떤 놈인지 모르나 오늘 이 할머니 손에 죽었다. 감히 아가씨가 목
욕하는 것을 훔쳐보다니!'
그녀는 살기를 흘리며 소리없이 그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인영은 마치 원숭이처럼 민첩한 행동으로 빠르
게 달아났다.
삽시에 백살마고는 그자를 쫓다가 폭포에서 사오 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게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
비로소 백살마고는 의혹을 느끼며 급히 멈추어 섰다. 그녀는 아무래
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다시 군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스스스!
그녀의 좌우 사방에서 유령같은 인영들이 속속 솟아 오르는 것이 아
닌가? 하나같이 검은 복면에 검은 야행복을 입은 자들,
"온미쯔[隱密宗]!"
어지간한 백살마고도 안색이 싹 변했다. 남해에서 살아온 그녀인지라
동영 인자들의 복장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이… 이런, 아가씨가 위험하다!'
백살마고의 후덕한 얼굴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녀도 왜국 인자들이
얼마나 지독한 독종들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은 물론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폭풍잠룡 군옥은 인자들의
살수법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살마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빨리 아가씨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녀로서는 지금 이 인자들을 누가 보냈는가 하는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오직 자기 젖을 먹여 키운 어린 주인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
었다.
"비켜라! 이놈들!"
백살마고는 버럭 외치며 양손으로 허리춤을 잡아뜯었다.
쩌어어엉!
그러자 새파란 섬광이 일며 한쌍의 종이같이 얇은 칼 두 자루가 그녀
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의 허리띠는 사실 칼집이었던 것이다.
종이같이 얇은 한쌍의 면도(綿刀)는 내공이 주입되자 웅혼한 진동과
함께 빳빳하게 일어섰다. 지금까지 그녀는 합마진살과 그 두 자루 면
도로 백전백승해 왔다.
하지만 상대는 정통 무사들이 아닌 자객들이었다. 그자들이 순순히
백살마고의 정면대결에 응할 리 만무했다.
스읏!
그때 백살마고를 포위한 십여 명의 인자들이 허공을 향해 손을 내쳤
다.
백살마고는 그자들이 암기를 던지는 줄 알고 경계했다.
하지만 그자들의 손에서는 아무것도 던져지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향해 헛손질만 하고 있지 않은가?
백살마고는 의아한 기색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이놈들이 무슨 미친 짓을 하는게지?'
그러나 더 이상 그자들의 미친짓을 봐줄 이유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네놈들이 안 오면 내가 가마!"
그녀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면도를 휘두르며 한쪽의 인자들을 덮쳐
가려 했다.
"악!"
하지만 막 몸을 앞으로 날리려던 그녀는 비명을 발하며 뒤로 휘청 밀
려났다.
카카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백살마고를 튕겨낸
것이었다.
"철사(鐵絲)!"
그녀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을 막은 것이 무엇인지 안 것이었다.
철사(鐵絲)!
그렇다! 너무 가늘어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철사가 사방에 거미줄처
럼 쳐져있는 것이 아닌가?
그 철사들은 어둠에 녹아들어 있어 백살마고같은 내가고수의 시력으
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흔탈명사(無痕奪命絲)!
이것이 그 철사의 이름이었다.
은밀종의 암살무기 중 하나인 그것은 머리카락처럼 가늘어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 반면 여러가지 합금이 섞여있어 아주 강인한 성질을 지닌 철사였
다.
보통 철사보다 열 배 강한 강도를 지녀 만일 보통사람이 모르고 맨몸
으로 무흔탈명사에 부딪혔다면 그 즉시 몸이 동강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백살마고는 합마진살공(蛤馬震煞功)이라는 특이한 외가기공을
연마하여 피부가 질기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몸이 동
강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위기를 모면한 것은 아니었다.
무흔탈명사는 허공에 온통 종횡으로 쳐져있어 그녀가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인자들이 허공을 향해 헛손질을 한 것은 바로 무흔탈명사를 서로 던
지고 받아 그물을 짠 것이었다.
"이 쥐새끼들이 감히……!"
