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천년 2-24
네코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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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4章 끝나지 않은 악몽(惡夢)
-곤륜(崑崙)!
중원은 어느덧 맹하(孟夏)의 계절로 접어들었건만 곤륜산의 정수리는
여전히 흰 눈에 덮여있다.
그 옛날, 사람들은 이곳 곤륜의 높은 곳에 신들이 사는 궁전이 있다
고 여겼다.
자미궁(紫微宮)이라 불리는 그 신의 궁전에는 황제(黃帝)가 뭇 신들
을 거느리고 살며 삼라만상을 관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곤륜산 어디에서도 자미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이 신들의 영토였던 곤륜산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독애(孤獨崖)!
짙푸른 창천(蒼天)을 찌르고 우뚝 선 까마득한 단애는 고독한 그림자
를 길게 드리운 채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휘잉!
어디선가 불어오는 황량한 바람 한 줄기에도 짙은 고독이 배어있는
듯했다.
그 고독애 위에 한 명의 청년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으음! 이곳에도 안 계시니… 도대체 어디로 가신 것일까?"
낮게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그 청년은 일신에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
는데 안색이 아주 파리했다. 무언가 큰일을 치르어 아주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비록 피로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청년의 몸에서 풍기는 늠연
한 풍모와 기도는 보는 이를 절로 위도한다.
그 뿐 아니라 빚은 듯 단아하고 수려한 용모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라는 말을 실감시켜준다.
이검한!
바로 그였다.
이검한 앞에는 낯익은 고독헌(孤獨軒)의 모습이 황량함 속에 우뚝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독헌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
치되어 있었다.
고독헌 뿐만이 아니었다. 고독애 후면에 자리한 상춘곡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모(電母) 냉약빙!
홀로 고독애를 지키고 있어야 할 그녀가 이미 오래 전에 곤륜을 떠났
다는 증거였다.
혈황 영호진을 기적적으로 쓰러뜨린 이검한은 어느 정도 무림의 혼란
이 수습되자 바로 이곳 곤륜으로 달려왔다.
그는 강호를 전전하며 수많은 여인들을 접해왔으나 한시도 전모 냉약
빙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검한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여인이다. 죽어가던 어린 이검
한을 구해 지금까지 길러준 것은 다름아닌 냉약빙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검한에게 바쳤다.
이검한은 그런 냉약빙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느껴왔다.
회귀본능이랄까?
그것은 마치 어머니를 그리는 아이의 본능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부푼 가슴을 안고 이곳 곤륜으로 달려온 이검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폐가 뿐이었다.
자신이 곤륜을 떠난 직후에 냉약빙 역시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이검
한이 알 리 만무했다.
전모 냉약빙의 부재를 확인한 이검한은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
이 뻥 뚫리는 듯한 허전함을 참을 수 없었다.
'어디에 계시든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이모님께는 갚아야 할
빚이 너무나 많으니……!'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결의를 다지고는 걸음을 옮겨 고독헌 앞의 정
원으로 다가갔다.
무성한 잡초가 제멋대로 자란 황폐한 정원 한구석에 하나의 돌비석이
서 있었다.
바로 고독마야 섭장천의 무덤이었다.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
이검한은 가슴 가득 치미는 감회에 젖으며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준비해온 향을 태워 분향하고 절을 올린 이검한은 등에 짊어지고 있
던 길쭉한 물건을 풀어냈다. 몇 겹의 천으로 감싸인 물건으로 다름아
닌 신도(神刀) 고독혼(孤獨魂)이었다.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하다는 대라철모(大羅鐵母)로 만들어진 고독혼은
그러나 엿가락이 녹듯이 녹아내린 처참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혈황
영호진의 지옥혈강(地獄血 )이 고독혼의 도신을 단번에 부식시켜 버
린 것이다.
지옥혈강의 마기는 그렇듯 끔직하고 전율스러웠다.
이검한은 그 지옥혈강과 맞서 싸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직
도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할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 고독혼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
하십시요!"
