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엄마 명숙이 2
Mg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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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2
‘투 오브어스 라이딩 노웨이 스펜딩 썸원 하~드 언~ 페이’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아침이었다.
나는 잠들어있는 그녀 몰래 아침을 준비중이었다.
그래봐야 당시 할수 있는 요리란 에그스크럼블과 토스트기로 굽는
식빵이 전부였다.
잠시후 문이 열리고 퉁퉁 부은 얼굴의 그녀가 부엌으로 나왔다.
나는 그런 퉁퉁부은 얼굴이 너무 귀여워 그녀 옆으로 달려가
볼에 쪽 뽀뽀를 날렸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녀 특유의 허스키한 말투로 물었다. 나는 텐션을 높이며
”어제 드디어 세상에서 유일하게 명숙이 똥꼬를 맛본자로 등극했는데
그럼 기분이 안좋겠어? 10년을 바라고 바래왔던 순간인데?”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질려버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기다려 물 다 끓었어. 커피 타줄께”
당시에는 아메리카노 같은건 신촌에나 나가야 볼수 있는 것이었고
커피는 가루와 프림 설탕을 섞은 것이 거의 국룰 이었으므로
커피를 타는자의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던 때이다.
나는 그녀의 커피 취향을 잘알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내가 타준 커피를 한모금 마신 그녀가 짧은 탄성을 뱉었다.
“하아~ 좋다!”
“자! 계란이랑 빵도 드세요~”
나는 싱글벙글하며 그녀 앞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너도 먹어” 그녀가 포크로 계란을 한입 떠먹은 후 말했다.
“난 우리 명숙이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불러”
그러자 그녀는 풉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에휴.. 너는 내가 그렇게 좋니?”
“아~ 제발 이제 그거 그만 좀 물어봐. 앞으로 그 질문 금지야.
한번만 그 질문 더하면 벌칙!”
“벌칙이 뭔데?”
“흐음… 항문섹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나저나 누가 차려주는 아침 먹어본거 진짜 오랜만이네..”
그녀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게 그렇게 고마워?”
내가 묻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마우면…” 하고 말끝을 흐리자 궁금하다는 듯
그녀의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고추 빨아줘!”
그러자 그녀는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그와 짝꿍이 된 이듬해 d와 나는 다른반으로 흩어졌다.
나는 d에게서 학습한 사교기술을 바탕으로 그나마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d와 친한것처럼 친할수는 없었겠지만 새로 사귄 친구들은
만화책이나 게임팩 같은 것들을 서로 교환하며 지냈다.
반면 d는 핵인싸 답게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
d와 나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농담을 하고 가끔씩 함께 오락실을 간다던가
했지만 그전과 사이가 같을수는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북쩍거렸고 그의 집을 방문해
그의 어머니를 알현하는 영광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에 입학했을때 d와 나는 조금 더 멀어졌다.
그와 나는 약 1.5km 정도 떨어진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했다.
d와는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쳤다. 볼때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금씩 변해갔는데 소위 ‘겉멋’ 이 들었던 것이다.
바지를 줄여입고 당시 살벌하던 두발단속에도 불구하고 앞머리를
아주 조금 기르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를 마주칠때면 이렇게 묻곤 했다.
“너네 학교는 두발단속 안하냐?”
“그래서 일찍 나가는거 아니냐. 교문앞에서 학주 안마주칠려고..”
이렇게 조금씩 서로 다른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나 d와는 그래도
종종 마주쳤다. d의 학교와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딱 중간즈음에
구청에서 만든 근린공원이 있었는데 당시 토요일 방과후…
그렇다. 그때는 토요일에도 4교시까지 수업을 했던 시기이다.
각설하고 토요일 방과후 나의 중학교 친구들과 그 공원으로 가면
먼저 우르르 친구들을 데려와 축구장에 나와있던 d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넓은 운동장에서 나를 발견하면 운동장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나를 맞아주었다.
이리하여 한동안 d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은 그곳에서 서로의
모교의 명예를 건 우리들만의 월드컵을 치르곤 했다.