백살마고는 사나운 노갈을 터뜨리며 한쌍의 면도를 휘둘러 주위의 무
흔탈명사를 끊어버리려 했다.
티이이잉!
하지만 요란한 진동만일 뿐 무흔탈명사는 끊기지 않았다. 인자들이
백살마고가 무흔탈명사를 내려치는 순간 교묘히 철사를 이완시켜 백
살마고의 힘을 분산시킨 탓이었다.
"악!"
직후 백살마고의 입에서 당혹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갑자기 무흔탈명
사가 접근하며 그녀의 몸을 휘감은 것이다.
"이… 이놈들아… 놓아랏!"
백살마고는 악을 쓰며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나 수십 줄기의 무흔탈명사는 풍성하게 살찐 백살마고의 몸을 칭
칭 동여맸다.
따다당!
그와 함께 그녀는 손목이 옥죄어지는 바람에 두 손에 들고있던 면도
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흐윽!"
그녀는 전신이 토막나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신음을 발했다.
투투툭!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백의가 삽시에 갈가리 찢겨내렸다. 그 바람
에 무흔탈명사에 꽁꽁 묶인 백살마고는 삽시에 나체가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은 흡사 피둥피둥 살이 찐 어미 돼지가 묶여있는 모습을 연상
케 했다.
"으으… 이… 이놈들아!"
백살마고는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 이를 악물었다. 비록 나이는 많으
나 자신의 허연 속살이 드러나자 고통보다 수치를 참을 수 없었던 것
이다.
"제거하라!"
백살마고가 분노와 수치심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냉정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그자는 왜어(倭語)로 말했으나 백살마고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다. 그녀는 여러차례 왜구들과 싸워 왜인들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
었기 때문이다.
피피핑!
그 냉혹한 일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을 받은 인자들이 멀찍이 선
채 표창과 수리검을 일제히 날렸다.
팅! 티팅!
하지만 날아든 표창들은 마치 고무벽을 친 듯 도로 튕겨져 나갔다.
무흔탈명사에도 베어지지 않는 백살마고의 합마공이 표창 따위에 상
처를 입을 리 만무했다.
그것을 본 인자들의 눈에 일순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예의 음성이 재차 냉혹한 명령을 내렸다.
"그 늙은 계집은 합마공을 연마하여 피부가 용피보다 단단하다.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오공(五孔)과 하문(下門) 뿐이다!"
순간 백살마고는 그 냉혹한 음성에 기겁했다. 자신의 유일한 약점 부
분이 간파 당했기 때문이었다.
"아… 안된다. 이놈들아!"
그녀는 수치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악을 썼다.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패애앵!
그녀의 양 발목에 휘감겨 있던 무흔탈명사가 갑자기 무서운 힘으로
당겨졌다.
백살마고는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무흔
탈명사에 얽매인 탓에 그녀는 내공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마침내 그녀의 두 다리가 서서히 좌우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허여멀
건 허벅지가 벌어지자 그녀의 부끄러운 곳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
냈다.
그녀는 하체가 드러나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나이는 많이 먹었다 해도 어쨌든 연약한 여자였다.
"이… 이 악귀들아! 차라리 내 머리통을 뽀개 죽여다오!"
백살마고는 절망과 수치감에 떨며 악을 썼다.
하지만 인자들은 무자비하게 계속 무흔탈명사를 잡아당겼다.
이내 백살마고는 두 다리를 무기력하게 활짝 벌린 자세가 되었다. 다
리가 벌어지며 드러난 그 일대의 숲은 검고 무성한데 그 때문에 투실
투실한 허벅지가 더욱 더 희게 대비되어 보인다.
"흐흐… 이런 방법으로 죽는 것을 행복으로 여겨라!"
다리를 벌리고 누운 백살마고를 향해 검은 복면을 쓴 한 명의 인자가
선뜻 다가섰다.
얼음장같이 냉혹한 눈빛을 지닌 그자의 손에는 한 자루 긴 창이 들려
있었다.
순간 백살마고는 공포에 질려 안색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녀는 그 창이 자신의 몸 가운데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사색이 되었
다.
아무리 당당한 여장부라 하나 어쩔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창날이 자신의 하문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음에랴!