회한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이검한은 고독혼을 고독마야의 무덤
앞에 꽂아 주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실로 만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이제 편히 쉬셔도 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해친 원흉을 소자
의 손으로 처단했으니……!'
그의 눈가로 절로 뜨거운 눈물이 번졌다.
이검한은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한 채 오랜 시간을 고독마야 섭장천의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고독마야의 원수였고 자신의 가문을 피로 씻은 원흉이기도 한 혈황
영호진을 쓰러트린 지금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과 피로가 그를 지배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카아아아!
문득 허공에서 요란한 새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하며 허공을 올려다 보던 이검한의 얼굴이 밝게 펴지며 입에서는
절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너희들이었구나!"
화라락! 쏴아아!
크고 작은 한 쌍의 거붕이 질풍같은 기세로 고독헌 앞으로 쏘아져 내
려왔다.
활짝 편 날개의 길이가 십여 장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어미 독수리와
사오 장쯤 되어 보이는 새끼 독수리!
바로 철익신응(鐵翼神鷹) 모자였다.
끼룩! 까아악!
두 독수리 모자는 이검한의 옆으로 내려서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
다.
특히 새끼 독수리는 커다란 부리로 이검한의 뺨을 부비며 반가움에
연신 꿱꿱거렸다.
그놈에게 있어 이검한은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알에서 부화한 그놈이
어미 외에 처음으로 본 상대가 바로 이검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늠름하게 자랐구나, 아철(兒鐵)!"
이검한도 커다란 부리로 자신의 뺨을 부벼대는 새끼 신응의 머리를
다독이며 재회를 기뻐했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자신의 새끼와 이검한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
정으로 낮게 울음을 토했다.
'잘 되었다. 운남성까지 다녀오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아 걱정했는
데 이놈들의 신세를 지면 며칠만에 갈 수 있다!'
이검한은 이곳 곤륜에 들른 뒤 바로 운남 독성부를 찾아가볼 생각이
었다.
흑수선 서옥경은 이검한이 혈황 영호진을 공격했을 때 일천 명의 독
공 고수들을 이끌고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검한 주위에 빼어난 미녀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는
마음이 상해서 독성부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 때문에 이검한은 미처 그녀에게 한 가지 물건을 건네주지 못했다.
-만독신마편(萬毒神魔鞭)!
바로 그것이었다. 독성부 사상 최강의 독종이었던 만독모모의 비전신
병인……!
이검한은 마교지존으로 위장한 영호성을 죽이고 만독신마편을 손에
넣었었다.
만독신마편은 당연히 독천존 서래음의 후계자인 흑수선 서옥경의 것
이다.
하지만 이검한은 혈황 영호진과의 일전에 온 신경이 쏠려있어 만독신
마편을 미처 서옥경에게 건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혁련검호각(赫連劍豪閣)에도 한 번 들러야겠구나! 전해
줄 물건이 있으니……!'
이검한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혁련검호각!
그곳만 생각하면 이검한은 절로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자신에게 복마신검결을 깨우쳐준 유성신검황! 그러나 비록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고 하지만 이검한은 유성신검황을 자신의 손으로 죽
이지 않았던가?
사정이야 어쨌든 이검한과 유성신검황의 아내인 자애검모(慈愛劍母)
고숙향(高淑香)은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가 된 것이다.
현재 유성신검황의 유물인 철목신검(鐵木神劍)은 이검한이 지니고 있
다.
'고숙정(高淑晶)이라고 했지?'
이검한은 철사자검(鐵獅子劍)이란 특이한 별호를 지닌 여검수를 떠올
렸다. 마치 사내같은 체격의 여장부를…
'그녀가 나를 베겠다고 해도 도리가 없는 일이다. 하여간 철목신검은
유성신검황의 유일한 유물이니 돌려주기 위해 혁련검호각에 한차례
들러야할 것이다!'
이검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은 유성신검황의 아내인 자애검모 고
숙향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고숙향과 살을 섞지 않았던가?
"하하! 어차피 인생이란 것 자체가 고해(苦海)가 아니던가?"
이검한은 허공을 우러르며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허탈한 웃음소리는 창천의 푸르름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 * *
한 칸의 밀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널찍한 밀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
다.