여기서 잠깐! 한때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혹시 내가 d의 어머니를 흠모하는 이유가 그녀가 친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종의 금기된 것을 욕망하는 길티 플레져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때 사귄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고는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명숙을 흠모한건
그녀가 친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명숙이었기 때문이었다.
d와는 이렇게 우리들만의 피튀기는 월드컵을 치르곤 했지만,
사실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든 공원이든
마주칠때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고 아마 그에게
나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전에는 그나마 한해에
한두번 정도 그의 집을 방문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중학교에 가고나선
그런 기회조차 없었고 d의 어머니를 볼수있는 기회는 아예 없었다고
보면 된다.
d와 내가 서로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게된 어떤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은 학원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지나며 동네 놀이터를 한번 힐끔 쳐다봤는데
거기에는 크고 낯익은 실루엣 하나와
작고 낯선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d와
아주 뽀얗고 하얀 여자 아이가 있었다.
“오우~ 친구!”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소 오바스럽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여기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고, 여기는 내 여자친구!”
d가 손을 번갈아가며 나와 소녀를 인사시켜 주었고 나와 그녀는
서로 멋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럽네. 담에 보자“
”그래 담에 보자“ 이렇게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쩌면 나와 d는 이제 만나도 서로 할말이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친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d에게서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느끼는 만큼이나 d의 어머니를
향한 마음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어릴적 그냥 한때 흠모했던 동네 누나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그때는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다.
그녀를 마주칠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단한번. 조금씩 사그라들던 그녀를 향한 열정이 갑자기 불타오르게 된
어떤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까 중3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심부름을 위해 터덜터덜 시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시장입구에서 양손가득 비닐봉투를 들고있던 그녀를 마주쳤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우렁차게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어머? 너 x구나! 진짜 오랜만이다. 와아~ 키가 엄청컸네.“
그녀는 반가운듯 나에게 말을 쏟아냈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짐을 낚아채 양손에 들면서 말했다.
“어머님 제가 집까지 들어드릴께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리줘. 어디 가는길 아니었어?”
“그냥 잠깐 심부름 왔어요. 급한일 아니니까 괜찮아요 하하”
나는 사회적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와 함께 나란히 d의 집으로 걸으며 그녀는 나에게 사회적 대화를 걸어왔다.
“못 알아볼뻔 했다 얘! 어른이라고 해도 믿겠네”
“하하” 나는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요 이제 이런 사회적 대화도 가능한 어른인걸요!‘
얼핏보긴 했지만 그녀는 약간 살이 찐것 같기도 하고 주름이 조금 생긴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뜬금없이 나의 온 신경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발이었다. 눈을 내리깔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자니
내 눈에는 오직 그녀의 발만이 보일 뿐이었다.
노란색 꽃잎이 장식된 샌들에 발톱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변태였던가?
이런 저런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내 머리속은 오로지
그녀의 발로 가득차갔고 이윽고 그녀의 집앞에 도착했다.
“고맙다. 집에 잠깐 들어왔다 갈래?”
“d 집에 있어요?”
“걔는 요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부터 나가서는 아직도 안들어오네.
집에 잠깐 들어왔다가! 쥬스 한컵 줄께”
“아니에요. 그럼 저 가볼께요” 나는 인사를 꾸뻑하고 돌아섰다.
“다음에 d 집에 있을때 꼭한번 놀러와. 맛있는거 해줄께”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한번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고는 홱 돌아서며
생각했다. ’오우~ 나 자신. 쿨해! 멋있었어!’
그러나 그날밤 내 머리속은 온통 그녀의 발로 가득차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발과 빨간 매니큐어!
내가 이렇게 변태였던가? 다시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그녀를 떠올리며 폭풍자위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만나게 된 후 우리가 사랑을 나누게 된 그 10년 사이에
내가 오매불망 그녀만을 바라고 원해왔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그때에는 그저 철모르던 시절에 동네 누나를 흠모하는..
먼훗날 떠올리면 실소가 나올 그런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하는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에게도 요즘말로 ‘썸’이란걸 타는 어떤 소녀가 있었다.
그녀와는 중3때 같은 반으로 만났다. 중학교 2학년까지 항상 1등으로
등교하던 나와는 창가 맨 뒷자리를 경쟁하는 사이로 처음 그녀를 알게 되었다.
