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9
조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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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전
그날 아침, 우리는 모텔을 나와 학교 근처 조용한 카페로 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스치는 가을 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님은 라떼를 천천히 저으시며, 갑자기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 사실 한 번 결혼했었어.”
나는 잔을 내려놓고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온 말이라 놀랐지만, 표정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교수님은 창밖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유학 가기 전, 스무 살 후반에 결혼했었지. 상대는 같은 과 선배였어. 그때는 춤이 전부였고, 사랑도 춤처럼 뜨거웠으니까. 그런데 내가 해외로 장기 유학을 가면서… 거리가 멀어지니까 마음도 점점 멀어지더라.”
교수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 잔을 살짝 돌리셨다.
“처음엔 자주 통화하고, 방학 때마다 만나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일상이 너무 달라졌어. 나는 그쪽에서 춤만 추고, 그는 여기서 자기 길을 갔고. 결국 유학 끝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둘 다 변해 있었던 거지. 그래서… 조용히 이혼했어.”
교수님은 그 말을 마치고 나를 똑바로 보셨다. 그 눈빛엔 후회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해방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 후로 혼자 지냈어. 춤이랑 학생들이랑… 그게 내 전부였는데.”
그러시더니 살짝 미소 지으시며 내 손을 테이블 위로 살짝 덮으셨다.
“그런데 어제… 당신 무대 보고, 오늘 아침 이렇게 같이 커피 마시고 있으니까…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저도… 교수님 만난 이후로, 매일이 달라졌어요. 혼자이셨다는 게… 이제는 안 믿겨요.”
교수님은 그 말에 살짝 웃으시더니, 손에 힘을 주셨다.
“그럼… 이제부터는 혼자가 아니어도 되겠네.”
그날 아침 카페 창가에서,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나눴고,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했다.
이혼이라는 상처가 있었기에, 교수님의 지금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빈자리를, 진심으로 채워드리고 싶었다.
그 이서연 교수님과의 사랑은 정말 뜨겁고 진지했다. 부끄럽지 않게,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매일이 소중했다. 교수님은 나를 학생이 아닌 연인으로 대해주셨고, 나는 교수님을 여자가 아닌 내 전부로 사랑했다. 연습실에서 합주 끝나면 교수님 연구실로 몰래 올라가서 안고 키스하고, 주말엔 교수님 집에서 밤새도록 서로를 탐했다. 교수님의 몸을 안을 때마다 그 탄력 있는 무용수의 라인, 낮은 신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모든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3학년 1학기 말, 나는 해병대에 입소하게 됐다. 지원한 지 오래됐는데 마침 그해에 합격 통보가 왔다. 훈련이 워낙 혹독하다고 소문난 곳이라,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지만 나는 “남자라면 한 번쯤”이라는 생각으로 결심을 굳혔다.
입대 한 달 전, 우리는 정말 매일 만났다. 수업 끝나면 바로 교수님 집으로 가거나, 교수님이 차를 몰고 내 자취방으로 오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를 안고, 키스하고, 사랑을 나눴다.
아침에 눈 뜨면 교수님이 내 가슴에 머리를 베고 있고, 나는 교수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오늘도 사랑해”라고 속삭였다. 샤워를 같이 하고, 교수님이 직접 아침을 차려주시면 맞은편에 앉아서 서로만 바라보며 밥을 먹었다. 오후엔 소파에 앉아서 영화 한 편 틀어놓고, 영화는 보지도 않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저녁이 되면 침대로 가서 천천히 옷을 벗기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나눴다. 교수님은 내 몸 구석구석을 입술로 새기듯 키스하시고, 나는 교수님의 허리를 감싸며 깊이 들어갔다. 절정에 이를 때마다 교수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몸을 떨었고, 나는 교수님 안에 모든 걸 쏟아냈다. 끝난 뒤엔 꼭 끌어안고 누워서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나도… 너 없인 안 돼” 하며 속삭였다.