석실의 사면 벽에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살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보기에도 전율스러운 인간의 껍질들이 사면의 벽을 가득 메우며 걸
려있는 것이다.
"기분이 어떠냐, 옥비룡?"
문득 지옥같은 살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옥쟁반에 옥구슬이 구르
는 듯한 맑은 여인의 음성이 밀실을 울렸다.
밀실 안에는 모두 이남일녀가 있었다.
밀실의 가운데에는 하나의 침상이 놓여있는데 그 침상 위에는 얼굴
전체를 온통 흰 천으로 칭칭 감은 한 명의 사내가 반듯이 누워있었다
.
얼굴을 붕대로 감은 그 사내 옆에 일남일녀가 서 있었다.
두 사람 중 여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시뻘건 핏빛 천으
로 휘감겨 있어 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오직 한 쌍의 눈뿐이
었다.
츠으으으!
기이하게도 복면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두 눈마저도 은은한 핏빛을
띠고 있었다. 섬뜩하고도 전율스러운 모습이었다.
-혈영공주(血影公主) 하후진진(夏侯眞眞)!
요사한 핏빛 속에 휘감긴 여인은 바로 혈영공주 하후진진이었다.
혈황 영호진의 양녀인 그녀는 낭야왕부가 괴멸당할 때 지옥혈경을 지
닌 채 탈출했었다.
이곳은 바로 혈황이 마련해 놓았던 비밀장원의 하나였다.
과연 하후진진은 이곳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하후진진의 옆에는 한 명의 불구노인이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
었다.
흉칙한 뻐드렁니에 교활한 염소수염, 얼굴에 크고 작은 혹이 주렁주
렁 달린 추괴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한 번 보면
사흘 전에 먹은 음식까지 올라올 정도로 노인의 추악한 용모는 필설
로 형용하기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그 노인은 꼽추등에다가 두 다리는 허벅지에서부터 싹둑 잘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잔독마(天殘毒魔) 갈양(葛陽)!
이 추괴한 노인은 바로 독천존(毒天尊) 서래음의 사제인 독성부의 배
신자 천잔독마였다.
그자는 반 년 전, 흑수선 서옥경을 해치려다가 이검한에게 두 다리를
잃었었다.
"헤헤! 수술은 완벽한 성공입니다요, 여제(女帝)님!"
천잔독마는 하후진진을 향해 간살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자는 일전에 이검한에게 두 다리를 잃고 독성부를 빠져나오자마자
기절했었다. 그런 그를 하후진진이 구해주었으며 혈황 영호진의 비밀
장원으로 옮겨 치료해준 것이다.
"어서 붕대를 풀어 주시오, 독노! 갑갑해서 미치겠소!"
침상 위에 누워있던 청년이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헤헤, 알겠소! 이제부터 풀어드리리다, 화공자!"
갈양은 듣기 거북한 탁음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자는 청년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흰 천을 풀기 시작했다.
-옥도공자(玉刀公子) 옥비룡!
청년은 바로 하토삼기(蝦土三奇) 중 무정모모(無情母母) 화소연을 시
해하기 위해 신강에 파견되었던 혈황의 수하 옥비룡이었다.
그자는 독성부에서 이검한의 파천황강살에 당해 얼굴이 무참하게 박
살났었다.
그런 그자의 얼굴을 갈양이 신묘한 의술로 성형해주었다. 그리고 지
금 수술의 결과를 확인하고자 옥비룡의 얼굴을 가렸던 흰 천을 풀려
는 것이었다.
갈양의 손에 의해 옥비룡의 얼굴을 가렸던 흰 천이 모두 풀어졌다.
그와 함께 드러난 얼굴을 본 갈양은 득의만면하여 하후진진을 돌아보
았다.
"흘흘! 제 솜씨가 어떻습니까? 여제님!"
하후진진은 핏빛 복면 속에서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눈 앞에 드러
난 옥비룡의 새로운 얼굴을 주시했다.
일순 숨막히는 긴장감이 석실 안을 가득 메웠다.