창가 맨 뒷자리. 부지런한 학생들만이 쟁취할 수 있는 자리이다.
중3이 되고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나보다 먼저 와서 마치 자기집 안방인양
창가맨 뒷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의 모습을 처음보고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나같은 또라이가 세상에 나말고도 있었구나…
존심상 그녀의 옆이나 앞자리는 앉을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나는 복도쪽 맨뒷자리로 갈수밖에 없었다.
이 치욕은 내일 꼭 갚아주마 다짐하면서.
다음날 나는 새벽 여명이 트기도전 기상하여 아침마저 거른채
등교했다. 다행히 창가 맨 뒷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30분후쯤 그녀가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승리자의 미소를 띄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
그러자 그녀는 내 앞에서 쭈뼛쭈뼛 하더니 작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 내 자린데!”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먼저 왔는데?”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어제 내가 앉았던
복도옆 맨뒷자리로 가는게 보였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음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등교하는데
우리반 교실에 불이 켜진것이 보였다. 나는 조바심을 느끼며
복도를 거닐었다. 설마? 에이 설마.. 지금 시간이 몇신데?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가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 독한년! 내가 졌다! 나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그 뒤로
나의 자리는 복도옆 맨 뒷자리가 되었다.
나는 d에게서 사교성이란걸 배운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같은 반 아이들과
이런 저런 농담도 하며 지냈지만 사실 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활자를 보는게 편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예
인간관계 자체에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워낙 없는
아이라 학기초를 제외하고는 나와 마주칠일도 말을 섞을일도 없었다.
가끔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마주치곤 했지만 그녀는 나를 본채만채
문학섹션에 서서 소설책을 고르거나 잡지코너에서 표지만봐도
잠이 쏟아질 창작과 비평같은 잡지를 읽곤했다.
나는 추리소설 빌릴때를 제외하고는 비문학 코너에 있었기에
그녀와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시간을 때우려 집에서
가져간 책을 보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읽고있던 내 책을 집어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도 이 작가 좋아해?”
아마도 나의 친누나가 읽을려고 사다놨을, 그러다가 집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그 책을 제목만 보고 ‘낚시관련 책인가?’ 하고 가져왔던게
화근이었다.
“이 작품 정말 좋아. 꼭 읽어봐”
나는 책을 ‘작품’이라고 말하고 재밌다라고 말하기 보다 ‘좋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에 그녀에게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그녀가 말하기로 그 작품은 이름도 들어본적 없는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했다.
“어… 그래?”
그 뒤로 나는 가끔씩 그녀가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묻곤했다.
그러면 그녀는 아마도 내가 평생을 가도 알아듣지 못할 문학관련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나는 ‘작품’ 이나 문학이 아닌 그녀 자체에
흥미가 생겼기에 그녀가 하는 말들을 그저 잠자코 듣곤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힘겹게 챙취한 창가 맨 뒷자리를
마다하고 복도옆 쓰레기통앞 내 옆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나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같은 반 아이들도 약간 웅성웅성 했지만
그녀는 뭔상관이냐는 듯 신경쓰지 않고 익숙하게 책장을 넘겼다.
‘신경이 쓰여 공부를 못하겠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다고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리만 바뀌었을 뿐 그녀는 그저 하던데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오는 향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그녀에게 물었다. “야! 샴푸 바꿨어?”
그러자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남이사” 그러고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운동회가 다가왔다.
친구들과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톡톡치는 것이었다.
“너 나랑 2인 3각 할래?”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 그래!?”
체육수업에 운동회를 준비하느라 다들 연습을 하는 동안 나와 그녀는
그저 그늘진 스탠드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책을 읽었다.
이윽고 운동회날이 찾아왔다. 그녀와 나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에
그날 처음 손을 맞잡고 출발선 앞에 섰다.
그녀의 손은 뭐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드라운 것들을
한데 뭉쳐놓은 것 같았다. 그 손을 잡으니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지배한 탓에 우리는 당당히
꼴찌를 기록했다.
졸업을 얼마앞둔 어느날. 신입교사였던 담임이 졸업전 문집을 만들겠노라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책임자로 그 아이를 지목했다.