밤이 되면 창밖 달빛을 보며 또다시 서로를 원했다. 하루에 두 번, 세 번… 셀 수도 없을 만큼. 교수님은 “네 몸을 최대한 기억하고 싶어” 하시며 내 가슴과 배, 허벅지까지 손끝으로 쓰다듬으셨다. 나는 교수님의 어깨와 허리, 부드러운 가슴을 입술로 새기며 “입대해도 매일 생각할게요”라고 약속했다.
입대 전 마지막 날. 교수님 집 침대에 누워 서로를 안고 울었다. 교수님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고, 나는 교수님의 등을 토닥이며 “2년 4개월 금방이에요. 기다려주세요”라고 수십 번 말했다. 그날 밤도 우리는 끝없이 사랑을 나눴다. 서로의 몸을 더 깊이 느끼려는 듯, 더 천천히, 더 오래. 새벽까지 안고 키스하고, 다시 안고… 잠들기 직전 교수님이 내 귀에 속삭였다.
“너 오면… 평생 같이 살자.”
나는 그 말에 다시 교수님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약속이에요. 꼭 돌아올게요.”
그 한 달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해병대 입소하는 날, 교수님은 훈련소 정문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셨다. 마지막 포옹, 마지막 키스. 교수님은 눈물을 참으며 미소 지으셨고, 나는 “사랑해요”라고 크게 외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긴 훈련소 생활 속에서도 교수님과의 추억이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매일 밤, 눈 감으면 교수님의 따뜻한 품과 그 달콤한 신음이 떠올랐다.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이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 사랑은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남자로, 교수님만을 사랑하는 남자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해병대 입소 후,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병과 교육을 받을 때 헌병으로 배정됐다. 그리고 자대는… 제주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대한민국 가장 남쪽 끝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훈련소 때만 해도 “제주도면 좋지 않냐”는 위로가 많았지만, 실제로 배치받고 보니 외로움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처음엔 교수님의 편지가 매주 왔다. 하얀 봉투에 교수님의 글씨로 쓰인 편지. “오늘 춤 연습하다가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제주 바다 사진 보내줘서 고마워, 나도 곧 가고 싶네” 그런 문장 하나하나가 내 유일한 위안이었다. 밤에 야간 근무 서 있을 때도, 주머니 속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버텼다.
그러더니… 석 달에 한 번으로 줄더니, 1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다.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 없었다. 군대라 핸드폰도 없고, 외출도 제한적이라 내가 먼저 연락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처음엔 “바쁘시겠지, 세미나 많으시니까” 하며 이해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이 커졌다.
그리고 첫 휴가. 10박 11일, 아니 실제론 15일 정도 집에 갈 수 있는 긴 휴가였다. 가방 하나 메고 비행기 타자마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교수님 얼굴 보자마자 안고, 그동안 쌓인 그리움을 다 풀자… 그런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서울 도착해서 바로 교수님 집으로 갔다. 초인종 누르고, 문 앞에 서서 숨죽이고 기다렸다.
문 열어준 사람은 교수님이 아니었다. 연구실 조교였나, 누군가 나와서 말했다.
“교수님… 지금 이탈리아 세미나 참석 중이세요. 한 달 일정이라…”
그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그냥 현관 앞에 앉아버렸다.
집에도 가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친구들이랑 지낸다”고 거짓말하고, 학교 동아리 방으로 갔다. 체육관 뒤편 그 낡은 연습실 소파에 누워서 15일을 보냈다. 낮엔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밤엔 맥주 사 와서 혼자 마시고… 멤버들이 걱정하며 와서 같이 있어주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허전함, 그 배신감, 그 외로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휴가 끝나고 제주도로 복귀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결심했다.
다시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아프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 후로… 내 방탕함이 시작됐다.
제주도 자대에서, 외출 나올 때마다 술 마시고, 여자 만나고, 의미 없는 밤을 보냈다. 그게 외로움을 잊는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다.
교수님에 대한 사랑은 아직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그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 다가갈 용기도, 믿을 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해병대 헌병으로서의 생활과, 마음속 텅 빈 구멍을 채우려는 어리석은 방탕함 속에서 남은 군 생활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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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
큰등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