"호호호!"
돌연 그 긴장감을 깨뜨리며 하후진진이 고개를 발딱 젖히며 요악한
교소를 터뜨렸다.
희열과 분노가 뒤섞인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그녀는 요악한 핏빛 광채가 번득이는 눈으로 옥비룡의 얼굴을 노려보
며 이를 바득 갈았다.
"완벽하다. 호호, 이 정도라면 이가놈의 계집들이라 해도 깜박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득의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옥비룡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기에 이검한의 여인들도 속아 넘어간단
말인가?
하후진진의 만족스러운 태도에 옥비룡은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그… 그 정도입니까, 여제님?"
그자가 기대와 흥분에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하후진진은 요악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말과 함께 그녀는 옥비룡의 손에 하나의 동경을 쥐어주었다.
옥비룡은 떨리는 손으로 구리거울을 받아들어 조심스럽게 자신의 얼
굴 앞에 댔다.
구리거울 속에 수려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를 지닌 한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지 영준하기로 따지자면 상처를 입기 전의 옥비룡보다 뛰어나 보이
지는 않았으나 지혜로우면서도 호방한 풍모가 실린 그 얼굴은 출중하
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검한!"
옥비룡의 입에서 절로 신음과도 같은 나직한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이검한!
그렇다. 구리거울 속에 나타난 얼굴은 바로 이검한의 얼굴이었다. 천
잔독마 갈양은 놀랍게도 망가진 옥비룡의 얼굴을 이검한의 모습으로
교묘히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과연 하후진진은 무슨 의도로 옥비룡의 얼굴을 이검한의 그것과 똑같
이 성형했단 말인가?
"바득! 이제 그 이가놈에게 복수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하후진진은 원독에 사무친 음성으로 이를 갈았다.
"남은 기간 동안 너는 이가놈의 행동거지와 말투, 버릇 등을 완전히
익혀 그것을 완벽히 재현해내야만 한다. 알겠느냐?"
그녀는 싸늘한 핏빛 눈으로 이검한으로 탈바꿈한 옥비룡의 준미한 얼
굴을 주시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제님!"
옥비룡은 자신에 찬 어조로 힘주어 대답하며 포권했다.
"놈은 속하에게도 크나큰 빚이 있습니다. 이제 철저하게 복수를 해줄
때가 온 것입니다!"
그자는 사악한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러나 하후진진은 이미 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 명의 청년을 떠올리
고 있었다. 곱고 아름답던 자신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새겨
놓은 사내.
'이검한! 머지않아 네놈으로 하여금 하늘 아래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 저주스러운 사내놈!'
그녀의 눈빛은 섬뜩하도록 요사한 섬광을 토해냈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야릇한 그리움이 그녀의 눈빛 한 자락을 물들
였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에 입을 맞추게 해주겠다, 이검한!'
하후진진은 이를 갈며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과연 그녀의 작은 가슴 속에는 어떤 사악한 음모가 자라고 있는 것일
까?
* * *
그그긍!
육중한 굉음과 함께 둔중한 철문이 열리며 하나의 붉은 그림자가 안
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다름아닌 하후진진이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또 하나의 밀실이었다.
밀실 안은 황량함마저 감돌 만큼 썰렁한 분위기가 풍겼다.
텅 비다시피한 밀실 가운데 하나의 커다란 돌침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위에는 한 명의 거인이 반듯이 누워있었다.
이 거한이 쓰고 있는 복면의 이마에는 일(一)이란 숫자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바로 무적구마(無敵九魔) 중 무적제일마(無敵第一魔)였다.
무적제일마가 저 남해 폭풍군도의 제일패왕인 폭풍천왕(暴風天王)임
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폭풍천왕은 돌침상 위에 반듯이 누운 채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
나 그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백치처럼 촛점이 없는 눈빛이
었다.
침상 옆으로 다가선 하후진진은 요사한 눈을 빛내며 폭풍천왕의 건장
한 몸을 쓸어보았다.