딱봐도 사람보다 책과 친해보이는 아이라 그런 결정을 내린듯했는데
사실 문집을 만드는일은 활자보다는 사람과 익숙해야 할수 있는
일이기에 이 결정은 열정넘치는 담임의 오판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 아이는 문집을 만드는 총책임자가 되었고, 부책임자라
쓰고 온갖 잡일을 할 사람으로 나를 지목했다.
당시 특목고 입시를 앞둔터라 할 형편이 못되었으나 나는 어쩔수 없이
허드렛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만사를 귀찮아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바치며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표지나 중간중간에 삽입될 그림을 위해 예고를 준비하는 아이를
설득하는 과정도 험난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일은 그녀와 내가 할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학원까지 땡땡이를 쳐가며 일을 했다.
학교앞 문방구와 복사를 겸하는 곳에 문집 원본을 맡기기로한
시한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은 아무말이나 대충 휘갈겨
써줄 아이들을 독려하느라 이미 진이 다 빠져있었다.
그녀와 나는 마지막까지 수정과 편집을 거듭하며 복사집에 원본을
맡기기로 한 그날 저녁에 겨우겨우 문닫은 셔터를 내린 그 가게의
문을 두드려가며 원본을 넘길수 있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미 어두컴컴한 저녁이었기에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께”
그리고 그녀와 나는 말없이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한두마디쯤 한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이제는 기억에 없다.
그저 말없이 하늘을 보며 걸었던 것 같다.
“다왔어. 고마워”
“그래. 내일보자”
하고 돌아설때 “잠깐…” 하고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멀뚱멀뚱히 그녀를 보며 서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조심히 들어가. ”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때 그녀가 하려고 했던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게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말과 같다면…
그래서 그말을 나에게 했었더라면…
그녀가 한 그 말에 내가 당시에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그말을
그래서 내가 했더라면…
나와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나와 명숙은 어떻게 되었을까…
졸업을 한 이후로…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으로라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지난 연말 이글을 쓰면서 그녀의 이름을 구글로 검색해보았다.
그녀가 원하던대로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는지
신춘문예에는 응모를 하고 있는지
등단은 했는지
지금의 나는 전혀 알수가 없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아침이었다.
나는 잠들어있는 그녀 몰래 아침을 준비중이었다.
그래봐야 당시 할수 있는 요리란 에그스크럼블과 토스트기로 굽는
식빵이 전부였다.
잠시후 문이 열리고 퉁퉁 부은 얼굴의 그녀가 부엌으로 나왔다.
나는 그런 퉁퉁부은 얼굴이 너무 귀여워 그녀 옆으로 달려가
볼에 쪽 뽀뽀를 날렸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녀 특유의 허스키한 말투로 물었다. 나는 텐션을 높이며
”어제 드디어 세상에서 유일하게 명숙이 똥꼬를 맛본자로 등극했는데
그럼 기분이 안좋겠어? 10년을 바라고 바래왔던 순간인데?”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질려버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기다려 물 다 끓었어. 커피 타줄께”
당시에는 아메리카노 같은건 신촌에나 나가야 볼수 있는 것이었고
커피는 가루와 프림 설탕을 섞은 것이 거의 국룰 이었으므로
커피를 타는자의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던 때이다.
나는 그녀의 커피 취향을 잘알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내가 타준 커피를 한모금 마신 그녀가 짧은 탄성을 뱉었다.
“하아~ 좋다!”
“자! 계란이랑 빵도 드세요~”
나는 싱글벙글하며 그녀 앞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너도 먹어” 그녀가 포크로 계란을 한입 떠먹은 후 말했다.
“난 우리 명숙이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불러”
그러자 그녀는 풉하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에휴.. 너는 내가 그렇게 좋니?”
“아~ 제발 이제 그거 그만 좀 물어봐. 앞으로 그 질문 금지야.
한번만 그 질문 더하면 벌칙!”
“벌칙이 뭔데?”
“흐음… 항문섹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나저나 누가 차려주는 아침 먹어본거 진짜 오랜만이네..”
그녀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게 그렇게 고마워?”
내가 묻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마우면…” 하고 말끝을 흐리자 궁금하다는 듯
그녀의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고추 빨아줘!”