"안… 돼!"
직후 백살마고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살갗에 닿는 것을 느끼며 단
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격렬한 통증,
후두두둑!
그와 함께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백살마고의 맨살 위로 확 뿌려졌다.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는 그것은 선혈이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투투툭!
피보라와 함께 백살마고의 몸 옆으로 나뒹구는 둥근 물체는 바로 검
은 복면에 싸인 인간의 머리통이 아닌가?
복면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눈은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머리통이 동
체에서 잘려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자는 미처 자신이 죽는다는 사
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죽는 순간에도 득의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리라.
백살마고는 하체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경악으로 눈을 부
릅떴다.
'이… 이것은!'
자신의 허연 피부 위로 흩뿌려진 것은 바로 그녀를 살해하려던 그 복
면 인자의 시뻘건 피였다.
목이 잘려진 그자의 동체는 여전히 창을 움켜쥔 채 서 있는데 잘린
목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치솟아 백살마고의 허연 알몸에 뿌려지고
있었다.
쿠웅!
다음 순간 서 있던 인자의 동체가 뒤로 벌렁 넘어갔다.
백살마고는 이 돌연한 변고에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읏!
그런 그녀의 시야로 인자들 중 세 명이 소리없이 날아올라 어둠 속을
덮쳐가는 것이 보였다. 실로 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이었다.
스팟!
동시에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유령같이 뛰쳐나왔다.
그 인영 역시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야행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한 손
에는 검게 옷칠을 한 장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스악!
나타난 인물은 세 명의 인자가 미처 지척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허공
을 향해 일검을 휘둘렀다.
인자들과 그 인물 사이의 거리는 이 장 정도였다. 도저히 칼날이 미
칠 거리가 아니었다.
퍼퍼퍽!
하지만 놀랍게도 둔탁한 음향과 함께 어둠 속으로 선명한 피가 확 번
져올랐다.
인자들의 신형이 허공에서 휘청하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휘청이던 인자들의 몸뚱이가 토막토막 난 채 바닥으로 나
뒹굴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인자들의 태도였다. 그자들은 죽어가면
서도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눈 앞에 벌어진 그 돌연한 일합의 승부를 본 백살마고는 경악과 충격
으로 눈을 한껏 부릅떴다.
'무형검강(無形劍 )!'
그녀는 불신의 눈빛으로 내심 부르짖었다.
소리도 형체도 없이 검기를 날려 원거리의 적을 살상하는 그 수법은
무릇 검(劍)을 쓰는 자들의 궁극목표였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른 자는 백 년 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백살마고는 그 무형검강의 초극검예를 지금 눈앞에서 본 것이
아닌가!
"죽여랏!"
그녀가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있을 때 인자들의 대열 속에서 재차 짧
고 단호한 명령이 내려졌다.
스파앗!
동시에 검은 그림자들이 마치 악령같이 나타난 인물을 향해 덮쳐갔다
. 이제 네 명의 인자만이 백살마고를 묶은 무흔탈명사를 쥐고 있을
뿐이었다.
삽시에 어둠 속에서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격전이 벌어졌다.
십여 명의 인자들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몸놀림으로 적을 공격했
다. 어둠과 동화된 채 들이닥치는 그자들의 살인 수법은 실로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절정고수라 해도 주위 경관에 녹아든 채 육박해 오는 인자들
의 그같은 공격에는 간담이 서늘하여 전신이 얼어붙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타난 신비인의 경신법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그 인물은 오
히려 인자들보다 두 배 빨리 움직이며 섬전같이 칼을 휘둘러댔다.
그의 칼에 옻칠이 되어 있어 전혀 검광이 흐르지 않았다. 해서 대체
그가 어떻게 칼을 휘두르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파공성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의 장검이 선풍을 일으킬 때마다 여지없이 한 명의 인
자가 몸뚱이가 갈라져 쓰러지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흩뿌려지는 선혈!
제멋대로 나뒹구는 잘려진 사지,
하지만 단 한 마디의 신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죽는 자도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죽이는 자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침묵 속의 살륙!