'이 자의 내공은 십갑자(十甲子)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렇다. 폭풍천왕의 일신 내공은 놀랍게도 십갑자 이상의 수준이었다
. 그 정도의 내공을 지닌 사람은 이검한의 아내가 된 천년여제(千年
女帝) 흑요설(黑瑤雪) 외에는 달리 없었다.
가히 우내최강이라 할만한 내공의 소유자 폭풍천왕을 보며 하후진진
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자의 십갑자 내공을 갈취하면 반 년 내로 지옥혈강(地獄血 )을
십성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그녀는 요악한 눈빛을 빛내며 염두를 굴렸다. 하후진진은 폭풍천왕의
내공을 흡수하여 지옥혈강을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하려 하는 것이었
다.
사락!
하후진진은 자신의 옷고름을 풀어내렸다. 그러자 붉은 저고리가 갈라
지며 눈같이 흰 가슴 속살이 드러났다.
'다시는 사내와 이런 짓을 하지 않으려 했거늘!'
그녀의 얼굴을 가린 핏빛 면사가 파르르 떨렸다.
어린 나이에 철목풍(鐵木風)에게 처녀를 잃었던 하후진진이었다. 그
녀의 뇌리로 그날 밤의 끔찍한 기억이 선연히 떠올랐다.
아직 가슴의 융기조차 제대로 돋지 않은 그녀의 여린 육체는 짐승같
은 철목풍의 마수에 사정없이 유린되었다.
그같은 철목풍의 만행은 이 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혈황 영호진을 만나 그의 양녀가 되었다.
하후진진을 양녀로 삼은 영호진도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
소한 그자는 그녀의 육체에 음심을 품지 않았을 뿐더러 제대로 된 무
공을 성심 성의껏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녀를 이용할 목적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래도 철목풍과는 천양지
차인 영호진의 태도는 하후진진의 여린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
다.
어느덧 그녀는 영호진을 친아버지처럼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깐 뿐이었다. 영호진은 이검한이란 저주스런
사내의 손에 무참하게 격살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후진진이 피눈물로 이검한에게 복수를 다짐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
한 일이었다. 그녀가 철이 든 이래 최초로 정을 느꼈던 영호진을 이
검한이 죽인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다. 하루빨리 이가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이럴 수
밖에 없다!'
하후진진은 질끈 입술을 깨물며 치마끈도 풀었다.
사르르!
치마가 발치로 흘러내리며 탐스러운 하체가 드러났다.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둔부, 그리고 미끈한 허벅지는 마치 대리석으
로 빚어 놓은 듯하다.
희디흰 허벅지 사이의 도독하게 살이 오른 둔덕 일대에는 제법 소담
스러운 방초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기이하게도 그 숲은 피를 칠한 듯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지옥혈강을 연마했다는 증거였다.
눈같이 희디흰 속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그 핏빛의 방초 숲은 강
렬한 대조를 이룬다.
하후진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하체를 손으로 가렸다. 그러다가 이내
석실 안에 자신과 폭풍천왕 외에 아무도 없음을 상기하고는 가렸던
손을 떼었다.
이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폭풍천왕의 하의를 벗겨내렸다.
일순 그녀는 숨을 들이키며 눈을 부릅떴다. 건장한 폭풍천왕의 하체
가 적나라하게 그녀의 눈 앞에 드러난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사내의 실체로 대하자 수치심과 함께 야릇한 흥분이
하후진진을 전율케 했다.
'이번 한 번 뿐이다. 다시는 사내가 내 몸에 손도 못대게 하겠다!'
그녀는 내심 다짐하며 떨리는 손으로 폭풍천왕의 실체를 보듬었다.
폭풍천왕은 비록 이지를 상실하긴 했지만 생리작용은 보통사람과 하
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일부는 하후진진의 자극을 받자 이내 늠
름하게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다.
하후진진은 숨을 할딱이며 침상으로 올라가 폭풍천왕의 하체 위에 다
리를 벌리고 쪼그려 앉았다.
불에 달군 쇠몽둥이 같은 것이 허벅지에 닿음을 느끼며 하후진진은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섬섬옥수로 폭풍천왕의 실체를 곧추
세운 뒤 그 위로 자신의 둔부를 내리 눌렀다.