그러자 그녀는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그와 짝꿍이 된 이듬해 d와 나는 다른반으로 흩어졌다.
나는 d에게서 학습한 사교기술을 바탕으로 그나마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d와 친한것처럼 친할수는 없었겠지만 새로 사귄 친구들은
만화책이나 게임팩 같은 것들을 서로 교환하며 지냈다.
반면 d는 핵인싸 답게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
d와 나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농담을 하고 가끔씩 함께 오락실을 간다던가
했지만 그전과 사이가 같을수는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북쩍거렸고 그의 집을 방문해
그의 어머니를 알현하는 영광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에 입학했을때 d와 나는 조금 더 멀어졌다.
그와 나는 약 1.5km 정도 떨어진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했다.
d와는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쳤다. 볼때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금씩 변해갔는데 소위 ‘겉멋’ 이 들었던 것이다.
바지를 줄여입고 당시 살벌하던 두발단속에도 불구하고 앞머리를
아주 조금 기르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를 마주칠때면 이렇게 묻곤 했다.
“너네 학교는 두발단속 안하냐?”
“그래서 일찍 나가는거 아니냐. 교문앞에서 학주 안마주칠려고..”
이렇게 조금씩 서로 다른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나 d와는 그래도
종종 마주쳤다. d의 학교와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딱 중간즈음에
구청에서 만든 근린공원이 있었는데 당시 토요일 방과후…
그렇다. 그때는 토요일에도 4교시까지 수업을 했던 시기이다.
각설하고 토요일 방과후 나의 중학교 친구들과 그 공원으로 가면
먼저 우르르 친구들을 데려와 축구장에 나와있던 d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넓은 운동장에서 나를 발견하면 운동장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나를 맞아주었다.
이리하여 한동안 d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은 그곳에서 서로의
모교의 명예를 건 우리들만의 월드컵을 치르곤 했다.
여기서 잠깐! 한때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혹시 내가 d의 어머니를 흠모하는 이유가 그녀가 친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종의 금기된 것을 욕망하는 길티 플레져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때 사귄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고는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명숙을 흠모한건
그녀가 친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명숙이었기 때문이었다.
d와는 이렇게 우리들만의 피튀기는 월드컵을 치르곤 했지만,
사실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든 공원이든
마주칠때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고 아마 그에게
나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전에는 그나마 한해에
한두번 정도 그의 집을 방문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중학교에 가고나선
그런 기회조차 없었고 d의 어머니를 볼수있는 기회는 아예 없었다고
보면 된다.
d와 내가 서로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게된 어떤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은 학원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지나며 동네 놀이터를 한번 힐끔 쳐다봤는데
거기에는 크고 낯익은 실루엣 하나와
작고 낯선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d와
아주 뽀얗고 하얀 여자 아이가 있었다.
“오우~ 친구!”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소 오바스럽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여기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고, 여기는 내 여자친구!”
d가 손을 번갈아가며 나와 소녀를 인사시켜 주었고 나와 그녀는
서로 멋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럽네. 담에 보자“
”그래 담에 보자“ 이렇게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쩌면 나와 d는 이제 만나도 서로 할말이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친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d에게서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느끼는 만큼이나 d의 어머니를
향한 마음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어릴적 그냥 한때 흠모했던 동네 누나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그때는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다.
그녀를 마주칠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단한번. 조금씩 사그라들던 그녀를 향한 열정이 갑자기 불타오르게 된
어떤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까 중3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심부름을 위해 터덜터덜 시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시장입구에서 양손가득 비닐봉투를 들고있던 그녀를 마주쳤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우렁차게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어머? 너 x구나! 진짜 오랜만이다. 와아~ 키가 엄청컸네.“
그녀는 반가운듯 나에게 말을 쏟아냈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짐을 낚아채 양손에 들면서 말했다.
“어머님 제가 집까지 들어드릴께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리줘. 어디 가는길 아니었어?”
“그냥 잠깐 심부름 왔어요. 급한일 아니니까 괜찮아요 하하”
나는 사회적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와 함께 나란히 d의 집으로 걸으며 그녀는 나에게 사회적 대화를 걸어왔다.