그 모습은 백살마고같은 노강호조차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삽시에 인자들 중 태반이 신비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반면 신비인도 몇 개의 수리검을 맞아 신형을 휘청이고 있었다. 그의
신법이 아무리 빨라도 인자들이 표창을 던지는 수법이 너무 빠르고
정확하여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 개의 수리검이 그 인물의 신위를 감퇴시키지는 못했다. 오
히려 상처를 입자 그는 더욱 사나운 기세로 인자들을 살륙하기 시작
하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넋이 나간 채 신비인의 신위를 지켜보던 백살마고는 퍼뜩 정
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제 그녀를 묶은 무흔탈명사를 쥐고 있는 것은 네 명의 인자뿐이었
다.
"이놈들!"
순간 백살마고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필생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찌이이잉!
그녀의 피부에서 무서운 합마진살의 반진력이 일어나며 무흔탈명사
네 가닥이 그대로 끊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네 명의 인자들은 흠칫했다.
그 순간 백살마고의 살찐 나신이 마치 공이 튀기듯 허공을 날았고 뒤
이어 뼈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터져나왔다.
백살마고의 허연 두 팔이 인자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대로 으깨버린
것이었다.
죽는 순간 인자의 비수가 백살마고의 가슴을 후벼팠으나 상처를 내기
는커녕 오히려 그자의 비수만 자끈동 부러졌을 뿐이었다.
그 즉시 다른 삼 인의 인자들이 백살마고를 덮쳐왔다.
하지만 무흔탈명사에서 풀려난 백살마고는 마치 우리에서 뛰쳐나온
암호랑이와도 같았다.
"죽어랏! 이놈들!"
분노서린 폭갈과 함께 휘두르는 그녀의 주먹은 나머지 삼 인의 머리
통을 여지없이 으깨어 버렸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부인?"
그때 삽시에 네 명의 인자들을 죽여 화를 푼 백살마고의 귓전으로 한
줄기 청량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백살마고는 움찔하며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한 명의 흑의청년이 우뚝 선 채 관심있는 눈빛으로 백
살마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신에 검은 단삼을 걸친 훤칠한 체격의 미청년.
이검한!
그는 바로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폭풍잠룡 군옥을 암살할 작정으로 단신으로 벽력당을 빠져
나왔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백살마고가 인자들의 창에 찔려 죽으려
는 것을 발견하고 구하게 된 것이었다.
백살마고는 이검한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소. 젊은이… 윽!"
손으로 알몸을 가리려는 백살마고는 신음과 함께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옇고 투실투실한 그녀의 허벅지 사이는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은밀한 그 부분은 날카로운 창날에 찔려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다만 분노가 치밀어 그같은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이검한은 흠칫 놀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낭패한 표정으로 급히 돌아서며 물었다.
백살마고가 부상을 입은 부분이 하체인 만큼 그가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노신은 괜찮네. 그보다 이 늙은이의 어린 주군을 도와주시게!"
백살마고는 급히 상처를 지혈하며 말했다.
"동행이 있으십니까?"
이검한의 물음에 백살마고는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그렇네. 이자들이 노신을 암습한 것으로 보아 노신의 주인께서도 지
금쯤 위기에 직면하셨을 것이네!"
이어 그녀는 폭풍잠룡 군옥이 목욕을 하고 있는 폭포의 위치를 이검
한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검한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소생이 귀주인을 도우러 갈테니 부인께서는 몸조리나
잘 하십시오!"
말과 함께 그는 백살마고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스슷!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유령같이 사라져갔다.
백살마고는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이로고!'
그녀는 감탄의 눈으로 이검한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그녀는 한눈
에 이 무신(武神)처럼 강인한 청년에게 반하고 말았다.
'저런 인재와 아기씨가 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내심 아쉬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깊은 탄식성을 발
했다.
헌데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검한과 폭풍잠룡 군옥이 짝이 되다
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백살마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 그가 자신의 주인을 암살하기 위해 유황곡을 나선 장본인이
라는 사실을.
물론 이검한 역시도 이 노부인이 자신이 노리는 표적의 유모라는 사
실을 알 리 만무했지만.
교묘한 운명의 장난일까?
그들은 서로 정체를 모른 채 그렇게 스쳐지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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