순간 하후진진의 교구가 활처럼 휘어졌다. 그 체격만큼이나 장대한
폭풍천왕의 실체는 이미 숱한 경험이 있는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흡… 흡정환희법(吸精歡喜法) 따위의 사술을 쓰는 것도 이번 한 번
뿐이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폭풍천왕의 실체를 뿌리까지 몸안에 받
아들였다.
"흐윽! 모… 모두 네놈 때문이다, 이검한! 내 몸을 스스로 더럽혀야
만 하는 것도……!"
하후진진은 저주의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폭풍천왕의 가슴
을 누르고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 수모는 네놈이 갚아야만 한다. 열배 백배로……!"
울음 섞인 하후진진의 신음소리는 혈황의 뒤를 이을 지옥여제(地獄女
帝)라는 전대미문의 무서운 마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 *
운남성이 독성부 일맥의 영토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 오백 년 간 운남성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바로 독성부였
다.
하지만 최근 견고하기만 하던 운남의 판도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가
기 시작했다.
그것은 몇달 전에 벌어졌던 참극 때문이었다.
즉, 독성부 휘하의 문파들인 운남십삼패(雲南十三覇) 중 일파인 벽안
독마가(碧眼毒魔家)의 소가주가 반역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벽안독효(碧眼毒梟) 염천월(廉天月)!
그자는 천잔독마 갈양과 결탁하여 독모 나운벽, 흑수선 서옥경 등을
해치려다가 고독전신 이검한이 적시에 개입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
았다.
그 과정에서 벽안독효 염천월은 무참하게 참살당했다.
실로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수운각(水雲閣)의 참극이라 불리는 그 사건의 내막은 자세히 밝혀지
지 않았다. 진상을 알고 있는 흑수선 서옥경과 독모 나운벽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로서는 자신들이 당한 치욕스러운 일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운남십삼패 중 몇몇 문파가 의혹
을 제기해왔다. 혹시 서옥경이 벽안독효를 죽이고 그를 대역죄인으로
몰아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같은 의혹을 부추긴 것은 다름아닌 염천월의 가문인 벽안독마가였
다. 그들은 공공연히 독성부 서씨 일문에 반발하여 다른 문파들을 교
란시켰다.
흑수선 서옥경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염천월에게 능욕당했다고 실토할 수도 없는 일
이었다.
그 일로 인해 고심하던 서옥경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벽안독마가 염
씨일문에 운남성을 떠나라는 축출령을 내렸다.
물론 염씨일족은 심하게 반발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독성부의
힘에 밀려 운남성에서 쫓겨나가고 말았다.
고향과 영토를 빼앗기고 떠나간 염씨일족은 이를 갈며 독성부에 복수
를 다짐했다.
이로써 외견상 운남성의 풍파는 잠재워지는 듯 보였다.
슥!
한줄기 인영이 유령같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마치 질풍같이 신쾌무비한 신법을 전개한 야행인은 한 채의 아늑한
암자(庵子) 앞에 내려섰다.
"……!"
암자 앞에 내려서며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는 인물은 한 명의 미소부
였는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피부는 먹물을 칠한 듯 새까맣다.
흑수선 서옥경!
바로 그녀였다.
독천존 서래음의 후계자인 그녀가 야심한 밤중에 무엇 때문에 단독으
로 야행을 한단 말인가?
<망아암(忘我庵).>
서옥경 앞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의 현판에는 그와 같은 글이 섬세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곤명호(昆明湖) 변에 위치한 이 암자 주위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처
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직 그리 늦은 밤이 아니라 불빛이 밝혀져 있어야할 암자는
기이하게도 칠흑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 내려선 서옥경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
했음을 깨달았다.
'역시 어머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구나!'
그녀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수중에는 한 장의 지편이
들려있었다.
-독모를 구하고 싶으면 단신으로 망아암까지 오너라! 만일 딴 수작을
부리거나 삼경까지 오지 않는다면 그 계집은 여러 사내들의 노리개
가 될 것이다!