“못 알아볼뻔 했다 얘! 어른이라고 해도 믿겠네”
“하하” 나는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요 이제 이런 사회적 대화도 가능한 어른인걸요!‘
얼핏보긴 했지만 그녀는 약간 살이 찐것 같기도 하고 주름이 조금 생긴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뜬금없이 나의 온 신경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발이었다. 눈을 내리깔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자니
내 눈에는 오직 그녀의 발만이 보일 뿐이었다.
노란색 꽃잎이 장식된 샌들에 발톱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변태였던가?
이런 저런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내 머리속은 오로지
그녀의 발로 가득차갔고 이윽고 그녀의 집앞에 도착했다.
“고맙다. 집에 잠깐 들어왔다 갈래?”
“d 집에 있어요?”
“걔는 요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부터 나가서는 아직도 안들어오네.
집에 잠깐 들어왔다가! 쥬스 한컵 줄께”
“아니에요. 그럼 저 가볼께요” 나는 인사를 꾸뻑하고 돌아섰다.
“다음에 d 집에 있을때 꼭한번 놀러와. 맛있는거 해줄께”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한번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고는 홱 돌아서며
생각했다. ’오우~ 나 자신. 쿨해! 멋있었어!’
그러나 그날밤 내 머리속은 온통 그녀의 발로 가득차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발과 빨간 매니큐어!
내가 이렇게 변태였던가? 다시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그녀를 떠올리며 폭풍자위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만나게 된 후 우리가 사랑을 나누게 된 그 10년 사이에
내가 오매불망 그녀만을 바라고 원해왔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그때에는 그저 철모르던 시절에 동네 누나를 흠모하는..
먼훗날 떠올리면 실소가 나올 그런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하는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에게도 요즘말로 ‘썸’이란걸 타는 어떤 소녀가 있었다.
그녀와는 중3때 같은 반으로 만났다. 중학교 2학년까지 항상 1등으로
등교하던 나와는 창가 맨 뒷자리를 경쟁하는 사이로 처음 그녀를 알게 되었다.
창가 맨 뒷자리. 부지런한 학생들만이 쟁취할 수 있는 자리이다.
중3이 되고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나보다 먼저 와서 마치 자기집 안방인양
창가맨 뒷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의 모습을 처음보고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나같은 또라이가 세상에 나말고도 있었구나…
존심상 그녀의 옆이나 앞자리는 앉을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나는 복도쪽 맨뒷자리로 갈수밖에 없었다.
이 치욕은 내일 꼭 갚아주마 다짐하면서.
다음날 나는 새벽 여명이 트기도전 기상하여 아침마저 거른채
등교했다. 다행히 창가 맨 뒷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30분후쯤 그녀가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승리자의 미소를 띄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
그러자 그녀는 내 앞에서 쭈뼛쭈뼛 하더니 작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 내 자린데!”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먼저 왔는데?”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어제 내가 앉았던
복도옆 맨뒷자리로 가는게 보였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음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등교하는데
우리반 교실에 불이 켜진것이 보였다. 나는 조바심을 느끼며
복도를 거닐었다. 설마? 에이 설마.. 지금 시간이 몇신데?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가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 독한년! 내가 졌다! 나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그 뒤로
나의 자리는 복도옆 맨 뒷자리가 되었다.
나는 d에게서 사교성이란걸 배운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같은 반 아이들과
이런 저런 농담도 하며 지냈지만 사실 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활자를 보는게 편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예
인간관계 자체에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워낙 없는
아이라 학기초를 제외하고는 나와 마주칠일도 말을 섞을일도 없었다.
가끔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마주치곤 했지만 그녀는 나를 본채만채
문학섹션에 서서 소설책을 고르거나 잡지코너에서 표지만봐도
잠이 쏟아질 창작과 비평같은 잡지를 읽곤했다.
나는 추리소설 빌릴때를 제외하고는 비문학 코너에 있었기에
그녀와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시간을 때우려 집에서
가져간 책을 보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읽고있던 내 책을 집어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도 이 작가 좋아해?”
아마도 나의 친누나가 읽을려고 사다놨을, 그러다가 집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그 책을 제목만 보고 ‘낚시관련 책인가?’ 하고 가져왔던게
화근이었다.
