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11
조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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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17:06
대학 4학년이 되자, 나는 진짜로 정신을 차렸다. 군대에서 방탕하게 보낸 시간들, 전역 후 동아리에서 느껴진 허무함… 그 모든 게 나를 깨우쳤다. 성격이 원래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쳐다도 안 보는 타입이라, 이번엔 공부에 완전히 미쳤다.
아침 7시에 도서관 문 열릴 때부터 밤 12시 문 닫힐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건축공학 과목은 물론, 구조역학, 내진설계, 콘크리트 공학… 족보 풀고, 교수님 연구실 출입하며 논문 읽고, 과제는 항상 A+ 맞을 때까지 고쳤다. 동아리엔 얼굴도 안 내밀고, 술자리도 끊고, 여자도 없었다. 오직 책상과 노트, 계산기만 내 옆에 있었다.
그 결과, 4학년 두 학기 평점이 3.87. 전체 학점도 3.6대로 끌어올려서 무사히 졸업했다. 졸업식 날, 부모님과 사진 찍을 때 처음으로 “잘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가슴이 뭉클했다.
졸업하고 바로 입사한 곳은 삼성동에 있는 한국0000연구원(당시 이름이 그랬다). 국책 연구기관이라 안정적이고, 건축 구조 전문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입사 소식 들었을 때 정말 설렜다. 군대 갔을 때 꿈꿨던 “제대로 된 건축인”이 되는 길이 열린 기분이었다.
입사한 해가 하필 1995년. 그해 6월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몇 달 전엔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전국이 충격에 빠졌고, 건축과 토목 분야에 대한 안전·품질 우려가 폭발했다. 정부는 바로 재난 관련 위원회들을 꾸렸고, 우리 연구원은 그 중심에 섰다.
나는 신입이었는데도 운이 좋게도 ‘재건축·내진 보강 위원회’ 실무팀에 바로 배치됐다. 선배들과 함께 삼풍 사고 현장 조사 나가고, 성수대교 잔해 분석하고, 전국 노후 건축물 실태 조사 자료 만들고… 밤낮없이 뛰었다. 회의 자료 준비하고, 구조 계산 다시 하고, 보고서 쓰고… 또다시 “하나에 미치는” 성격이 발휘됐다.
그때 또 한 번 전성기가 왔다. 신입 주제에 자료 정리도 제일 빠르고, 구조 계산도 정확하게 해내니까 선배들이 “야, 너 여기서 제일 열심히 산다” 하면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위원회 회의 때 내가 만든 자료로 발표하는 날도 있었고, 언론에 우리 연구원 이름이 오르내릴 때 내 이름이 실무자로 언급되기도 했다.
집에 퇴근하면 온몸이 녹초가 돼서 쓰러지듯 잤지만, 아침에 눈 뜨면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때 깨달았다. 음악 무대에서 마이크 쥐고 관객들 환호 받던 그 전성기와는 또 다른, 진짜 내 길 위에서의 전성기가 시작됐다는 걸.
그리고 그 길은, 삼풍과 성수대교의 아픔 위에서 더 안전한 건축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내 인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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