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하루 17

★숙의 하루 (제15부)★ 교실 안의 정사, 숙과 은 ②
은은 수업시간이 바뀔 때마다 미술실의 창 밖을 유심히 살폈다. 바로
아래가 학생부실인 미술실 - 그렇기에 곧바로 계단을 통해 올라와도
될 것을 조금전에 일부러 뺑 돌아 2층 복도를 지나온 것이다.
하지만 첫 두시간 내내는 그녀의 목표가 수업이 있는 모양, 그렇기에
내내 그녀는 학생들을 앉혀 놓고도 창 밖으로 내려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과연 그녀가 찍은 남자는 짐작대로였다. 아무리 체육선생이라고는 하
지만, 학생들 틈에서도 그는 단연 돋보였다. 토요일이므로, 그는 무
리 없이 수업시간을 축구 같은 구기종목으로 때우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상의 - 수업시간이 끝날 때쯤에는 으례 땀으로 젖어, 권
의 단단한 몸매를 더욱 날렵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하아... 은의 입술 사이로 알 수 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런 근
육질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 마교장, 한선생, 심지어는 그녀의 애
인에게서도. 물론 은의 애인은 조금 그런 대로라는 것을 실전에서 알
고 있는 그녀지만, 그조차도 요즘은 시들했다.
뭐랄까, 이 곳에 강사로 발령되기 이전부터 제법 오래 사귀어온 자기
애인인데도, 가끔 가져온 잠자리가 계속될수록 그녀는 일종의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권선생이 학생들과 어울려 수돗가에서 웃통을 벗은 채 씻고 있
는 광경을 보자니, 더더욱 뜻 모를 한숨이 비어져 나오는 은이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념도 좋지만, 큰 일이다. 토요일, 수
업은 오전의 네 시간으로 끝날 것이다. 만약 다음 시간 - 세째 시간
- 에도 저 권에게 수업이 있다면 낭패다. 마지막 수업은 학급활동이
기에, 그는 자기가 담임을 맡은 교실로 들어갈 것이다. 학생부실이
아니라.
-반장, 애들 그린 것 모아서 탁자 위에 놓고 나가. 못 그린 사람은
다음 시간까지 숙제...!
수업이 끝나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은. 웅성이는 학생들이 나가고...
다시 십여분간 조용해지고... 다시 한 떼의 학생들이 무리져 들어왔
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3교시가 시작된 것이다.
-앞의 석고상, 데생하도록 해. 목탄 쥐는 법은 저번 시간에 가르쳐
줬지?
학생들은 군말 없이 화판이니 스케치북등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
작했고, 은은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됐어 - 순간 은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운동장 가운데는 단 한 개의 반만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반을 가
르치고 있는 것은 분명 권이 아니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혹시나
운동장을 가로 질러 체육관을 향하는 반이 있는지도 유심히 살폈다.
수업 5분이 지나도록, 체육관을 향하는 학생들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타겟이 있는 장소는 단 하나다.
학생부실. 담임 이외에 별도의 학생부 직책을 맡은 남자 선생들은,
응당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그곳에 있는다. 근신 중이거나, 징계를
받는 학생들이 늘 한두 명 있기 마련이고... 그런 녀석들을 감독하기
위해 교대로 한 명 이상의 교사들이 상주한다 - 이 생리를 철저히 파
악하고 있는 은인 것이다.
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은은 교사용으로 마련된 화판 앞으로 다가 앉
았다.
이제는, 저 학생들이 알아서 할 터 - 걸린 놈들은 불쌍하겠지만 그런
사정에 연연할 그녀가 절대 아니다.
앉자마자 화판 쪽으로 몸을 기울인 은의 다리가 큰 동작으로 꼬아졌
다.
숙은 그 시간이 마침 수업이 없는 시간이었다. 초조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녀는 음악실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무슨 뾰족한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그저 오늘 이
하루가 무사히 지나기만을 빌었다. 언젠가 호출을 당하겠지만, 오늘
이 학교 안에서만은 피하면 된다. 그럼 월요일까지는 별 일이 없을
것이다.
어제처럼 집으로 전화가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집안 사정을 대
고 사양하면 되는 것이다. 어쩔 것인가, 집까지 쫓아올 마교장은 아
닐 테니...
그러나, 다음 순간 깨어지는 그녀의 기대.
드르륵, 음악실의 문이 열리며 나타난 남자... 고개를 든 숙의 가슴
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 한선생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서있었다.
-수업이 없나 보지?
놀란 숙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는 등 뒤로 음악실의 문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음악실 구석구석
을 할 일 없는 눈길로 둘러 보는 한선생.
-역시... 음악실은 조용해서 좋단 말이야.