“이 작품 정말 좋아. 꼭 읽어봐”
나는 책을 ‘작품’이라고 말하고 재밌다라고 말하기 보다 ‘좋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에 그녀에게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그녀가 말하기로 그 작품은 이름도 들어본적 없는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했다.
“어… 그래?”
그 뒤로 나는 가끔씩 그녀가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묻곤했다.
그러면 그녀는 아마도 내가 평생을 가도 알아듣지 못할 문학관련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나는 ‘작품’ 이나 문학이 아닌 그녀 자체에
흥미가 생겼기에 그녀가 하는 말들을 그저 잠자코 듣곤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힘겹게 챙취한 창가 맨 뒷자리를
마다하고 복도옆 쓰레기통앞 내 옆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나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같은 반 아이들도 약간 웅성웅성 했지만
그녀는 뭔상관이냐는 듯 신경쓰지 않고 익숙하게 책장을 넘겼다.
‘신경이 쓰여 공부를 못하겠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다고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리만 바뀌었을 뿐 그녀는 그저 하던데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오는 향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그녀에게 물었다. “야! 샴푸 바꿨어?”
그러자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남이사” 그러고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운동회가 다가왔다.
친구들과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톡톡치는 것이었다.
“너 나랑 2인 3각 할래?”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 그래!?”
체육수업에 운동회를 준비하느라 다들 연습을 하는 동안 나와 그녀는
그저 그늘진 스탠드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책을 읽었다.
이윽고 운동회날이 찾아왔다. 그녀와 나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에
그날 처음 손을 맞잡고 출발선 앞에 섰다.
그녀의 손은 뭐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드라운 것들을
한데 뭉쳐놓은 것 같았다. 그 손을 잡으니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지배한 탓에 우리는 당당히
꼴찌를 기록했다.
졸업을 얼마앞둔 어느날. 신입교사였던 담임이 졸업전 문집을 만들겠노라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책임자로 그 아이를 지목했다.
딱봐도 사람보다 책과 친해보이는 아이라 그런 결정을 내린듯했는데
사실 문집을 만드는일은 활자보다는 사람과 익숙해야 할수 있는
일이기에 이 결정은 열정넘치는 담임의 오판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 아이는 문집을 만드는 총책임자가 되었고, 부책임자라
쓰고 온갖 잡일을 할 사람으로 나를 지목했다.
당시 특목고 입시를 앞둔터라 할 형편이 못되었으나 나는 어쩔수 없이
허드렛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만사를 귀찮아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바치며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표지나 중간중간에 삽입될 그림을 위해 예고를 준비하는 아이를
설득하는 과정도 험난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일은 그녀와 내가 할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학원까지 땡땡이를 쳐가며 일을 했다.
학교앞 문방구와 복사를 겸하는 곳에 문집 원본을 맡기기로한
시한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은 아무말이나 대충 휘갈겨
써줄 아이들을 독려하느라 이미 진이 다 빠져있었다.
그녀와 나는 마지막까지 수정과 편집을 거듭하며 복사집에 원본을
맡기기로 한 그날 저녁에 겨우겨우 문닫은 셔터를 내린 그 가게의
문을 두드려가며 원본을 넘길수 있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미 어두컴컴한 저녁이었기에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께”
그리고 그녀와 나는 말없이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한두마디쯤 한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이제는 기억에 없다.
그저 말없이 하늘을 보며 걸었던 것 같다.
“다왔어. 고마워”
“그래. 내일보자”
하고 돌아설때 “잠깐…” 하고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멀뚱멀뚱히 그녀를 보며 서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조심히 들어가. ”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때 그녀가 하려고 했던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게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말과 같다면…
그래서 그말을 나에게 했었더라면…
그녀가 한 그 말에 내가 당시에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그말을
그래서 내가 했더라면…
나와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나와 명숙은 어떻게 되었을까…
졸업을 한 이후로…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으로라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지난 연말 이글을 쓰면서 그녀의 이름을 구글로 검색해보았다.
그녀가 원하던대로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는지
신춘문예에는 응모를 하고 있는지
등단은 했는지
지금의 나는 전혀 알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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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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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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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Comments
잘봤습니다^^ 명작이네요
감사합니다 재밋습니다
잘보았습니다.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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