날렵하고 빠르게 흘겨쓴 필체로 미루어보아 그 지편이 여인이 쓴 것
임을 알 수 있었다.
지편은 저녁 무렵 한 개의 옥비녀와 함께 서옥경에게 전달되었다. 그
옥비녀는 독모 나운벽이 생명처럼 아끼는 물건이었다. 혈황에게 죽
은 독천존 서래음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헌데 그 옥비녀가 누군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독모 나운
벽이 위경에 빠졌다는 증거로 보기에 충분했다.
해서 서옥경은 협박자의 요구대로 단신으로 이곳 망아암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넉 달 전의 그 비극적인 일이 있은 후 독모 나운벽은 독성부를 떠나
이곳 망아암에 칩거한 채 지내고 있었다.
이검한에게 몸을 허락한 주제에 남편의 체취가 서려있는 독성부에 머
물기가 괴로웠고 또 이검한과 서옥경의 사이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해
서 스스로 속세를 떠난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신변에 변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내가 왔다. 모습을 드러내라!"
흑수선 서옥경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잠긴 망아암을 향해 교갈을 내
질렀다.
"호호호! 정말 대단한 효심이구나, 서옥경!"
그녀의 외침이 터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여인
의 교소가 들려왔다.
파앗!
동시에 망아암의 본당 앞에 하나의 궁등이 켜졌다.
갑자기 밝혀진 궁등의 불빛 아래로 사십대 중반 가량 되어보이는 여
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의 나이에 비해 훨신 젊어보이고 여전히
아름다운 용모를 유지하고 있는 여인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아주 표독한 인상을 풍긴
다는 점이었다.
여인의 풍만한 몸에는 새하얀 소복이 걸쳐져 있는데 어둠 속에서 그
새하얀 소복은 왠지 섬뜩한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당, 당신은! 염부인!"
소복여인을 본 서옥경은 눈을 부릅뜨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소복여인은 바로 벽안독효 염천월의 생모이며 서옥경에 의해 운남성
에서 쫓겨난 벽안독마가의 안주인이었다.
비록 여자였으나 그녀는 무시할 수 없는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
의 손속은 맵고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날수낭랑(剌手娘娘)이란 별호로 불리운다.
그녀의 외아들인 벽안독효 염천월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지나칠 정도
로 맹목적이라는 것은 운남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
날수낭랑을 본 서옥경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저 독부가 어머님을 제압한 장본인이라면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겠
구나!'
끔찍하게 사랑하던 외아들을 잃은 날수낭랑인지라 독모 나운벽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호호호! 그렇다. 바로 나다. 독한 네년들에게 비참하게 죽은 천월의
에미다!"
날수낭랑은 광기 어린 눈을 번득이며 원한의 이를 갈았다.
서옥경은 날수낭랑을 마주 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염부인! 어머님을 어찌 했느냐?"
"호호! 보채지 마라! 지금부터 독모란 그 계집이 어떤 꼬락서니가 되
었는지 보여줄 참이었으니까!"
날수낭랑은 요사하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칠흑같이 어둡던 망아암의 본당에 일제히 불이 환하게 밝혀졌
다.
"어머님!"
서옥경의 입에서 다급하고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환하게 불이 켜진 본당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는데 불상이 내려다 보
이는 본당 바닥에는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 명의 여인이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이
다. 그리 미인은 아니지만 그윽하고 기품있는 분위기를 지닌 중년부
인인데 지금 그녀는 아주 민망한 자세로 묶여 있었다.
두 팔은 뒤로 묶여 있었으며 굵은 밧줄이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과 허
벅지를 얼기설기 묶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인의 허벅지는 본의 아니
게 활짝 벌려진 채 쳐들려 있었다.
중년미부는 수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바닥에 누운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독모(毒母) 나운벽!
그렇다. 전라의 중년미부는 바로 그녀였다.
독성부의 지존인 독천존 서래음의 다섯 번째 아내였던 그 고귀한 신
분의 여인이 몇달 전 수운각에서의 부끄러운 일에 이어 오늘 또 다시
치욕스러운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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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