-무, 무슨 일이시죠...?
의혹과 긴장감으로 날카로와진 숙의 말에도, 그는 딴청만을 피우고
있다.
-흠... 피아노라... 난 왠지 피아노 치는 계집애들이 그렇게 이뻐 보
이더라니까... 한 10년도 더 된 일이지... 아니 12, 3년쯤 되었나...
? 신임으로 교사발령이 난 게 여중이었어. 그 때 처음 피아노 치는
년을 보았는데... 교사가 아니라 학생년이었지, 아마...
은근히 뇌까리는 한선생의 말투 - 숙은 책상 아래로 마주 잡은 손마
디가 하얘지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저 주임선생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마치 평범한
일상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저 이야기의 끝에는 항상 두려운
뭔가가 이어졌었다.
키득거리는 그의 목소리.
-아주 돌아 버릴 정도로 예뻤지. 그 때만 해도 여선생이란 계집들은
콧대만 셌거든... 그래서 그런 음악선생은 꿈도 못 꿨어. 대신 어린
기집애를 고른 거야.
계집, 계집, 년, 년... 그의 거슬리는 말투에 항의 한마디 못하는
숙. 그 때였다.
피아노 건반을 띵, 두드린 그가 휙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순간적으
로 마주친 시선을 황급히 피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그의 비아냥거
리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 들었다.
-그래서 내가 어쨌을 것 같나? 음악선생님?
자문자답하는 한선생.
-어느 날인가, 날 짝사랑하는 것 같았어. 그 기집애가... 왜, 그 때
그 또래쯤 한 번씩 그러잖아? 큭큭... 그 년 눈에는 내가 멋장이 총
각선생으로 보였겠지. 그래서... 어느 날엔가 걔를 불렀지. 숙직하던
날 수업 후에... 그리고 음악실에 앉히고, 피아노를 치라고 시켰어.
좋아라 치더군... 정말... 이쁜 기집애였어.
클클클, 그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계속되더니 갑자기 딱 멈췄다.
-자, 이쯤이면... 궁금하지 않아? 물어 봐 줘. 그래서 어쨌느냐구.
후, 한숨을 내쉰 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런데요?
-간단해. 그냥 그 자리에서 벗겨놓고... 따 먹었지. 피아노 의자, 바
로 이 위에 엎드리게 해놓고 말이야. 그래도 그 년... 아파 죽겠는데
도 찍 소리 한번 않더라구, 내 거시기에 피가 묻는데도... 자기가 짝
사랑하는 선생님이 그래 주니까 말이야. 흐흐흐...
아뿔싸, 그녀의 입술이 아프게 깨물어졌다. 한선생, 저 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숙이... 니가 올해 몇이지? 스물 여섯? 일곱? 맞아, 그럼 딱 그 시
절이었겠군 그래... 혹시 그 기집애가 너였나? 그 년이 그랬거든. 자
기는 음악선생이 되고 싶다고. 너랑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여학생 사
타구니가 어떻게 생겼느지 잘 봐둘껄... 확인해 보게, 푸하핫...!
개자식! 숙의 입 안으로 욕이 맴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는 없었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 돼지 눈에는 돼지일 뿐이야. 저 인간은... 원
래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를 악물고 침착해지려 애썼다.
-여, 여기 오신 용건이 있나요? 용건이 없으시면... 나가 주세요. 여
긴 제 교실이에요...!
최대한 위엄 있게 보이려는 말투... 그러나 그런 것이 한선생에게 통
할 리가 없다.
-니 교실? 임시교사 주제에...? 좋아, 용건이라... 용건. 물론 있지.
나도 그렇게 한가한 놈은 아니거든.
그의 눈이 뱀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움찔, 그에 숙의 가슴이 두방망
이질치고 있었다. 제발, 그 소식만은 아니기를.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바램를 무참히 짓밟는 한선생의 이야기였다.
-교장실로 가봐.
쿵, 그녀의 몸 한가운데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 안돼 - 무
언가가 와장창 무너지고 있었다. 올 것이 오고 말았나!
하지만 최대한 태연한 체, 되물어야 한다.
-그, 그런 이야기를... 왜 저, 저한테 하시는 거죠?
숙으로서는 이제 단 하나의 무기, 적과 맺은 협상만이 남아 있었다.
한선생, 그가 약속하지 않았는가. 자기에게 몸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마교장의 손아귀만큼은 피하게 해주겠다고.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영과의 약속 - 오직 한 번, 처녀지인
항문성교만으로 만족하겠다던 약속 역시, 그는 휴지조각으로 만들었
다는 것을.
한선생, 애초부터 그에게, 그녀와의 약속은 별다른 중요성이 없었다
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단 하나... 당사자인 그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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